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무역협정(FTA)은 세계무역기구(WTO)보다 더 깊은 자유화(WTO보다 관세 인하 및 비관세장벽 제거, 미양허 서비스 분야 개방)와 더 넓은 자유화(투자, 환경, 전자상거래, 상호 인정 등 새로운 분야의 규범과 개방)를 다룬다. 기업에는 우리가 경쟁국보다 먼저 FTA를 체결한 국가에서 관세 인하만큼의 경쟁력을 제고할 수 있다는 점이 현실적으로 가장 큰 장점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그 과실을 따는 것은 쉽지 않다. FTA 체결국 간 무역 확대라는 대의를 위해 협상 과정에서 각자 희생도 감내했는데, 제삼국이 그 혜택을 손쉽게 가져가게 하는 것은 막아야 했다. 또한 비록 FTA를 체결해도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문턱은 필요했다. 그 장치가 바로 원산지 기준이다. FTA 협상의 꽃이 양허(관세 인하나 서비스 분야 개방 같은 시장 개방)인 것은 맞지만, 원산지 기준과 관련 규범을 다룬 원산지 규정은 각자의 산업 지형을 반영한 치열한 혈투의 결과라 볼 수 있다.
기업 입장에서 원산지 기준이 너무 엄격하면 FTA 효과를 실감하기 어렵다. 특히 자원 빈국인 우리 여건에서 원료부터 완성품까지 국내에서만 제조된 100% 한국산 제품은 드물다. 정부도 이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최대한 적절한 수준에서 원산지 기준을 도입하려고 협상에 공을 들인다. 또 다른 문제는 FTA 체결이 늘어나고 수입국의 관세가 낮아지는 것은 반가운 일이나 동일 제품에 대해 협정마다 다른 원산지 규정이 도입될 경우 기업의 부담은 커질 수 있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역내포괄적동반자협정(RCEP)1)은 2022년 발효됐다. RCEP 당사국 중 일본을 제외한 13개 나라와 우리는 이미 양자 FTA가 발효돼 있다. 그렇기에 RCEP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이도 있지만, 기업 입장에서 본다면 반전 스토리가 나온다. 바로 원산지 기준과 관련 규정 덕분이다.
RCEP에 참여하고 있는 국가 간에는 가치 사슬이 형성돼 있는 제품이 많아 중간재와 원·부자재 무역이 많이 이뤄지고 있는데, RCEP 15개국의 중간재가 사용된 제품은 그 가치가 누적되거나 공정을 충족시킴으로써 시장 개방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이 ‘다국누적’ 원산지 활용 전략이야말로 RCEP의 최대 효과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품목별 원산지 기준으로는 제품 가치의 일정 수준 이상 역내에서 생산될 것을 요구하는 부가가치 기준이나, 주요 공정이 역내에서 이뤄질 것을 요구하는 세번 변경2) 기준이 사용된다. 각각의 기준으로 다국누적 원산지 활용 전략을 살펴보자.
자동차 부품 중 하나인 클러치가 미국, 영국, 일본, 중국 등의 원재료가 사용돼 한국에서 제조되는 상황이다. 이 제품을 베트남으로 수출하기 위해서는 기존에 체결된 한·베트남 FTA나 한·아세안 FTA를 사용하고자 할 수 있다. 그런데 원재료 생산국이 FTA 비당사국이어서 해당 FTA가 요구하는 4단위 세번변경이 발생하지 않거나, 한국에서 제조될 때만으로는 부가가치 기준(역외산을 제외한 부가가치가 40% 이상일 것)을 충족하지 못해 해당 FTA의 혜택을 받을 수 없다. RCEP를 활용할 경우 비당사국인 미국, 영국산 재료만 제외하면 되며, 동 역외산 재료는 한국에서 제조될 때 4단위 세번변경이 발생하고, 역외산을 제외한 한국, 일본, 중국산 재료의 부가가치가 기준을 초과해 RCEP의 특혜관세 적용을 받을 수 있다.
현재 RCEP 당사국들은 개별적으로 체결한 협정(한·베트남 FTA, 한중 FTA 등 기체결한 또는 향후 체결할 양자 FTA) 적용 물품도 RCEP 활용 시 누적 기준을 허용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이미 우리 정부는 RCEP 활용 지원을 위해 개별 협정적용 원재료도 RCEP 누적을 허용하고 있다. 다만 RCEP의 품목별 원산지 기준(PSR)이 기존 개별 협정의 기준보다 같거나 완화됐을 경우에만 누적 적용을 인정하고 있음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RCEP의 원산지 다국누적 허용으로 세번변경이 발생하지 않는 원재료나 부가가치 기준 활용 분야가 유리해질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중간 부품 수가 많아 부가가치 기준을 활용하는 기계, 전자, 운송 장비 등의 업종에서 이 방식의 활용을 적극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밖에 이미 양자 FTA를 체결했더라도 원산지 증명 방식이 기관 발급제인 FTA에 비해 RCEP는 인증 수출자 자율 증명 방식을 도입하고 있어, 원산지 증명 발급에 소요되는 행정적, 비용적 부담이 경감됐다.
1) 역내포괄적동반자협정(RCEP·Regional Comprehensive Economic Partnership)
아세안 10개국과 한·중·일 3개국, 호주·뉴질랜드 총 15개국 간의 관세장벽 철폐를 목표로 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자유무역협정(FTA). 전체 경제 규모가 세계 GDP와 교역 규모의 약 30%에 달한다. 인구 규모로는 23억 명을 아우른다. 기존 FTA는 일대일 양자 협정인 데 반해, RCEP는 여러 나라가 참여하는 다자무역협정으로 영향 평가 대상이 광범위하고 양허안과 협정문 분량도 방대하다. 주요 협정 내용은 자동차, 철강 등 상품과 콘텐츠 등 서비스 시장 추가 개방, 일본과 신규 FTA 등이다.
2) 세번변경(CTH·Change in Tariff Heading)
세번이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물품 분류 기호를 말한다. 세번변경이란 원산지 규정 적용에 사용되는 원칙으로서 외국에서 생산된 원료로 국내에서 생산된 품목이 국내에서 실질적으로 상이한 제품으로 만들어져 세번이 변경된 경우 국산 제품으로 간주하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