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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그림으로 보는 세계화의 역사
대공황기를 넘어 탄소중립시대의 아우토반
독일의 아우토반(Autobahn) 건설은 대공황에 대처하기 위해 대규모 재정이 투입된 사회기반시설(SOC) 건설의 대표적인 사례로 여겨졌다. 속도 무제한의 고속도로 아우토반은 그 자체로 오랫동안 독일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당대에 독일 내외에서 ‘경제 기적(Wirtschaftswunder, 일명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아우토반을 둘러싼 이 같은 이미지는 대부분 허구의 ‘신화’에 기초했다.
김동욱 한국경제신문 중기과학부 부장

독일 남부 브라운스바흐 근처의 코체르(Kocher) 계곡을 횡단하는 비아두트(고가도로) 아우토반 주변의 풍경을 담은 우표(1936.9.21.)

현재도 독일 안팎에서는 “히틀러가 나쁜 짓을 많이 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아우토반을 건설했어”라든가, “히틀러가 아우토반을 건설해 경제대공황을 극복했다”는 식의 표현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하지만 아우토반 건설은 히틀러의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그들은 바이마르공화국 정부의 책상 서랍 속에 있던 고속도로 건설 구상을 가져다 쓴 것에 불과했다. 독일에서 순수하게 자동차 전용도로로 가장 먼저 구상되고 건설된 것은 1913년 완공돼 1921년 확장된 베를린의 ‘자동차 교통 및 연습도로(Automobil-Verkehrs-und Übungs-Straße)’였다. 약칭 ‘아부스(AVUS)’로 불리던 이 도로는 나치의 집권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최초의 실질적인 자동차 전용도로가 계획되고, 건설되기 시작한 것은 나치 집권 1년 전인 1932년의 일이었다.
하지만 1933년 집권한 나치 정권은 이를 자신들의 업적으로 가로챘다. 나치는 아우토반을 ‘히틀러 도로(die Straßen Adolf Hitlers)’, ‘총통의 길(Straßen des Führers)’로 부르고, 히틀러가 실업을 없앴다는 선전전을 폈다.
실제로 나치의 손아귀에 들어온 아우토반 건설계획은 급물살을 탔다. 상징적으로 히틀러가 첫 삽을 뜨고, 연설을 한 뒤 노동자들이 흙을 퍼 나르며 도로 건설에 들어가는 식의 세리머니가 연출됐다. 1934년에는 독일 전역 22개 지역에서 고속도로 건설이 시작됐다. 1932년 말 1933년 초 불과 몇 km에 불과하던 아우토반의 총연장은 1935~1936년 108km로 대폭 늘어났다. 그리고 1937년에는 1,087km, 1938년에는 3,046km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획됐던 6,900km 구간 중 3,800km 구간이 완성됐다. 1938년 시점에 나치 지도부는 아우토반의 총연장을 1만km까지 늘릴 계획을 수립했다.

13만 명만 아우토반 건설에 참여

아우토반은 도시들을 연결해 나치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는 데는 효과가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군사적으로는 큰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독일의 저명한 현대사학자 볼프강 벤츠도 “아우토반의 군사적 유용성은 한계가 있었으며 실제 군대와 군수품의 운송에는 철도가 주로 이용됐다”고 평가했다. 무엇보다 대규모 건설 사업에도 불구하고 아우토반이 독일의 실업문제 해결에는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평이 대부분이다. 당시 실업자 규모가 600만 명에 달했으나 아우토반 건설에 참여한 노동자는 13만 명에 불과했으니 실업자 규모를 줄이는 데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 실업문제 해소에 결정적이었던 것은 아우토반 건설이라기보다는 독일의 재무장 조치가 끼친 효과가 컸다. 고용증대를 위한 각종 ‘편법’도 동원됐다. 눈에 보이는 통계상 성과를 높이기 위해 기계의 사용을 가능한 한 억제했다. 1933년부터 1934년 사이 건설과 관개사업은 원칙적으로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이뤄져야 했다. 눈에 보이는 실업은 크게 줄었지만 내실은 통계만큼 화려하지 않았던 이유다.
그러나 아우토반을 기반으로 독일이 경제부흥을 이뤄냈다는 점에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동서남북으로 거미줄 같은 대도시는 물론 지방 중소도시에 이르는 길목까지 연결해 독일의 산업경쟁력을 유지하는 데 막대한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후위기에 직면한 지금, 아우토반은 새로운 비판을 받고 있다. 아우토반이 대부분의 구간에서 속도제한이 없다는 점에서 비롯된 비판이다. 유럽 사회로부터 독일의 아우토반이 뿜어내는 배기가스 감축 압력을 거세게 받고 있는 것이다. 길이도 1만3,000km에 이르러 도로가 차지하는 면적이 상당히 넓다. 독일을 일으킨 것으로 평가되는 ‘속도 무제한’이 자동차 고속 질주를 부추기고 거기서 내뿜어져 나오는 환경오염 및 기후온난화의 배기가스 문제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으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아우토반(Autobahn)
독일의 자동차 전용 고속도로. 독일 주요도시를 경유해 인근 9개국 고속도로망과 연결되는 아우토반의 총 길이는약 1만3,000km. 그중 실제로 법규상 속도 제한이 없는 구간은 약 70.4%다. 최근 독일 내에선 기후변화와 에너지 위기 대응을 위해 아우토반에 속도 제한 규정을 적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독일의 뢴(Rhön)산맥을 지나는 아우토반 주변의 풍경을 담은 우표(1977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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