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적 자율성이란 지정학적 고려가 필요한 문제에서 강대국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선택을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 용어는 주로 외교·안보 분야에서 사용됐다. 2010년을 전후해 유럽을 둘러싼 대외환경의 변화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전략적 자율성의 개념은 안보 분야에서만 사용됐지만, 2017년부터는 점차 산업, 무역, 디지털, 에너지, 기후변화 등 다양한 정책 영역으로 확산됐다. 산업정책 분야에서 그 빈도가 크게 증가했다. 그 배경으로는 미국과 유럽 관계가 더 이상 단선적 협력관계가 아니라는 점, 중국의 부상이 갖고 있는 기회와 위기요인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미·중 패권경쟁 속에서 전략적 자율성은 유럽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기본원칙으로 자리 잡았다.
유럽연합(EU)은 통상정책에서는 ‘개방’을 추가해 ‘개방형 전략적 자율성’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개방형 전략적 자율성은 다자주의에 기반을 둔 자유무역 기조를 유지하되, 국가 간 지정학적 갈등 속에서 핵심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대처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EU는 강점을 갖고 있는 사회적 규제(기후·환경·인권)를 통상정책과 기업의 공급망에 적용하는 방식으로 비가격적/비기술적 우위를 확보하고자 했다. 또한 유럽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다양한 조치를 도입하면서, 통상정책에 방어적인 동시에 전략적 요소를 도입했다. 이와 같은 EU의 정책은 자국의 시장규모를 활용해 통상정책에서 영향력을 확보하는 기존 방식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EU의 통상규제는 규범을 확산시키는 것을 넘어 공세적인 측면도 있다.
최근 EU의 규제로는 역외보조금 규정, 통상위협 대응조치, 전기차 배터리, 반도체 등의 산업지원정책, 핵심원자재법 등이 있다. 역외보조금 규정은 다른 국가의 보조금이 EU 역내에서 시장왜곡 현상을 초래한다고 판단될 경우 규제하는 제도다. 역외국 보조금을 받은 기업이 EU 기업을 인수하거나 공공조달 입찰에 참여하는 경우에 사전보고 신고 대상이 된다. EU 집행위원회는 EU 내 기업 인수합병(M&A), 공공조달에 참여하는 역외보조금 수혜기업에 대해 보조금 적정성 조사를 할 수 있고, 불법이 확인되면 M&A 불허, 조달산업의 참여 제한 등 제재를 부과할 수 있다.
통상위협 대응조치는 외국 정부가 경제적 압박을 통해 EU와 회원국의 정책 결정을 방해할 경우 무역 및 투자제한 조치를 실시하는 것이다. ‘경제적 압박(economic coercion)’이란 제3국이 EU의 무역이나 투자에 영향을 미치는 조치를 적용하거나 적용하겠다고 압박함으로써 EU 및 회원국의 정책 결정에 개입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프랑스의 디지털세 도입에 대한 미국의 관세부과 조치, 인도네시아의 팜오일 규제 관련 유럽산 제품 수입금지 조치 등이 거론된다. 경제적 압박의 정의가 추상적임을 감안하면 자의적 해석과 적용의 우려가 있다. EU는 반덤핑, 상계관세 등 역외국의 불공정 무역관행에 대해 다양한 대응조치를 마련해왔으나 경제적 압박 관련 대응은 이번 입법안이 최초다.
또 다른 움직임은 보조금을 통한 산업정책의 등장이다. EU는 경쟁왜곡을 이유로 산업보조금 지원을 엄격하게 제한해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공공이익사업(IPCEI)이라는 제도를 통해 회원국의 산업보조금 지급을 허용하기 시작했다.1)
그 대상은 전기차 배터리, 반도체, 수소에너지 등 EU의 그린딜과 디지털 전환 계획과 관련된 분야다. 배터리 분야에서는 2019년 7개 회원국, 17개 기업이 참여하는 대형 프로젝트를 허용했고, 전 가치사슬에 대한 생산시설 구축을 서두르고 있다. 이미 EU는 내연기관 신차 판매의 금지 시점을 2035년으로 확정했고, 일부 국가는 선제적인 조치를 도입했다. 따라서 전기차 배터리 수요는 큰 폭으로 증가할 수밖에 없다. 지난 7월 EU는 배터리 여권과 공급망 실사 등 새로운 요소를 갖춘 배터리 규정을 입법완료했다.
