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경제의 세계화(globalization)는 시대적 화두였다. 당시 우리 정부는 한국 경제의 독특한 성장모델을 부각하기 위해 ‘세계화’를 고유명사로 ‘Segewha’라고 일시적으로 표기하기도 했다. 국제화(Internationalization)가 국경을 초월한 국가 간 양자적 교류에 초점을 두었다면 세계화는 전 세계적 다자관계에서 상호 의존적이고 중층적 연계성으로 확장된 개념이다.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의 발족은 세계화의 분수령이 됐지만, 역설적으로 1990년대 후반기부터 자유무역협정(FTA)을 중심으로 한 지역주의가 급증하게 됐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는 상품과 서비스 교역의 증가세가 확연하게 정체된 양상을 나타냈다.
지난 5월 말 우리나라를 방문한 오콘조이웰라 WTO 사무총장은 세계화의 다자무역체제를 회복하기 위해 우리 정부와 산업계의 적극적인 협조와 역량 발휘를 요청했다. 취임 3년 차에 개혁의 성과를 창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지만 출범 당시에 비해 WTO의 위상이 약화되면서 회원국들의 기대감도 예전과 같지 않다.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의 제8차 우루과이라운드(UR)가 ‘가시고기’가 돼 WTO를 발족시킨 목적은 무역 자유화의 촉진이었다. 조약에서 기구로 신분이 달라진 후 영향력이 점진적으로 약세를 나타내는 구조적인 문제는 개혁으로 포장하기에 만만치 않은 과제를 내포하고 있다. 분쟁해결 기능의 부분적 마비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제통화기금(IMF)이나 국제부흥개발은행(IBRD)과는 달리 1국 1표의 투표권을 행사하는, 개발도상국 또는 약소국 친화적인 국제기구로서 글로벌 무역체제의 적정한 게임 룰을 효과적으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WTO 통계에 따르면, 2022년 디지털 방식으로 이뤄진 세계 서비스 무역 규모(금액 기준)는 전체 서비스 무역의 약 75%를 차지한다. 2022년 디지털 방식의 서비스 무역은 3조 8,250억 달러 규모로 2005년 대비 3.75배 증대됐다. 같은 기간 상품무역 규모가 2.52배, 일반 서비스 무역이 2.02배 증대된 것에 비하면 현저한 증가세다. 이러한 추세에도 불구하고, WTO는 디지털통상 규범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164개 회원국의 합의를 이끌어내기가 수월하지 않아 통상규범 설정자로서의 핵심역량 발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WTO는 2024년 2월 13일 13차 각료회의(MC 13)에서 체제 개혁의 청사진과 자유무역 활성화의 조리법을 제시하려고 애쓰고 있다. 한편으론 미·중 패권경쟁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 지배적 이슈로 부각되면서 탈세계화, 글로컬화(glocalization·지역 중심의 세계화), 지역주의로의 전환이 대세를 이룰 것으로 예견되기도 한다. 다자주의적 세계화가 유통기한에 직면할 것인지,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를 맞을 것인지의 이분법적 예측보다 더 흥미로운 점은 국제통상의 흐름이 어떤 패션으로 눈길을 끌 것인가다.
재세계화(reglobalization)가 탈세계화의 흐름을 가로막고 전통적인 세계화를 강화하는 것은 아니다. 코로나19 이전 세계화 체제의 질적 전환으로 이해해야 한다. 기존 세계화가 무역과 투자의 양적 확장을 통한 규모의 경제 효과를 추구했다면, 새로운 세계화는 보편적 가치에 기반한 무역과 투자의 질적 발전을 추구할 것이다. 다양하고 융복합적인 경제활동의 글로벌 연계성의 활성화라는 목적은 동일하지만 경쟁과 협력의 조건 및 방식이 다르다. 기회비용과 거래비용의 산출과 지불 방식이 다르다. 기존에는 단기적 공급망 확보와 비용절감이 장기적 이익 확보에도 그대로 기여할 것으로 고려했으나 이제는 단기적 이익 추구도 장기적 공급망 확보와 비용 변수에 따라 판단해야 하는 것으로 전환되고 있다.
재세계화의 의미를 전통적 세계화에 대한 회귀나 복고가 아니라 달라진 통상환경에 부합하는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이해한다면, 재세계화는 세 가지 측면에서 논의해볼 수 있다. 먼저 ‘경제안보’로 포장된 자국 우선주의의 베일을 어떤 방식으로 어느 정도까지 벗겨낼 수 있을 것인가를 고려해야 한다. 어느 국가도 자발적으로 자국 우선주의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므로 설득할 수 있는 세계화의 인센티브를 재발견해야 한다. 둘째, 다자적 협력관계를 어떻게 업그레이드할 것인가를 논의해야 한다. 개별 국가 간 상충할 수 있는 경제안보 이슈를 다자적 협력관계에서 상호적으로 완화시킬 수 있어야 자국 우선주의의 거래비용 부담을 가중시킬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다자주의 무역체제의 효과성이다. WTO의 개혁과 개발도상국의 참여도 제고와는 별도로 양자적 FTA와 복수국/다자간 메가(mega)FTA를 포괄할 수 있는 효과적인 통상규범의 정립과 이행이 필요하다. WTO 홈페이지는 기후변화 대응에 중점을 두고 있고 올 11월에 개최하는 2023년 공개포럼도 그린경제와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무역체계에 논의의 초점을 두고 있지만, 효과성 창출과 제고가 관건이다. 유럽연합(EU)은 올 10월부터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를 적용하고, 다른 각국도 2030 탄소중립(net-zero) 정책을 시행하고 있음에 비해 WTO의 환경상품협정은 2016년 합의에 실패한 이후 논의가 중단된 상태다.
