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촨성 청두에서 출토된 한나라 화 상전 탁본. 소금정제 과정을 묘사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열전’에 젊어서부터 포숙과 장사를 한 것으로 그려지는 제나라의 관중은 재상에 오른 뒤에도 상공업 발전을 장려했다. 일반적으로 통치자들은 사람이나 건물, 가축 등 눈에 보이는 유형물에 세금을 부과하는 손쉬운 방법을 선호한다. 하지만 관중은 달랐다. 관중은 세금을 상품값에 포함시키는 간접세 징수 방식을 택했다. 조세 문제에 있어선 상층을 부유하게 하는 동시에 하층민을 만족케 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기름진 농토에 대해선 세금의 10분의 3을 면제해줬고, 아주 메마른 척박한 밭을 경작하는 농부에겐 세금을 공제했다. 그는 상인을 제나라로 끌어들이는 방법도 고민했다. 이를 위해 30리마다 상인을 접대하는 객잔을 설치했다. 그런 뒤 그곳에 오는 마차 한 대에는 식사를 제공하고, 두 대가 같이 오면 말의 사료도 대줬다. 세 대가 함께 오면 하인의 식사까지 내놓았다. 상인들이란 이익이 있다면 어디든지 가기 때문에 소비가 있으면 상인이 움직일 것이란 논리였다. 하지만 이 같은 관중의 처방은 중국 사상사에선 비주류 중의 비주류였다. 유학이 지배이념으로 자리 잡은 이후에는 더욱 그랬다.
시장과 국가의 대립이 가장 표면화되는 경우는 세금징수와 관련한 것이었다. 국민으로부터 가장 적은 저항을 받으며 가장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것은 역대 왕조가 바라던 바였다. 국가 재원 마련과 관련해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인물은 한나라 때의 재상 상홍양(桑弘羊)이다. BC 110년 한나라 무제는 낙양 상인 집안 출신인 상홍양을 발탁해 국가 재정을 맡겼다. 상홍양은 소금과 철을 국가에서 독점하는 ‘염철전매(鹽鐵專賣)’와 유통구조 개선 등을 통해 국고를 늘리는 정책을 시행했다. 하지만 세상사 모든 것이 계획대로만 되지는 않는 법. 태행산 동부 지역에서 대형 물난리가 나면서 70여 만 명의 농민이 땅을 잃고 떠도는 사태가 발생했다. 상홍양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자산이 많은 사람에게서 일종의 재산세인 ‘산민전(算緡錢)’을 거뒀다.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부자세’였는데 자산가들은 재산을 은닉하고 신고하지 않았다. 그러자 조정은 자산을 은닉한 사람은 일 년 동안 변방에 보내고, 신고에서 누락된 민전을 모두 몰수했다.
이 같은 정책은 세수가 느는 효과는 있었지만 돈을 버는 대로 바로바로 써버리는 소비 행태의 부작용을 낳았다. 특히 “백성들은 소비에 치중해 저축하거나 투자하지 않았다”는 <사기>의 사평은 후대에 두고두고 상홍양의 정책에 꼬리표로 따라다녔다. ‘부자세’ 도입으로도 국가의 재정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상홍양은 소금과 철에 이어 술을 국가에서 독점키로 했다. 술의 원료를 포함해 생산에서부터 제조, 유통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국가가 관리키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과도한 세원 확대 정책은 “국가가 생활필수품을 매개로 백성과 이익을 다투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는 동중서(董仲舒)를 비롯한 유학자들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했다. 새로운 조세제도 도입 시 고려했던 효과와 달리, 실물경제의 왜곡과 비효율도 계속되면서 상홍양의 처지도 어려워졌다. 이후 한무제마저 죽어버리자 강력한 바람막이 지지 세력을 잃은 상홍양의 입지는 빠르게 축소됐다. 결국 상홍양은 BC 80년 75세 나이로 모반죄에 몰려 멸족을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증세에는 강한 저항이 필연적으로 따른다. 이런 교훈은 증세역사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산민전
돈이 많은 상인과 수공업자, 고리대금업자 등에게 자발적으로 자산을 신고하게 해서 2민(緡, 1민은 1,000錢)당 10%, 규모가 작은 상인에겐 5%의 세금을 징수했다.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부자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