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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환기 진입한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한국·대만 반도체 클러스터 확장 경쟁…전략적 협력 가능성 주목

글로벌 반도체 생산 리더인 한국과 대만이 반도체 클러스터 확장에 속도를 내고 있다. 미국, 유럽, 일본 등 전통적인 반도체 생산 강호들이 경쟁적으로 클러스터 확충에 나서자 한국과 대만도 지도자까지 나서 생산 기술 우위를 굳히기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미국 싱크탱크 국제문제연구센터(CSIS)는 2023년 10월 발표한 ‘반도체 제조 리쇼어링에 있어서 산업 클러스터의 역할’이란 보고서를 통해 한국과 대만의 반도체 클러스터는 2·3·5㎚급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는 세계 일류급의 노하우를 가졌으며, 미국, 유럽, 일본 등에서는 같은 수준의 지식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1월 15일 윤석열 대통령은 민생 토론회에 참석, “세계 최대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를 조성하고 있다”며 “앞으로 20년에 걸쳐 최소한 양질의 일자리 300만 개가 새로 생길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1월 15일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성균관대에서 열린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세 번째, 민생을 살찌우는 반도체 산업’에 참여한 윤석열 대통령. 대통령실

2047년까지 622조 투입, 세계 최대 메가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윤 대통령이 발표한 반도체 클러스터 전략에 따라 2047년까지 경기 남부에 622조원을 투입한 세계 최대 규모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가 들어선다. 경기 평택·화성·용인·이천·안성·판교·수원을 잇는 반도체 클러스터로 반도체 공장 13곳, 연구시설 3곳을 신설해 총 37곳에 이르는 반도체 공장·시설 집적 단지를 구축한다는 전략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여의도 다섯 배 크기에 달하는 2102만㎡(약 636만 평) 부지에 622조원을 투자해 반도체 공장과 연구 시설을 세운다.

삼성전자는 용인 남사 지역에 360조원을 들여 반도체 공장 6곳을 짓고, 평택에도 120조원을 투입해 반도체 공장 3곳을 증설한다. 애초 삼성전자는 300조원을 들여 5개 라인을 건설하기로 했던 용인 남사 파운드리 공장에 60조원을 더 투입해 1개 라인을 확대하기로 했다. 대만 TSMC의 파운드리 사업을 추격하기 위해 투자 규모를 늘린 것이다. SK하이닉스는 용인 원삼에 메모리 반도체 공장 4곳을 신설한다.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는 2027년 공장 3곳과 연구 시설 2곳이 완공되는 것을 시작으로 2030년이면 웨이퍼 기준 월 770만 장을 생산하게 된다. 경기도 남부 같은 수도권 과밀 지역에서 중앙 정부 차원의 지원을 강화하는 국가 산업단지를 조성하는 건 처음이다.

정부는 인프라 확대와 세제 혜택, 인력 양성 등으로 민간 투자를 뒷받침한다. 윤 대통령은 올해로 만료되는 반도체 투자 세액 공제를 연장할 뜻을 분명히 했다. 윤 대통령은 “세액 공제로 반도체 기업에 투자가 확대되면 관련 생태계 전체 기업의 수익과 일자리가 늘어나고 국가 세수도 늘어난다”고 설명했다.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서는 국가 간의 연대가 매우 중요하다고도 언급했다. 윤 대통령은 “반도체가 외교고 외교가 반도체가 되는 것”이라며 미국, 일본, 네덜란드와의 반도체 협력을 강조했다. 현재 미국 주도로 한국, 일본, 대만으로 구성된 칩4 동맹이 추진되고 있다.

