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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의 양면성을 고려한
복합적 세계질서로의 가능성
최근 자국 우선주의의 확산으로 글로벌 산업 지형이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미국, 유럽연합(EU), 일본 등 주요국은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등 자국의 첨단산업 육성을 위한 법령 마련에 속도를 내고 있는데 이러한 자국 우선주의 통상조치는 국내 산업 및 통상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과 EU를 중심으로 국제사회의 자국 우선주의 통상조치 동향을 짚어보고 이로 인한 국제사회의 변화와 국내 주요 산업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살펴본다.
이승주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

글로벌 금융위기가 자국 우선주의를 촉발한 방아쇠였다면, 미·중 전략경쟁은 자국 우선주의를 더욱 확산시킨 화약고였다. 코로나19는 통상과 산업에서 패러다임의 이동을 촉발했다. 세계 주요국들이 효율성을 최우선순위에 놓았던 ‘just-in-time’ 패러다임에서 탈피하고, 공급망 교란과 같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just-in-case’ 패러다임을 적극 수용하는 변화가 발생한 것이다. 주요국 정부들은 통상정책을 경제 및 안보와 연계하는 주요 수단으로 인식하고, 취약성 완화에 초점을 맞춘 산업정책과의 결합을 시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 개별 분야의 복수국가 간 협정과 기존 통상 협상과 차별화된 새로운 협상 방식을 추구하는 지역 다자간 협정이다.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가 새로운 유형으로서 주목받는 것은 이슈의 포괄성뿐 아니라, 이익의 교환이라는 협상 방식 면에서도 전통적인 통상 협상과 차별적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세계는 ‘복합적 세계질서’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다. 복합성에는 불확실성이 도사리고 있는 만큼, 단선적인 전략보다는 통상의 양면성을 체계적으로 고려한 ‘복합전략’이 요구된다.

초불확실성 시대와 자국 우선주의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근간을 위협하는 변화가 잇달아 발생하면서 21세기 세계는 초불확실성 시대로 진입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자국 우선주의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위기의 범위가 전 지구적이었던 만큼, 세계 통상 환경에 미치는 영향 역시 전대미문이라고 할 수준이었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충격이 과거와 다른 것은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수호하는 데 앞장섰던 미국과 서구 선진국들이 위기대응 협력을 주도하던 과거의 역할을 포기하고, 자국의 이익을 우선 추구하는 성향을 드러냈다는 데 있다. 그 결과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무역의 성장률이 정체하고, 특히 경제통합을 이끌었던 글로벌 가치사슬(Global Value Chain, GVC)에 기반한 무역 역시 정체기에 진입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자국 우선주의의 신호탄이었다면 미·중 전략경쟁은 자국 우선주의를 더욱 확산시킨 화약고였다. 2017년 4월 트럼프 행정부가 무역확장법(Trade Expansion Act of 1962) 232조1) 에 근거해 중국산 알루미늄과 철강에 대한 조사를 함으로써 시작된 미·중 무역전쟁은 확전에 확전을 거듭했다. 2018년 1월 3.1%에 불과하던 중국산 제품에 대한 평균 관세율이 2021년 1월 19.3%까지 치솟았다. 관세 부과 대상이 되는 품목의 비중도 무려 66.4%에 달했다.
2020년 12월 말 발생한 코로나19의 세계적 확산은 미·중 전략경쟁과 결합돼 자국 우선주의의 확산을 부채질했다. 코로나19가 확산되는 과정에서 주요국들은 공급망 교란을 직접 경험하게 됐고, 무역에서 시작된 미·중 전략경쟁은 기술과 산업으로 무대를 확장하면서 세계질서의 불확실성을 높였다.

1) 무역확장법(Trade Expansion Act of 1962) 232조
무역확장법 232조는 미국이 자국의 통상안보를 해친다고 판단한 수입품에 대해 수입량 제한, 고율 관세 부과 등을 취할 수 있도록 규정한 법이다.
2018년 3월 무역확장법 232조에 의거, 철강과 알루미늄에 대한 관세를 부과해 주요국과의 통상마찰을 촉발했다.

