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혁기 연구위원
디지털통상 협정은 몇 개 나라가 참여하고 있는가에 따라 다자협정, 복수국 간 협정, 양자협정 등으로 구분된다. 또 디지털통상만을 대상으로 하는 디지털통상 협정과 기존 통상협정 내에 디지털 분야를 독립된 장으로 포함시키거나 부속서 형태로 추가하는 방식으로 디지털 분야를 현실화하는 방안이 있다.
우선, 다자협정은 기존 세계무역기구(WTO) 내에서 이루어지는 통상협정으로 2019년 80여 개국이 참여해 협상 중인 ‘전자상거래 협상(Joint Statement Initiative on e-commerce, JSI)’이 있고, 복수국 간 협정으로는 싱가포르·칠레·뉴질랜드가 타결한 DEPA가 대표적이다. 다만, 일반적 통상협정 내에 디지털 부문을 확대 강화한 협정들로 CPTPP (2018), 미국·멕시코·캐나다협정(USMCA) 등이 있으며, 전통적 통상협정은 아니지만, IPEF 역시 여기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양자 간 협정은 최근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협정이다. 우리나라 역시 2022년에 한·싱 디지털동반자협정(KSDPA)을 체결했으며, 많은 국가가 디지털 양자협정을 추진하고 있다.
강하연 실장
무엇보다 초국가적 성격을 띠고 있는 디지털통상의 특징을 제고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일반적인 상품 무역처럼 특정 국가 간 거래로만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통상이 양자 간 협정보다는 다자간 협정이 더 유의미하며, 디지털통상 규범이 WTO와 같은 다자적 틀에서 다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한 이유다.
강하연 실장
2021년 1월에 발효된 DEPA는 CPTPP 회원국인 싱가포르·칠레·뉴질랜드 간 디지털통상 규범 확립 및 협력 강화를 위해 체결한 세계 최초의 복수국 간 디지털통상 협정이다. DEPA는 CPTPP 전자상거래 챕터의 규범 수준을 반영했다. 특히 전자무역 확산, 안정적 데이터 비즈니스 환경 조성을 위한 회원국 간 규범 및 협력을 규정하는 등 다양한 조항이 포함돼 있어 글로벌 디지털 협력 프레임워크로 발전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민혁기 연구위원
조금 덧붙이자면 DEPA는 총 16개 모듈(module)로 구성돼 있다. 여기에는 데이터의 자유로운 이동을 포함해 디지털통상 및 비즈니스 활성화와 소비자 보호 증진, 새로운 기술 분야에서의 협력 등이 포함돼 있다. 그리고 최근 이루어지고 있는 디지털통상 협정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디지털통상 자유화에 관한 내용으로 국가 간 데이터 이동 자유화, 컴퓨터 설비 현지화 금지 등이 여기 해당된다. 두 번째는 디지털통상 신뢰 제고와 관련된 내용으로 개인정보보호, 사이버보안 및 협력, 스팸메일 규제 등이 포함된다. 마지막으로 디지털통상 원활화와 관련해 전자서명, 전자결제, 종이 없는 무역 등이 논의되고 있다. DEPA뿐 아니라 최근 타결됐거나 추진되고 있는 디지털통상 협정은 이러한 내용들을 국가 간 입장에 따라 그 수준을 조절하는 형태로 협상이 이뤄지고 있다.
강하연 실장
앞서 이야기했지만, DEPA는 상당히 선진적 규범으로 이루어진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USMCA나 CPTPP에서 처음 대두된 컴퓨터 설비, 데이터의 국경 간 이동 조항뿐 아니라 물류, 전자 송장, 전자결제, 디지털 신원, 핀테크 협력, 중소기업 협력, 안전한 온라인 환경, 이해관계자 참여 보장 등 혁신적 디지털 생태계 조성을 목표로 하는 협력 규범이 다수 존재한다. 물론 언급한 일부 조항들은 구속력이 없어 실효성에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각자의 디지털 경제 현황과 당면 과제가 상이한 국가들끼리 무엇인가 구속력이 있는 규범을 만든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디지털의 초국가적 성격을 감안해 건강하고 혁신적인 글로벌 생태계 조성이라는 국가 간 공동의 목표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한·싱 DPA 또한 DEPA와 거의 유사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공지능 협력, 특송(express shipments) 등 양국 간 관심사가 반영된 내용이 확인돼 흥미롭다.
