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담 무아테시에 (Madame Moitessier),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 (Jean-Auguste-Dominique Ingres, 1780~1867) 作, 1856년
여기 19세기 중반에 그려진 한 여인의 초상화가 있다. 초상화 속 여인은 어깨가 드러나고 허리가 잘록한 로맨틱 스타일 드레스를 입고 있다. 드레스의 꽃무늬와 술 장식과 리본이 화사하기 그지없다. 그녀의 한쪽 팔에는 석류석과 오팔이 박힌 팔찌가, 다른 팔에는 다이아몬드와 자수정이 박힌 팔찌가 반짝거린다. 이들 보석과 드레스는 그 촉감이 느껴질 정도로 사실적으로 정밀하게 그려져 있다. 반면에 여인의 얼굴과 팔은 살아 숨 쉬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설화석고(alabaster) 조각상처럼 묘사돼 있다. 티 하나 없이 매끈하고 환한 피부, 둥글고 커다란 검은 눈, 게다가 얼굴에 손을 살짝 갖다 댄 독특한 자세가 고대 그리스/로마 조각 같은 느낌을 더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 1780~1867). 고대 그리스/로마 미학과 그것을 이어받은 르네상스 고전주의자들에게서 깊은 영감을 받아 그가 살던 19세기에 재탄생시킨 신고전주의(Neoclassicism) 화가다.
프랑스에서 가장 잘나가는 화가 중 하나였다. 그런 앵그르에게 초상화를 그리게 한 여인은 어떤 신분이었을까? 몸에 걸친 드레스와 보석뿐만 아니라 앉아 있는 공단 소파며 뒤에 있는 중국산 도자기를 보면 부유한 사람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공작부인이나 남작부인? 아니, 이 그림의 주인공인 마담 무아테시에(Madame Moitessier)는 공무원의 딸이었으며, 은행가이자 레이스 거래업자인 무아테시에의 부인이었다. 귀족이 아닌 부르주아 계급인 것이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봉건적 신분 체제인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이 무너진 후, 혁명을 주도한 시민계급, 즉 부르주아지가 정치뿐만 아니라 문화의 주요 세력으로 떠오르게 됐다. 그 변화가 마담 무아테시에의 초상화에 나타난 것이다. 물론 19세기 이전에도 부유한 상인 등 성공한 평민 계급이 유명한 화가에게 자신과 가족의 초상화를 주문하곤 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귀족 작위를 받거나 사들이기 전에는 귀족처럼 화려한 모습으로 초상화에 그려지기 힘들었다. 그러나 대혁명 이후의 프랑스나 산업혁명 와중의 영국 등에서는 ‘사장님의 사모님’이 후작부인 못지않게 화려한 모습으로 초상화에 등장한 것이다. 이런 모습이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면 특별할 것도 없지만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국왕 또는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계급구조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인식에서 벗어나 천부(天賦)의 권리를 지닌 독립된 시민으로서, 자신의 몸과 정신과 운명의 주인이라는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듯 앵그르의 초상화들은 부르주아지가 정치·경제·문화의 중심 세력으로 떠올랐다는 것과 개인이 독립된 주체로서 중요해졌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또 하나 드러나는 것이 바로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에 대한 열광이다. 마담 무아테시에의 독특한 포즈도, 마담 르블랑이 걸친 엠파이어 드레스도 모두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대혁명을 성취한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을 고대 민주주의를 꽃피운 그리스 시민들과 동일시했다. 그런데 마담 무아테시에의 초상화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얼마 안 가서 19세기 중반에는 엠파이어 드레스 대신 다시 치마폭이 넓어진 로맨틱 스타일 드레스가 유행하게 된다. 이것은 시민계급이 부를 축적한 기득권 세력이 되어가는 시점과 묘하게 맞물린다. 사치스러운 마담 무아테시에의 모습은 이제 완전히 기득권층으로 자리 잡은 부르주아지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셈이다.
부르주아지는 프랑스에선 정치혁명을, 영국에선 산업혁명을 주도하면서 낡은 신분제도의 구속에 항거해 개인의 자유와 기본 인권, 민주주의를 최초로 폭넓게 전파했다. 그들은 또한 경제적 자유방임주의를 지지했는데, 이것 역시 전제군주와 결탁한 지주나 특혜 상공인들의 폭리에 항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점차 기득권 계층이 돼 나중에는 노동자들을 억누르는 존재가 된다.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
프랑스 대혁명 발생 전까지 200년간 지속된 절대주의 시대.
앙시앵 레짐은 ‘낡은 체제’를 뜻하는 말이었으나 프랑스 대혁명 이후 ‘구체제’라는 의미로 굳어졌다.
나폴레옹의 누이동생 엘리자의 비서였던 르블랑 부부 초상화
(앵그르 作, 18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