자료_산업통상자원부·과학기술정보통신부

대만 반도체 성장 핵심은 40년 축적 클러스터


윤 대통령의 반도체 클러스터 확충 계획 언급 이틀 전인 1월 13일 대만 대선에서 총통으로 선택된 라이칭더(賴淸德) 민진당 후보는 당선 일성으로 “대만에 (반도체) 종합 클러스터가 구축되게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라이칭더는 대만 남부 도시 타이난의 시장 시절 세계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위탁 생산) 업체 TSMC가 3㎚(나노미터) 팹 장소를 찾을 때 부지와 전력, 용수 등 인프라 문제 해결을 약속하며 공장 유치에 성공했다. 타이난은 20여 개의 반도체 기업들이 몰렸고, 북부의 신주과학산업단지(HSP)에 이어 제2의 대만 반도체 클러스터가 됐다. 라이칭더의 일성은 그 성공의 DNA를 확산시키겠다는 선언이다.

대만의 반도체 클러스터는 성공 모델로 통한다. 최시영 삼성전자 사장은 2023년 1월 한국공학한림원이 개최한 ‘대한민국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진단과 혁신’ 포럼에 참석해 “대만 반도체 성장의 핵심은 1980년대부터 40년간 국가 주도로 과학 단지를 통해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를 만든 것에서 기인한다”며 “한국도 대만을 벤치마킹해 반도체 클러스터를 만들어 투자를 유치하고 동반 성장을 도모할 지원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글로벌 시장조사 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2023년 3분기 전 세계 파운드리 시장에서 TSMC는 57.9%를 차지한 반면 2위인 삼성전자의 점유율은 12.4%에 그쳤다. 45.5%의 격차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 배경에 반도체 클러스터가 있는 것이다. 대만 반도체 클러스터는 △정부 정책 △정부 출연연구기관인 대만 공업기술연구원(ITRI) 및 인근 대학과 기업 간의 산학연 시스템 △반도체 업종의 높은 보수에 따른 인재 쏠림 △중소 고객까지 챙 기는 생태계 중심의 동반 성장 등이 성공 요인으로꼽힌다.

대만 정부는 미국의 실리콘밸리를 모델로 1980년 수도 타이베이 인근 신주(新竹)에 과학산업단지를 조성했다. 신주과학산업단지의 핵심 산업은 반도체로, 약 200개의 반도체 관련 기업이 밀집한 클러스터로 발전했다. 이후 1999년 타이난과 가오슝에 남부과학단지, 2004년 타이중, 허우리, 후웨이 등에 중부과학단지를 조성했다. 남부와 중부단지에는 각각 반도체 관련 기업들이 약 20개, 약 10개 진출했다. 이들 3개의 클러스터가 대만의 실리콘 아일랜드 프로젝트를 받치는 핵심이다. 대만은 이미 2030년까지 남부 가오슝에 반도체 소재 클러스터를 조성하는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대만 정부는 단지 조성을 하면서 입주 기업에 세제 혜택, 보조금, 연구개발비 지원뿐 아니라 전력과 용수 등 인프라 문제 해결사 역할을 했다. 총통부터 각 부처 장관, 지자체장까지 ‘원팀’을 꾸려 기업의 애로 사항을 미리 파악해 대응한다. 하지만 대만 정부가 단지를 조성하고 혜택만 준다고 성공적인 반도체 클러스터가 형성됐던 건 아니다. 대만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벤치마킹해 1973년 만든 ITRI의 역할이 적지 않다는 분석이다. ITRI는 대만의 경제구조를 노동 집약에서 기술 집약으로 전환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을 듣는다. 특히 ITRI에서 스핀오프(분리)된 기업들이 신주 반도체 클러스터 군단을 형성했다. 3대 ITRI 원장인 모리스 창이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한 사업모델 아이디어를 내달라는 정부의 주문에 위탁 생산만 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제안해 만든 기업이 TSMC다. TSMC 창업 당시인 1980년대 후반만 해도 반도체 기업은 설계와 생산을 한 회사가 다 수행하는 ‘종합 반도체 기업(IDM)’ 모델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창 회장은 30년간 미국 반도체 업체에서 근무하면서, 라인 하나 짓는 데 수조원을 쏟아부어야 하는 투자 부담 때문에 세계 반도체 업계가 설계 전문과 생산 전문으로 나뉠 것으로 내다봤다. 대만 2위 파운드리 업체인 UMC도 ITRI 연구진의 기술을 사업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대만 반도체 성장의 핵심은 1980년대부터
40년간 국가 주도로 과학 단지를 통해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를 만든 것에서 기인한다.
-최시영 삼성전자 사장

