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신흥기술(Critical & Emerging Technologies, CET)’은 국가의 경제발전과 안보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중요한 전략기술을 의미한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핵심·신흥기술은 기업들의 투자와 개발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국가가 통제·보호해야 하는 대상이 되고 있다. 지난 4월 27일, 백악관은 주요 기술품목의 표준 수립에 초점을 둔 ‘핵심·신흥기술에 관한 국가표준전략(National Standards Strategy for Critical and Emerging Technology)’을 발표했다. 위 전략은 미래 국가안보에서 중요한 8가지 핵심·신흥기술에 적용할 표준을 개발함으로써 미국의 국가경쟁력을 강화하고 자국 연구환경의 지속적인 혁신을 창출하기 위한 세부 목표와 방안들을 포함하고 있다. △투자(Investment) △참여(Participation) △인력(Workforce) △공정성과 포용성(Integrity & Inclusivity) 등 4대 목표와 이를 달성하기 위한 다수의 실천방안(투명성, 개방성, 공정성, 합의, 효율성, 관련성, 일관성, 광범위한 참여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내용을 좀 더 살펴보면, 미국 내 기술·산업 부문 이해관계자들 간 상호운용성 보장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음이 드러난다. 보고서에는 ‘뜻을 같이하는 국가들’의 광범위한 참여를 유도하고, 포용적 성장과 공정한 절차에 기반한 국제 표준시스템을 구축한다는 접근 방향을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미래 성장동력과 밀접한 주요 기술 분야에서 거세게 추격 중인 중국을 견제하는 한편, 동맹이나 우호국들과 협력해 표준수립 단계에서부터 미국의 리더십을 확고히 하려는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중점적으로 표준개발을 추진할 8대 핵심·신흥기술 분야는 ①통신 및 네트워킹 기술 ②반도체 및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기술 ③인공지능 및 머신러닝 기술 ④생명공학 기술 ⑤위치·항법·시각 기술 ⑥디지털 인증 인프라 및 분산원장 기술 ⑦청정에너지 발전 및 저장 기술 ⑧양자정보기술이다. 이는 대부분 지난 4월 한·미 정상회담 공동선언문에서 양국이 전략적으로 육성하기로 한 분야이기도 하다.
그동안 미국은 기술표준을 설정하는 데 있어서 국가가 적극적인 역할을 맡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공급망 문제와 경제안보 이슈가 부각되면서 기술 개발과 육성에도 국가가 전략적으로 개입하는 경향이 매우 높아졌다. 실제로 핵심·신흥기술 분야의 표준 선점은 경쟁국에 대한 우위 확보와 견제 수단이자 통상 갈등의 핵심 쟁점이 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안보전략과 국익의 관점에서 국제표준이 갖는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미국은 ‘Global Rule Maker 리더십’(2020. 3) 및 ‘공급망 행정명령 14017호’(2021. 2)를 통해 국제표준 선점을 글로벌 패권 유지를 위한 혁신의 원동력으로 명시한 바 있다.
특히 관련 기술의 발전 경로에 영향을 미치는 핵심·신흥기술 분야에서 우위 확보는 가장 먼저 달성해야 하는 근본적 수단이라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 같은 기조를 계승해 발표된 이번 국가표준전략은 향후 미·중 전략경쟁의 범위가 특정 기술품목에서 연구개발 생태계 전반으로 확장될 것임을 시사한다.
이 같은 미국의 견제에 맞서 중국 역시 글로벌 5G 통신시장에서의 성공을 시작으로 국제표준 선점에 국가적 역량을 기울이는 중이다. 특히 과거에는 막대한 크기의 내수시장을 통해 생산규모로 접근했다면, 최근에는 향상된 기술력과 표준특허 등 지식재산권을 바탕으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전략으로 전환하고 있다. 나아가 ‘디지털 일대일로 정상포럼’(2017.2), ‘차세대 기술에 관한 중국표준 2035’(2021.4), ‘국가 표준화 발전 개요’(2021.10) 등 이른바 ‘표준 굴기’로 볼 수 있는 시도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약 10년 전 중국이 ‘제조 2025’를 통해 글로벌 재화생산 패권을 지향했다면, ‘표준 2035’는 재화가 생산되고 거래되는 규칙과 시스템의 통제권에 초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중국의 표준 굴기 시도를 고려한다면, 향후 미국이 핵심·신흥기술 표준전략을 통해 자국 기술생태계의 역량을 강화하는 한편, 동맹과의 경제적·기술적 공조를 바탕으로 표준 패권을 보다 공고히 하려 할 것임을 예측할 수 있다. 이를 위한 첫 번째 실천이 바로 민간에서 국가 차원으로의 표준체계 전환인 것이다. 이번 표준전략은 국가안보와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 영향을 미치는 또 하나의 ‘선제적인 규칙 제정’으로서, 지난해 천문학적 자금을 투입한 ‘반도체와 과학법(CHIPS & Science Act, CSA)’이나 ‘인플레이션 감축법(Inflation Reduction Act, IRA)’ 등 그간 미국이 추진해왔던 주요 쟁점 법안들과도 밀접히 연결된다.