미국이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으로 배터리 생산의 미국 국내화를 도모한다면 EU는 EU 규범 준수를 조건으로 부과함으로써 공급망을 통제하고자 한다. 반도체 분야에서도 공세적인 투자가 진행 중이다. EU는 현 10% 수준인 반도체 시장 점유율을 2030년까지 20%로 확대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이에 지난 2월 유럽반도체법(European Chips Act)을 발의했고, 향후 2~3년간 민관 합동으로 1,450억 유로를 투자하는 계획을 갖고 있다. 미국의 정책과 마찬가지로 EU의 정책도 기업들의 역내 투자를 유도하고 있다.
EU는 2023년 3월 핵심원자재법(Critical Raw Material Act, CRMA) 초안을 발표했다. 이 법안은 핵심원자재의 공급망 강화 외에도 EU가 추구하는 순환경제 등 지속가능성을 고려한 것이 특징이다. 희토류 등 핵심원자재에 있어 유럽의 대중국 의존도가 높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에 EU는 공급망 다원화를 꾀하고 있다. 이 법의 특징은 2030년에 달성할 수량적 목표를 설정했다는 점이다. 우선 연간 소비량의 10% 이상을 EU 역내에서 추출하고, 소비량의 40% 이상은 역내에서 가공해야 한다.
또한 소비량의 15%를 재활용해야 한다. 전략원자재별 단일 수입원(제3국)의 비중은 65% 이하로 낮춰야 한다. 이 법은 EU의 그린딜과 디지털 전환을 지원하기 위한 것으로 배터리 규정, 공급망 실사 등 다양한 정책과 정교하게 얽혀 있다.
EU의 산업·통상정책은 특유의 규범적 성향이 있다. 가령 배터리, 반도체, 핵심원자재 분야에서 강점이 있는 기후변화·환경 분야의 규제 능력과 노하우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다. 시장규모와 규제를 활용, 자국 내에 전 가치사슬에 걸친 생태계 조성을 도모하는 식이다. 이를 통해 아시아 기업에게 뒤처진 기술력과 가격경쟁력을 극복하고자 한다. 최근 EU의 규제는 점차 명확한 전략적 성향을 보인다. 노동, 환경 등 사회적 분야의 규제에 더해 전략적 성격을 띤 EU의 규제는 한국 기업에게 새로운 부담이다. 특히 중국과 밀접한 공급망을 형성한 국내 기업들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다양한 분야에서 등장한 EU의 규제는 기업의 공급망 관리에 추가적인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반면에 선제적인 투자와 적응을 통해 새로운 기회로 활용할 수도 있다. EU의 규제는 미리 적응한 유럽 기업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규제로 인해 새롭게 형성되는 시장을 활용할 필요도 있다.
한편 배터리, 반도체, 원자재 관련 EU의 공급망 정책은 닫힌 구조로 운영되지 않기 때문에 다양한 형태의 국제협력을 통해 한국 기업이 참여할 수 있는 소지가 크다. 가령 유럽배터리연합(EBA)에는 이미 한국 기업들이 참여하며, 중국 기업조차 현지 법인을 통해 참여 중이다. 다만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공정경쟁 이슈를 부각시키는 EU의 통상정책에 타깃이 되지 않도록 유의가 필요하다. 정부 입장에서는 비전통 통상규범에 관한 국제적 논의 동향을 파악하고, 국내 통상규범에 반영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또한 자유무역협정(FTA)에 기초를 둔 전통적인 통상정책 외에 민주주의, 인권 등을 전면에 내세운 공공외교를 통상정책에 활용할 수 있다. 기업 차원에서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에 대한 제반여건과 현황을 재점검하고, 기업의 사회적책임(CSR) 역량을 강화함으로써 기업 이미지 제고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