※ 2021년 팹리스 기업 매출 기준. 자료_스태티스타

대만 반도체 성장 핵심은 40년 축적 클러스터


인재 공급이 원활한 것도 신주 클러스터의 성장을 견인했다. 신주에 위치한 대만 이공계 명문대인 국립칭화대와 국립자오퉁대가 기술 인재 공급 역할을 한 것이다. 특히 대만 정부가 수도권과 가까운 신주를 과학 단지로 선택해 교육·생활환경을 중시하는 젊은 인재들을 유치하는 데 어려움이 적었다. 남은영 동국대 글로벌무역학과 교수는 “대만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높지만, 급여 수준은 상대적으로 낮아 제조업이 발달할 수 있는 여건인데, 특히 반도체 업종의 급여가 가장 높아 인재가 몰린 게 클러스터가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고 분석했다. 실제 2023년 대만 인력학원이 발표한 기업 연봉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평균 연봉이 69만4000대만달러(약 2만2300달러)로 8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었지만 1인당 GDP 3만 5000달러에 크게 못 미친다. 특히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따르면 2021년 기준 한국의 평균 연봉은 4만4800달러에 달했다. 대만의 연봉이 한국의 절반 수준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반도체는 대만에서 연봉이 가장 높은 업종에 속한다. 평균 연봉이 102만2000대만달러(약 3만2800달러)로 8년 연속 1위를 유지했다. 특히 반도체 업종에서도 반도체 설계 엔지니어의 연봉이 136만1000대만달러(약 4만3700달러)로 ‘연봉 킹’에 올랐다.

남 교수는 “대만 반도체 클러스터의 핵심 역할을 하는 TSMC의 비즈니스 모델도 클러스터 생태계 발전에 기여했다”며 “중소 고객까지 받아들인 점이 삼성과 차별화되는 지점”이라고 설명했다.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는 모토를 내건 TSMC는 중소 팹리스 업체까지 고객으로 확보하면서 동반 성장하는 모델을 택했다. 세계 최대 AI 반도체 업체 엔비디아 역시 사업 초기 TSMC 덕에 성장할 수 있었다. 팹리스와 파운드리가 선순환하는 클러스터가 형성된 것이다. 실제 대만은 전 세계 팹리스(반도체 설계) 점유율도 21%로 미국(68%)에 이어 2위를 유지하고 있다.

라이칭더 총통 당선인은 대선 하루 전인 1월 12일 “대만과 한국은 민주·자유·인권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며 “내가 (총통에) 당선되면 한국과의 관계를 강화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 “관광 교류, 경제·무역 분야에서 한국과 협력 확대하고, 기후변화에 공동 대응하겠다”면서 “신공급망 형성을 위한 안보 대화를 열고, 인도·태평양 보호를 위해 협력하려고 한다”고 했다.

권석준 성균관대 화학공학부·반도체융합공학과 교수는 “삼성전자와 TSMC는 직접적인 경쟁 관계이므로 협력 가능성이 작아 보이지만, 기술적⋅물리적 한계를 공통적으로 눈앞에 두고 있는 반도체 산업은 공통의 난제 앞에서 언제든 협력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어 권 교수는 “대만 정부가 조속히 한국과 일본에 외교 특사를 보내, 첨단반도체 산업에서 동아시아 3국의 전략적 협력을 통한 공통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s는 협의체 구성에 적 극적으로 참여할 의향이 있음을 명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만과 한국의 반도체 클러스터가 경쟁하면서도 협력 관계로도 발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라이칭더 대만 총통 당선인이 1월 13일 선거 승리 후 연설하고 있다. 로이터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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