WTO의 본질적 기능이 구조적으로 부진하더라도 다자주의 통상체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특히 무역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로서는 통상 울타리의 확장이 긴요하다. 지속 가능한 통상체제를 정립하고 상호 호혜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개별 이해득실의 완충장치가 필요하다. 집단이익을 최대화한 후 공평하게 분배할 수 있는 조정장치도 필요하다. 양자적 통상관계에서는 이러한 리스크 조정장치를 각각 구체화해야 한다. 다자적 통상체제에서는 하나의 게임 룰로 여러 팀이 여러 게임을 진행할 수 있으므로 공정한 게임 룰 정립의 공통 기반을 확보하기에 유리하다. 물론 의사결정의 비효율성을 최소화하는 방안은 필요하다.
미·중 패권경쟁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 국제정치 진영으로 분절화되고 갈등 구도로 심화되는 것은 다자주의 통상체제가 작동하지 못한 영향도 크다. 미국과 중국이 절대적 강대국이지만 EU를 포함한 다수의 제3 세력이 관찰자와 심판자 역할을 수행한다면 적어도 비협조적 죄수의 딜레마는 회피할 수 있을 것이다.
재세계화를 위한 다자주의 통상체제의 역할은 다차원적으로 모색할 수 있다. 먼저, 감염병 팬데믹, 기후변화와 자연재해, 전쟁이나 약탈적 생존권 억압, 글로벌 금융 또는 재정 위기 등 글로벌 위기에 대한 탄력적이고 유연한 대응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생산요소와 원자재, 중간재가 다층적 공급망을 통해 투입되는 글로벌 생산구조에서는 일시적 불균형이나 작은 위기가 장기적 불균형이나 큰 위기로 증폭될 소지가 있다. 따라서 통상 파트너 간 협조적 관계를 강화하는 역할이 필요하다. 이러한 다자적 협조 관계는 핵심 원자재와 중간재 수급 원활화에 초점을 두고 강화하는 것이 실효적이다. 경제안보를 포괄하는 무역 보호주의는 실제로 핵심 원자재와 중간재의 수급 상태와 직결된다. 또한 다자주의 통상체제는 소수의 강대국이 아닌 다수의 약중소국들의 연계성을 배가하는 역할을 강화할 수 있다.
재세계화는 약화되지 않고 강화될 것이다. 엄밀하게 보면, 경제안보와 자국 우선주의 자체가 탈세계화는 아니다. 미국 중심의 글로벌 공급망 재편은 중국 첨단산업에 대한 견제와 중국 우위의 공급망 리스크를 완화하자는 것이지 탈세계화는 아니다. 우리나라로서는 단기적 실효성이 약하지만, 다자주의 통상구도의 회복은 적극 환영할 만하고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나라의 통상강국 행로가 GATT-WTO 체제에서 1단계 발판을 내디뎠고 다발적 FTA 체제에서 2단계 도약을 했다면, 이제 포스트 FTA로서 메가FTA와 재세계화의 업그레이드된 다자체제에서 3단계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
WTO는 지난 6월 16일 체제 개혁을 위한 비공식 회의를 개최했다. WTO의 혁신 과제는 상소 기능의 회복과 일부 제도 개선만이 아니다. 미·중 갈등을 초월해 회원국의 다차원적인 통상 이슈를 순발력 있게 다루어야 하고 이를 위한 의사결정 구조를 개혁해야 한다. 글로벌 통상환경의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제도적 포용성과 역동성, 유연성을 강화해야 한다. 리더십의 강화는 핵심 과제다. 개별 회원국뿐만 아니라 EU를 비롯한 거대 경제공동체에 대한 통상 이슈의 주도권을 발휘할 역량을 갖춰야 한다.
우리나라는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등 지역주의뿐만 아니라 WTO의 개혁 과정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해 재세계화의 방향성을 설정해 나아가야 한다. 수산보조금을 포함한 포괄적인 보조금 이슈, 디지털통상 규범, 무역과 투자의 연계성 원활화, 무역과 개발협력 이슈 등 구체적인 사안들에 대해서도 주도적인 참여 역할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미·중 갈등을 우회해 EU와 통상 협력의 파트너십을 강화함으로써 다자주의체제 회복에 기여하는 방안도 모색해야 한다. 최근 2, 3년간 EU는 미국 못지않게 통상 이슈 대응력을 강화해왔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