미국의 핵심·신흥기술 표준전략은 중국과의 공급망 디커플링에 이어 국제표준 디커플링이라는 새로운 국면으로서의 의미도 갖고 있다. 미국이 국제표준의 진영화를 본격화할 경우, 경제 블록화를 넘어 기술·지식 블록화 또한 가속화될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특히 우호국가들과 표준전략을 함께 추진하겠다고 밝힘에 따라, 다자안보 대화체를 통해서도 협력 논의가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 과정에서 미국 표준에 대한 동참을 한국과 같은 동맹국에 가장 먼저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로서는 본격적인 시행에 따른 파급력과 기민한 대응전략이 시급한 상황인 것이다. 국제표준이 경제안보적 문제이자 지정학적 리스크로 간주될 수밖에 없는 현재, 표준개발 논의에 선제적으로 참여한 국가는 자국에 보다 유리한 규칙을 조성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반대의 경우라면 막대한 학습비용과 전환비용을 감수할 수도 있다. 이러한 도전과 기회의 양면성은 한국에 의미하는 바가 크다.
따라서 첫째, 디지털 기술 강국이자 책임 있는 중견국으로서 한국의 역량을 반영할 수 있도록 표준 의제의 범위와 세부 논의에 적극 참여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향후 유럽연합(EU), 일본 등 주요 국가들과 파급력이 높은 기술 분야를 중심으로 공동의 표준화 수립을 위한 세부 의제 마련에도 착수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표준전략이 미국 자국 내 차원을 넘어 국제표준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참여국들의 신뢰와 자발적 의지를 충족하는 공동의 이익과도 부합해야 함을 설득해야 한다. 미국은 지난해부터 반도체와 과학법, 인플레이션 감축법 등을 통해 국내외 기업의 리쇼어링을 유도한 결과, 약 300조 원이 넘는 투자액을 유치한 것으로 조사됐다. 양대 제조업 육성법을 시행한 지 약 1년 만에 세계의 자금과 일자리가 집중되고 있다는 의미다. 이번 표준전략의 발표가 여기에 참여하는 모든 국가에게 도움이 될 출발점이 돼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표준을 제정하는 리더십은 기술역량뿐만 아니라 결국 보편적인 지지를 받는 정당성이 확보돼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8대 핵심·신흥기술 분야 중 우리 주력산업과 밀접한 기술 분야를 중심으로 미국과 좀 더 긴밀한 협력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대표적으로 반도체의 경우, 한국은 연구개발(R&D) 역량, 기업의 시장 지배력에 비해 국제표준 리더십이 부족한 상황이다. 반대로 미국은 국제표준을 주도하고 있으나 관련 대학, 기업, 연구소 등의 참여가 미진한 편이다. 반도체 분야에서의 한·미 표준개발 협력은 규칙 제정의 리더십과 기술생태계 강화를 필요로 하는 양국의 목표와 상호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생명공학기술 분야 역시 미국과의 전략적 협력이 필요한 분야다. 샘플의 수집, 저장·보관, 활용을 포함하는 바이오 소재 및 데이터 분야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여전히 공고하며 오히려 확대되고 있다. 따라서 미국과 향후 바이오 뱅킹이나 소재의 연구·산업적 활용을 위한 기반을 공고히 할 필요가 있다.
최근 본격적으로 세계시장에 진출 중인 우리의 방산기술 역시 인공지능·데이터 등을 중심으로 미국과의 표준개발 협력이 필요한 분야다. 최근 미국 국방부는 무인체계 표준화를 준비하면서 자율 무인기 분야의 기술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군사동맹이자 무기체계의 상당부분을 공유하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세부 표준화 규격을 준수하는 개발과 함께 민·군 표준화 논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셋째, 지난 4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한·미 차세대 핵심·신흥기술 대화’ 채널을 양국의 표준협력의 실효적 협의체로 발전시키는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 당시 양국은 군사협력뿐만 아니라 핵심·신흥기술 분야의 협력도 강화하며, 이를 토대로 군사동맹을 넘어 기술동맹으로서의 지평을 확장해나간다는 의지를 표명한 바 있다. 안보적 가치뿐만 아니라 글로벌 성장잠재력이 풍부한 핵심·신흥기술 분야에서의 표준협력은 군사·경제·기술 안보의 전방위적 도전에 대처하는 포괄적 전략 동맹으로서 한·미 파트너십을 한층 격상시킬 수 있는 기제가 될 것이다.
반도체와 과학법(Chips & Science Act of 2022)
미국 내 반도체 생태계 활성화와 생산·제조 기반 확립을 위해 2022년 8월 9일 발효된 법이다. 총 2,800억 달러(366조 원)를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설립하거나 반도체 관련 생태계에 투자하는 기업에 지원한다. 단, 보조금 수혜 시 미정부에 필요한 기업정보 제공, 초과이익 환수, 중국 내 공장 증설·업그레이드 제한 등의 가드레일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
인플레이션 감축법(Inflation Reduction Act of 2022)
기후변화 대응, 의료비 지원, 법인세 인상 등이 핵심 내용이 다. 급등한 인플레이션 완화를 위해 물가안정과 에너지 비용 경감을 통해 가계 지출을 줄이는 한편, 친환경 부문에서는 일자리를 창출하고 소득증대를 촉진하고자 2022년 8월 16일 발효된 법이다. 주요 보조금 지급 조건으로 중국 등 우려국가의 배터리 부품과 광물을 일정률 이하로 사용하고 북미산을 사용하도록 규정함으로써, 역내 생태계 강화 및 중국에 대한 배제 효과를 포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