민혁기 연구위원
차별점은 먼저 복수국 간 협정으로 보다 많은 국가가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가입협상을 마무리한 우리나라 이외에도 중국, 캐나다, 코스타리카, 페루 등이 가입 의향서를 공식적으로 DEPA 측에 제출한 상황이다. 또, DEPA가 기존 FTA에 종속되지 않은 독립협정이라는 점도 큰 의의가 있다. 이는 우리나라가 향후 DEPA에 가입하는 국가들과 DEPA 규정 협정 내용에 따라 디지털 분야에서 무역 및 기업 활동이 가능해진다는 걸 의미한다. 특히 DEPA 가입국이 아시아, 중남미, 대양주 국가를 포괄하고 있어 현재 가입을 추진 중인 국가들까지 고려한다면 과거 FTA가 우리나라 무역확대에 기여한 것처럼 DEPA 역시 우리나라 디지털 분야 수출 및 해외진출 확장에 물꼬를 틀 것으로 기대된다.
강하연 실장
개인정보를 포함한 국경 간 데이터 이전의 문제가 핵심 쟁점인 이유는 각국의 입장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은 국경 간 정보의 자유로운 이전을 보장하고, 데이터의 국외 이전에 대한 제한조치를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국제협상에 임하고 있지만 유럽연합(EU)은 상대국이 ‘적정한 보호 수준’을 갖추지 못한 경우 개인정보의 국경 간 이전은 금지된다. 중국은 개인정보를 포함한 데이터를 국가안보 자산으로 간주해 국외 이전을 강력히 제한한다. 호주의 경우 의료정보 등 특정 분야 데이터의 국외 이전을 엄격히 규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캐나다는 공공분야 데이터 및 문화산업 콘텐츠에 대한 건전성 규제를 적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여국의 데이터 규제 수준이 상이한 점을 감안, DEPA 데이터의 국경 간 이전 조항은 엄격한 데이터 국외 이전 보장 의무를 부여하는 USMCA나 미·일 디지털통상협정(USJDTA)과 비교 시 데이터 규제와 관련한 정부의 정당한 정책 개입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규제 당국의 입장에서 보면, 정책적 정당성만 확보된다면 데이터의 국외 이전을 무조건적으로 보장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 보니 규범의 실효성에 대한 우려도 존재하는데, 데이터의 국외 이전 조항이 DEPA뿐만 아니라 RCEP, CPTPP와 같은 지역무역협정에서도 비중 있게 다루어진 만큼 지역 및 글로벌 디지털 경제 생태계 구축에 매우 중요한 규범이라 하겠다.
민혁기 연구위원
디지털통상의 확대에 따라 데이터의 국경 간 이동은 필연적인 절차로 논의되고 있다. 다만, 그 과정에서 개별 국가의 데이터 이전과 관련한 규제 권한을 어느 정도까지 인정할 것인가, 그리고 자국 내 핵심적 데이터를 보호하기 위한 제한조치의 도입 가능 여부가 중점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RCEP은 각국이 국경 간 데이터 이전을 금지하지 않을 의무를 규정하고 있으며, CPTPP와 DEPA는 국경 간 이전을 허용할 의무로, 그리고 USMCA와 USJDTA 등은 국경 간 이전의 금지 및 제한을 하지 않을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즉 의무사항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USMCA와 USJDTA가 금지뿐 아니라 제한조치까지 하지 못하도록 하는 가장 강력한 규정이다. 반면 DEPA의 경우 허용 의무만을 포함하고 있어 개별 국가의 개입 여지가 USMCA와 USJDTA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많다. 또, 데이터 이전 금지나 제한조치의 예외를 위해 DEPA는 정당한 공공정책 목표달성을 위해 요구되는 이상의 제한을 가하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USMCA와 USJDTA는 추가적으로 필요성 테스트(necessity test)를 부과함으로써 개별 국가 및 정부의 개입 가능성을 축소시키고 있어 이 역시 앞에서 보았던 의무사항과 유사하다. DEPA는 데이터 이전과 관련해 개별국이 규제권을 가지고 있다.
