엘리자베스 1세의 아르마다 초상화 (the Armada Portrait)
1588년경, 작자 미상, 개인 소장
여왕의 뒤로 두 개의 창문이 보인다. 사실 이 창문 너머 광경들은 서로 다른 시간대에 벌어진 일들이다. 왼쪽은 무적함대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에스파냐의 아르마다(Armada)가 영국 함대와 대치하고 있는 장면이다. 당시 바다의 제왕이던 에스파냐는 아메리카와의 교역을 선점해 번영을 누리고 있었는데, 떠오르는 세력인 영국이 교역을 방해하자 1588년 영국을 침공하러 온 것이었다. 영국은 기동력 좋은 배와 장거리 함포로 맞섰고 화공(火攻)법을 써서 에스파냐 함대에 치명타를 가했다. 결국 이름답지 않게 패퇴하던 무적함대는 폭풍까지 만나 극심한 손실을 봤다. 오른쪽 창문은 바로 이 장면을 나타낸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가 아버지 헨리 8세에 이어 꾸준히 해군력을 증강해온 결과였다.
당대의 최강대국 에스퍄냐를 물리친 여왕은 지구의(地球儀) 위에 손을 올려놓고 있다. 이 초상화는 당대가 ‘대항해시대’였음을 보여준다. 여왕의 초상화처럼 유럽 권력자들은 지구본과 함께 있는 초상화를 활발히 내놓기 시작했는데, 대항해를 지원하면서 더 적극적인 무역에 눈을 뜬 군주들이 중상주의(mercantilism)1)를 추진하는 시대를 암시하기도 한다.
중상주의는 통일되고 체계화된 경제 이론은 아니었다. 16~18세기 절대왕정 국가들의 지도자와 상인들이 국부(國富)에 대해 대강 지녔던 생각을 종합한 것이다. 당시 절대군주, 경제관료, 무역상들은 한 국가가 부유한 정도가 그 국가가 보유한 금, 은 등의 귀금속 양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언제나 수입보다 수출을 많이 해서 그 대금인 금·은 화폐가 계속 유입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세계의 부(富)의 총량은 고정돼 있고 국제교역은 어디까지나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이었다. 무역흑자를 보는 나라가 있으면 적자를 보는 나라가 있을 테고 그것은 무조건 손해로 간주됐으니 말이다.
중상주의 정책은 프랑스 루이 14세(Louis XIV, 1638~1715) 때의 관료인 장 바티스트 콜베르2)에 의해 특히 힘을 발휘했다. 베르사유에 걸린 거대한 집단 초상화에서 콜베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화면 중앙에 앉아 있는 루이 14세의 오른팔 위치에 서서 왕립과학원 회원들을 소개하고 있다.
콜베르는 무역흑자를 내기 위해 자국 업체들이 경쟁력 있는 상품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문기술을 가진 외국 근로자들의 유입을 환영했고 반대로 자국 기술의 유출은 엄금했다. 또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외국에서 수입된 상품에 높은 관세를 매기는 보호무역(protective trade) 정책을 취했다. 중상주의자들이 추구한 지속적인 무역흑자는 자기모순을 지니고 있었다. 훗날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중상주의 무역 정책을 비판하면서, 무역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윈윈 게임(win-win game: 참가자들이 모두 이득을 보는 게임)이라고 역설했다. 즉 자유로운 무역이 효율적인 국제 분업을 가져와 각국의 소비자가 다양한 물건을 더 싼값에 살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방임주의 경제학에 밀려 중상주의는 점차 쇠퇴했다.
그렇다면 중상주의는 완전히 낡은 사상일까? ‘한강의 기적’을 이룬 한국의 1960~1970년대 경제발전 모델이 콜베르의 정책과 닮은 데가 많다. 이런 모델은 경제가 일정 수준에 이른 지금의 한국에서는 더 이상 적용되지 않지만 개발도상 단계에서는 중상주의적 정책이 필요하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다. 물론 그에 반대하는 학자들도 있어서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