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싱가포르 디지털동반자협정(Korea-Singapore Digital Partnership Agreement, 한·싱 DPA)은 기존 4개 조항에 불과하던 한·싱가포르 FTA(2006) 전자상거래(electronic commerce) 챕터에 비해 규범 범위를 대폭 확대했고, 기본적인 디지털통상 규범에 더해 인공지능(AI), 핀테크, 디지털 경제의 표준 협력 등 디지털 신기술 분야에서의 협력 또한 포괄했다. 먼저 ‘전자상거래 원활화’를 위해서 전자적 전송 무관세, 전자인증 및 전자서명, 종이서류 없는 무역 등에 대해 기본적인 조항을 규정했다. 그리고 현재 세계무역기구(WTO) 내 복수국 간 전자상거래 협상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디지털 제품 비차별 대우’, ‘국경 간 데이터 이전 원활화’, ‘컴퓨터 설비 현지화 요구 금지’, ‘소스코드 공개 요구 금지’ 등 디지털 비즈니스 활성화를 위한 조항을 다수 포함했다.
사실 한·싱 DPA의 내용은 싱가포르가 기체결한 디지털경제동반자협정(Digital Trade Economy Partnership Agreement, DEPA)과 상당부분 유사하다.2021년 1월 발효한 DEPA는싱가포르·칠레·뉴질랜드 간 디지털통상 규범 확립 및 협력 강화를 위해 체결한 세계 최초의 복수국 간 디지털통상 협정이다. DEPA는 개방형 협정으로서 우리나라는 2021년 10월 가입절차 개시 후 여섯 차례 협상을 거쳐 가입하게 됐고, 현재 중국과 캐나다의 가입절차가 개시됐다. 동 협정은 거대 FTA의 대표적 사례인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에서 이미 다루어진 ‘데이터 이전 자유’와 ‘서버 현지화 요구 금지’ 등 디지털통상 규범을 확인하는 한편, 핀테크나 인공지능(AI) 거버넌스 등 새로운 디지털 이슈 관련 국가 간 협력을 강조했다. 회원국 간 제도 조화를 위한 규범 및 협력을 규정하고 있으며, 향후 DEPA 회원국 확장에 따라 혜택 범위가 계속해서 넓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사실 오래전부터 국가 간 전자적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교역에 대해서도 통상규범이 필요하다는 인식은 존재해왔다. WTO에서도 이미 1998년 전자상거래 작업반 설치 이후 꾸준한 논의가 지속되고 있으며, 상당수 FTA에서도 ‘전자상거래’ 챕터가 포함됐다. 그러나 급격한 디지털 전환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전통적 통상규범을 디지털 경제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해졌다. 새롭게 등장한 디지털 제품이나 서비스는 개념 정의부터 논란을 야기했으며, 디지털 데이터를 활용한 혁신적 비즈니스의 발전은 개인정보 보호 등 새로운 정책논의를 촉구했다. 규범의 공백은 디지털통상체제를 불안하게 했으나 다자무역체제인 WTO에서는 뾰족한 수를 찾지 못했다. 선진국들과 개발도상국들 간 기술격차는 물론, 규범 발전 방향에도 시각 차이가 커 합의점을 찾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이다. 비록 디지털 비즈니스 강국인 미국이 주도한 일부 FTA에서는 혁신적 통상규범이 어느 정도 포함됐지만, FTA라는 종합적인 무역자유화 협상 테이블에 올리기에 ‘디지털통상’은 너무 복합적이고 새로운 것이었다. 결국 기존 전통적 지역무역체제에서 탈피해 디지털통상에만 집중하고, 보다 더 다각적인 측면에서 국가 간 필요한 디지털통상 규범을 합의하게 된 결과물이 바로 DEPA인 것이다.
현재 빅테크 기업을 선두로 공격적인 디지털 시장 개방을 도모하는 미국과는 달리, 부족한 자원을 대체하는 미래의 전략적 성장동력으로서 디지털경제협정을 주도하는 싱가포르가 좀 더 우리에게 좋은 선례가 될 것이다. 싱가포르는 소위 ‘싱가포르형 디지털경제협정(Digital Economic Agreements)’을 추진하면서 DEPA뿐 아니라 싱·호주 DEA, 영국·싱 DEA를 포함해 한·싱 DPA까지 총 4건의 협정을 타결했고, 디지털통상 규정을 포함한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이나 CPTPP에도 가입했다. ‘디지털 강국’인 우리나라 또한 디지털통상 규범의 리더십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무역시장이나 거래 규모를 확장하는 것은 물론이고, 나아가 충분한 인적·물적 자원을 활용하는 구체적인 전략이 필요할 것이다. 이제 막 시작된 디지털통상 규범 개척 경쟁에서 과연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