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사회에서는 오랫동안 ‘무역과 인권’에 대해 논의를 해왔다. 인권은 세계무역기구(WTO)의 중요 의제이기도 했다. 유엔인권기구는 무역에 대한 인권 규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해왔다. 무역은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돼 빈곤을 없애고 인권을 증진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인권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WTO가 발표한 보고서 <무역과 인권의 결혼: 편의적 결혼인가? 영원한 결합인가?>에 따르면, 무역과 인권의 결합은 현대적으로 들리지만 실은 오래전부터 존재했다고 설명한다. 고대 무역은 약탈을 병행했기 때문에 약탈을 방지하는 장치가 필요했고, 근대에 와서는 노예무역을 금지하는 국제협약이 체결됐다.
다국적 기업이 국제거래를 하면서 인권은 더 자주 문제가 됐다. 어린 아동들의 노동으로 제품이 생산됐으며 강제노동으로 원료가 채굴되기도 했다. 또한 숱한 산업재해로 인한 근로자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상품이 수출되면서 무역으로 이윤을 얻기 위해 인권을 침해하는 일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논의가 일어났다. 그러나 WTO 차원에서 통상 인권규범을 만드는 것은 쉽지 않았다. 다양한 국가의 이해상충으로 논의만 무성하고 결실은 보지 못했다. 그러자 선진국들은 양자협정인 자유무역협정(FTA)에 인권 의제를 포함시켰다. 나아가 개별 국가에서 인권을 통상장벽으로 제도화하기 시작했다.
2017년 프랑스를 시작으로 독일, 노르웨이 등 유럽 국가들이 실사의무화법을 만들고 있다. 2022년에는 유럽연합(EU) 차원의 법규도 마련됐다. EU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지침(CSDDD)’이 바로 그것이다. 일본도 2022년 “책임 있는 공급망 인권존중 지침(안)”을 만들어 규범화 작업을 시작했다.
프랑스 실사법에서는 시민단체들이 인권실사를 하지 않는 기업에게 이를 요구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럼에도 기업이 인권실사를 하지 않을 경우 법원에 이행명령을 구할 수 있다. 노르웨이는 공급망 실사의 범위를 1차로 한정하지 않고 모든 공급망에 적용했다. 아울러 이해관계자들의 정보청구권을 인정했다. 독일과 유럽은 인권실사뿐 아니라 환경실사를 함께 하도록 해 실사의 범위를 확장했다. 일본은 법무성이 아닌 경제산업성이 주도해 인권실사를 추동하고 있다.
분쟁광물, 아동노동, 강제노동에 초점을 맞춰서 규제하는 나라도 많아졌다. 미국의 도드-프랭크법과 위구르강제노동방지법, EU 분쟁광물 규정, 네덜란드 아동노동실사법 등이 그것이다. 이처럼 유럽에서 시작된 인권실사 의무화의 물결은 전 세계, 다양한 분야로 확산되고 있다. 무엇보다 EU의 지속가능성 실사법률이 2024년부터 시행되면 EU에서 활동하거나 EU 지역과 거래하는 한국 기업들도 인권실사를 해야 한다.
인권실사를 조사(investigation)나 감사(audit)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 그 이유는 ‘실사’라는 번역에 기인한다. 그런데 인권실사는 ‘Human Rights Due Diligence’를 번역한 말이고, ‘Due Diligence’는 직역하면 ‘적절한 성실성’이다. 일반적인 사람(선량한 관리자)이라면 기울일 정도의 주의를 말한다. 기업이 인권을 존중하기 위해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를 다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인권실사다.
인권실사는 일반적인 사람(선량한 관리자) 이라면 기울일 정도의 주의를 말한다.
기업이 인권을 존중하기 위해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를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외국에서 시작된 의무화의 물결은 글로벌 공급망을 통해 우리 기업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글로벌 기업들은 인권실사를 자신의 공급망에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실사를 거부할 수 없고, 실사 결과 인권위험이 있다고 판단되면 거래 중단도 이어진다. 국제거래를 하는 기업이라면 인권실사를 반드시 해야 하는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일본, 인도, 태국 등 아시아의 나라들도 국가적 차원에서 기업이 인권을 보장하는 체계를 강화하고 이를 홍보하고 있다. 그 이유는 자국이 인권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한국 기업들도 인권경영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속가능경영 보고서에 대부분 인권 항목을 포함시키고 있다. 그러나 인권을 내재화한 기업은 많지 않다. 인권부서를 두고 있는 회사는 드물다. 인권전문가를 영입해 인권업무를 담당하게 하는 회사는 거의 없다. 인권실사는 아직 남의 나라 이야기다. 인권영향평가도 마찬가지다. 영향평가를 하더라도 아동노동, 강제노동, 결사의 자유 등 중요사항만 체크리스트로 확인하는 수준이다. 인권의 관점에서 공급망을 선택하고, 관리하고, 지원하는 경우도 많지 않다. 인권경영보고서를 내는 회사는 한두 곳에 불과하다. 사회공헌활동은 많지만 지역사회의 인권문제를 해결하려는 참여나 기부는 거의 찾기 어렵다.
기업은 사람으로 구성되고 사람을 대상으로 비즈니스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존엄하고, 사람의 권리는 무엇보다 존중돼야 한다. 사람을 존중하는 기업엔 사람이 몰리고 로열티를 가지게 된다. 사람을 무시하고 소홀히 하는 기업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근로자도 떠나고 소비자도 외면한다. 인권은 이제 통상문제가 되고, 투자자 및 소비자의 최우선 관심사가 되고 있다. 치열하게 인권을 고민하고, 진심으로 인권문제에 접근하는 기업이 많아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