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자유무역을 한다면 세계경제 전체의 생산량을 극대화할 수 있고, 모든 국가가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자유무역으로 국내에서 부족한 원자재를 해외에서 원활하게 조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값싼 상품이 수입되면 국내 기업들 역시 더 싸고 좋은 제품을 만들어 경쟁력을 높일 테니 국내 소비자의 선택권도 넓어지는 것이죠. 이에 반해 자국 우선주의 통상정책은 자국의 국익을 위해 국가가 나서 무역에 간섭하는 것을 뜻합니다. 수입품의 관세를 큰 폭으로 올려 자국 기업 상품의 경쟁력을 인위적으로 높이는 게 대표적입니다. 최근에는 자국 산업의 육성을 위해 자국 기업이나 자국에서 생산된 제품에만 보조금을 주는 방식으로 우선주의를 펼치는 국가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주로 선진국이 주도하고 있는데, 미국의 대표적인 자국 우선주의 통상정책으로는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반도체와 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이 있습니다. IRA는 사실상 미국 내 또는 북미 지역에서 제조된 전기차에 대해서만 정부 보조금과 세액공제의 혜택을 제공하겠다고 하는 법입니다. 또 반도체와 과학법의 경우 반도체 기업이 미국 내에 투자했을 때 반도체 생산 보조금과 연구개발(R&D) 지원금을 지원하는 법안입니다. 유럽연합(EU)도 비슷한 법안을 잇달아 제정하고 있습니다.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는 2026년부터 ‘탄소 관세’를 부과하는 등의 방식으로 청정기술 산업을 육성하겠다는 게 골자라서 탄소배출량이 많은 국가의 기업들에겐 불리합니다. 역외보조금규정(FSR)도 지난 7월부터 본격 시행했습니다. EU 역외 기업이 정부 및 공공기관으로부터 과도한 보조금을 받고 EU 내 기업 인수합병이나 공공입찰에 참여하는 것을 ‘불공정 경쟁’으로 간주, 이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는 게 주 내용이죠.
신흥국들이 자유무역으로 급속하게 성장해 선진국을 위협한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중국이 대규모의 보조금으로 자국 반도체산업을 육성하자 미국은 반도체와 과학법을 통해 중국 기업의 성장을 견제하기 시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코로나19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는 자국 우선주의 통상정책에 불을 붙였습니다. 질병이나 전쟁으로 인해 전 세계 교역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하자 각국이 필요한 물자를 스스로 조달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즉 신흥국의 성장을 막겠다는 정치적 판단에 코로나19나 러·우 사태 등이 더해지면서 각국은 공급망을 재편하고 자국 우선주의 통상정책을 더 강화하는 모양새입니다.
자국 우선주의 통상정책은 주로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게 부상하고 있는 나라, 즉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이러한 조치들이 한국 기업에도 적잖이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IRA의 경우에도 북미에서 제조하거나 조립한 배터리 부품을 50% 이상 사용하고, 배터리에 들어가는 핵심광물의 40% 이상을 미국이나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국가에서 채굴하거나 가공해야 보조금을 받을 수 있게 했죠. 규정대로라면 한국 전기차는 대부분 혜택을 받지 못할 상황이었으나 정부가 나서면서 리스 판매 전기차는 해당 요건을 충족하지 않아도 세액공제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협상을 이끌어냄으로써 국내 기업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했습니다. 실제 이후 한국 완성차 업체들은 역대 최대 판매량을 꾸준히 경신하고 있습니다. 한편 미국의 반도체와 과학법 역시 중국으로의 반도체 장비 수출을 통제한다고 해 한국 반도체 회사들에게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공장이 중국에 있는데, 이곳으로 반도체 장비를 못 들이면 공장 업그레이드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역시 수출통제 유예 등 다양한 방안에 대해 양국 간 대화가 진행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