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라이프

그림으로 보는 세계화의 역사
초상화 속 중농주의의 흔적
프랑스 왕 루이 15세를 사로잡은 여인 퐁파두르 후작부인(1721~1764)은 여러 점의 초상화를 남겼다. 여기에는 여후작의 얼굴뿐만 아니라 당대의 변화상을 읽을 수 있는 오브제들이 암호처럼 담겨 있다. 그중 모리스 캉탱 드 라투르가 파스텔로 그린 초상화를 보자. 18세기 로코코(Rococo) 미술양식의 작품 속에서 악보를 넘기고 있는 그녀의 주변에는 악기와 화첩, 책, 지구본 등이 놓여 있는데 이는 그녀가 문화 다방면에 조예가 깊다는 걸 암시한다. 실제로 그녀는 당대 학자와 예술가들의 강력한 후원자였으며, 특히 중농주의의 부흥에 크게 기여했다.
문소영 <그림속 경제학> 저자

퐁파두르 후작부인(1755) 모리스 캉탱 드 라투르 작 종이를 댄 캔버스 위에 파스텔 178x213.6㎝
루브르박물관, 프랑스 파리

퐁파두르 후작부인의 주요 후원 업적 중 하나가 이 그림에 숨어 있다. 바로 서가 오른쪽에 꽂혀 있는 묵직해 보이는 책이다. 이 책의 등에는 금박글씨로 ‘앙시클로페디(Enciclopédie)’, 즉 ‘백과전서’라고 선명하게 적혀 있다. <백과전서>는 그때까지 이루어진 과학적 발견을 포함한 다양한 학문·예술·기술의 지식을 드니 디드로(1713~1784)를 비롯한 당대의 진보적인 학자들이 엮은 것이다. 볼테르, 장 자크 루소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지성인들이 편찬에 참여했는데, 그중에 프랑수아 케네(François Quesnay, 1694~1774)라는 의사도 있었다. 케네는 퐁파두르 부인의 주치의로서, 의학뿐만 아니라 경제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당시 왕과 경제관료들을 지배하고 있던 중상주의(mercantilism) 사상이 못마땅했다.
중상주의 정책하의 유럽 각국은 앞다투어 보호무역을 하고 식민지를 넓히려 애쓰면서 서로 충돌이 불가피했다. 그 연이은 전쟁의 비용은 고스란히 농민의 세금 부담으로 전가됐다.

중농주의, 자연이 지배한다

이 상황에서 경제학자이자 의사인 케네는 부가 화폐 축적이 아닌 실물 생산에서 나오며 그것도 농업 생산에서만 나온다고 보았다. 자연으로부터 곡물, 과일 등의 원료를 얻는 데서만 투입된 이상의 가치가 창출된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그렇다면 상공업은 때려치우고 모두 농사만 짓자는 말인가? 그게 아니라 케네의 생각은 공업과 상업이 원활하게 돌아가야만 농업에 자본이 투입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계몽주의 시대의 의사였던 케네에게 농업, 제조업, 상업 사이의 자연스러운 순환은 인간의 혈액순환 내지는 자연의 법칙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렇게 경제 각 분야의 상호작용과 순환관계에 주목했다는 것이 현대경제학에 미친 케네의 가장 큰 공헌이다. 그는 퐁파두르 부인의 후원으로 중농주의(重農主義, physiocracy) 학파를 창시했는데, physiocracy는 그리스어에서 온 말로 ‘자연이 지배한다’는 뜻이다.
농업만이 부를 창출한다는 케네의 생각은 이후에 제조업과 유통, 기타 서비스 활동에서도 새롭게 추가되는 부, 즉 부가가치(value added)가 발생한다고 보는 근대경제학에 의해 밀려났다. 오늘날 한 나라의 경제수준을 나타내는 대표적 지표로 사용되는 국내총생산(GDP)은 일정기간 농업, 제조업, 서비스업 등 모든 산업에서 발생한 이러한 부가가치의 총합이다. 하지만 부가 금·은 획득이 아닌 생산에서 나온다는 생각과, 되도록 정부 간섭과 각종 규제를 줄이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자유방임주의는 근대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1723~1790)에게 영향을 미쳤다. 자유방임주의를 요약하는 유명한 구호 “레세 페르(laissez faire)”도 스미스 이전에 중농학파가 먼저 외친 것이었다. “레세 페르”는 한마디로 “내버려두라”는 소리다. 케네를 비롯한 중농학파는 최초의 체계화된 경제학자라 할 만했다.
중농주의 사상이 당시 프랑스 조세정책에 반영됐다면 역사의 흐름이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중농주의 학자들은 전반적으로 세금을 줄이거나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유일하게 징세를 해야 할 대상으로 지주들을 지목했다. 그들의 이론대로라면 토지와 농업만이 투입 이상의 가치인 순생산, 즉 부를 창출하는데, 그 부가 지대(地代)의 형태로 지주들에게 돌아오니 말이다.
실제로 케네의 영향을 받은 학자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1727~1781)는 재무총감 자리에 오르자 특권 길드를 없애고 부역을 폐지하며 지주들에게서 세금을 걷는 중농주의적 개혁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귀족의 엄청난 반발로 튀르고는 개혁안을 내놓은 지 불과 몇 달 만에 해임됐다. 그로부터 12년 지나서 프랑스는 대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됐다. 만약에 튀르고의 개혁이 성공했다면 어땠을까. 프랑스가 유혈을 동반한 혁명보다 점진적인 개혁의 길을 가게 되지는 않았을까.

프랑수아 케네 (François Quesnay, 1694~1774)의 초상화 작가 미상
관련 컨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