강하연 실장
우리나라가 글로벌 디지털 규범 확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의지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글로벌 디지털 경제 주도권을 갖기 위해 우리가 충분히 경제적·물리적 전제조건을 갖추고 있는가다. 우리나라의 디지털 경제 글로벌화는 비전과 전략이 관건이 될 것이다. 디지털 기술이 진화하고 있고 디지털 기반 혁신이 빠르게 진행되면서 각 산업은 물론 국민에 이르기까지 영향이 상당할 것으로 예상되므로, 비전의 발현에 있어 관련 제도와 정책이 정비돼 있는지 살펴볼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특히 K미디어 등 한국이 디지털 역량의 글로벌 확산을 추진하겠다는 의지가 있지만, 국내 디지털 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구체적인 정책이나 담론은 아직 갑론을박 중이다. 플랫폼 규제 논의가 그중 한 사례다.
민혁기 연구위원
2000년대 우리나라는 FTA를 선제적으로 체결함으로써 해당 국가 내에서 수출 확대 및 시장점유율 확보 등을 추진할 수 있었다. 이른바 FTA 확대 전략이다. DEPA 선제적 가입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하면 될 것이다. 특히 디지털 분야는 전통적으로 상품과 서비스 무역에 비해 시장 지배자의 우월적 지위가 한층 강력하다. 대부분의 이익을 시장 지배자가 가져갈 수밖에 없고, 새롭게 시장에 진입하고자 하는 기업이나 서비스의 경우 시장에서 우월적 지위를 가진 기업에 의존하는 방식을 취하는 사례가 더욱 많다. 예를 들어, 특정 표준이 해당 시장 내에서 적용되고 있다면 후발 참여자들이나 시장 내 위치한 사업자들은 해당 표준에 따라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게 된다. 이처럼 디지털통상에서 시장을 선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나라가 DEPA에 선제적으로 가입했다는 것은 DEPA 가입국과의 협력을 통한 시장 접근이 가능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향후 DEPA 가입국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우리의 입지를 빠르게 구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글로벌 차원에서 다양하게 추진되고 있는 디지털 협정 논의과정에서 DEPA 가입국들과의 공조를 통해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협상을 추진할 동력도 확보한 셈이다. 실제 DEPA 체결 당시 싱가포르, 칠레, 뉴질랜드는 WTO 전자상거래 협상을 보완한다는 내용을 표명했다.
민혁기 연구위원
DEPA 가입은 국내 제도, 기술, 산업, 고용 등 우리 경제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칠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구체적인 영향력을 전망하긴 어렵다. 협정을 통해 전반적인 측면에서 기업이 시장진출이나 투자 등에 대한 명확한 방향성을 가질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중요한 진전이라고 할 수 있지만, 개별적인 산업에서 실질적인 수출 혹은 진출이 가능할 수 있을지 여부는 실제 사업을 통해서만 확인이 가능할 것이다. 다만, DEPA 타결은 디지털통상과 관련해 참여국 간 협력을 위한 큰 틀의 플랫폼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별 산업별로 어떤 혜택이 발생할 수 있는가는 실질적 사업을 통해 확인하면서 기업 활동을 저해할 수 있는 세부적인 법률이나 규제 등을 지속적으로 축소해나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DEPA 가입을 통해 우리나라와 DEPA 회원국 간에는 협력을 위한 충분한 모멘텀이 형성됐다. 특히 DEPA의 ‘모듈 8’에서 새로운 기술을 포함해 트렌드를 반영하는 협력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 국내 해당 산업에서의 경쟁력 확보와 시장진출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