통상정책과 산업정책의 결합

코로나19는 통상과 산업에서 패러다임의 이동을 촉발했다. 세계 주요국들이 효율성을 최우선순위에 놓았던 ‘just-in-time’ 패러다임에서 탈피하고, 공급망 교란과 같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just-in-case’ 패러다임을 적극 수용하는 변화가 발생한 것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핵심은 취약성의 완화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코로나19의 세계적 확산 과정에서 발생한 공급망 교란은 공급망의 구조적 취약성을 드러냈다. 더 나아가 미중 전략경쟁은 공급망 내에 허브 또는 핵심 위치를 확보한 국가가 이를 상대국을 압박하는 ‘무기화된 상호의존(weaponized interdependence)’의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자각시키기에 충분했다. 둘째, GVC의 확대는 선진국 제조업의 오프쇼어링(off-shoring·생산을 비용이 저렴한 해외에서 하는 것)을 촉진했는데, 이는 세계화에 대한 선진국 근로자들의 반발을 초래한 근본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세계화의 국내 정치적 기반이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21세기 통상정책에서 국내 정치적 기원이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미국과 중국은 물론, 주요국들은 국내 정치적 영향을 면밀히 검토한 후에 통상정책을 자유무역의 확대보다는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여겼다. 트럼프 행정부가 취임 직후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탈퇴하고, 바이든 행정부가 규칙 기반의 질서를 강조하면서도 중국에 대한 견제와 양질의 일자리 창출이라는 양면의 목표를 연계하는 통상정책을 추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통상정책이 산업정책과 긴밀하게 연계된 것은 이러한 배경이다. 주요국 정부들은 통상정책을 경제 및 안보와 연계하는 주요 수단으로 인식하고, 취약성 완화에 초점을 맞춘 산업정책과의 결합을 시도했다. 바이든 행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반도체와 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2) 은 그 상징적 사례다.
산업정책과 결합된 통상정책은 EU, 일본 등으로 확산됐다. 반도체 공급망 교란의 여파를 경험한 EU 역시 취약성 완화에 초점을 맞춘 반도체 전략을 공표했다. EU는 2020년 10%에 불과한 반도체 시장 점유율을 2030년 20%까지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설정했다. 단기적으로는 반도체 시장 상황 모니터링을 위한 조기경보 및 정보공유 시스템 구축, 중장기적으로는 연구개발, 설계, 생산, 국제협력 등 다양한 수단을 동원한 반도체 전략을 수립했다. 일본 정부 역시 자국 기업의 반도체 시장 점유율 저하에 대한 우려를 표하고, 반도체 주권 회복을 위한 다양한 정책에 착수했다. 일본 경제산업성이 대만의 TSMC를 구마모토에 유치하기로 한 결정은 일본 반도체 전략의 상징적 조치다. 반도체산업의 취약성을 완화하기 위해 해외 기업에 대규모 지원금을 제공하기로 결정한 것은 자국 기업 또는 산업을 항상 최우선순위에 두었던 전통적 산업정책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미국에서 시작된 통상정책과 산업정책의 결합은 세계 주요국으로 빠르게 확산됐고, 이 과정에서 자국 우선주의는 더욱 강화됐다.

통상 거버넌스의 변화: 복수국 간 협정과 IPEF

WTO 기능 약화가 장기화되고 미국이 국내 정치적 고려 때문에 TPP를 탈퇴함에 따라, 세계 주요국들은 그 대안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새로운 대안 가운데 유력하게 부상하고 있는 것이 개별 분야의 복수국가 간 협정과 기존 통상 협상과 차별화된 새로운 협상 방식을 추구하는 지역 다자간 협정이다. 코로나19로 급속하게 확산된 디지털무역을 촉진하고, 디지털 경제의 새로운 프레임워크를 수립하는 데 목적을 둔 디지털경제동반자협정(Digital Economy Partnership Agreement, DEPA)3) 은 복수국가 간 협정의 대표적인 사례다.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ndo-Pacific Economic Framework for Prosperity, IPEF)4) 는 다음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이슈의 범위 면에서 디지털 경제, 공급망, 탈탄소화, 조세, 반부패 등 좁은 의미의 통상를 넘어선 이슈를 대거 포함하고 있을 뿐 아니라 노동, 환경 등 국내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슈도 포함하고 있다. 미국이 IPEF를 추진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미·중 전략경쟁이 규칙 형성의 요소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는 만큼, 향후 세계경제의 질서 수립을 위해 유리한 위치를 선제적으로 확보해야 할 전략적 필요성과 시장 접근성을 지렛대로 한 전통적인 협상 방식을 고수하기 어려운 국내 정치적 요인이 그것이다.

2) 반도체와 과학법 (CHIPS and Science Act)
바이든 행정부는 미국이 반도체 가치사슬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확보하고 있음에도 생산 점유율이 하락하자 국내 생산능력 증대와 동맹 및 파트너들과의 협력 강화를 위해 추진 중인 정책. 반도체 패권을 확보하고 리쇼어링으로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정치적 고려의 산물이다.

3) 디지털경제동반자협정 (Digital Economy Partnership Agreement, DEPA)
2020년 6월 칠레, 뉴질랜드, 싱가포르 사이에 체결된 세계 최초의 복수국가간 디지털무역 협정. 한국은 2023년 6월 가입 협상을 실질 타결했다. 이어 중국과 캐나다의 가입절차가 개시됐고, 코스타리카 등 중남미 및 중동 국가들도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4)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 (Indo-Pacific Economic Framework for Prosperity, IPEF)
기존 통상 협상에서 다루기 어려웠던 이슈들을 지역 다자 차원에서 다루기 위해 출범한 새로운 유형의 협의체다. IPEF가 새로운 유형으로서 주목받는 것은 이슈의 포괄성뿐 아니라, 이익의 교환이라는 협상 방식 면에서도 전통적인 통상 협상과 차별적이기 때문이다.

‘복합적 세계질서’의 시대

21세기 통상정책은 기로에 있다. 지금과 같은 초불확실성 시대의 통상정책이 과거의 통상정책과 같을 수는 없다. 우선, 자국 우선주의는 단기적으로 국익을 증진하는 수단인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중장기적으로 세계경제질서의 폐쇄성을 높여 결국 모두에게 파국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둘째, 세계경제질서의 재동조화 가능성이다. 미·중 전략경쟁은 무역·산업·기술의 안보화가 더 이상 가능성이 아니라 현실임을 보여주었다. 전략경쟁의 특성상 미국과 중국 사이에는 앞으로도 상당 기간 경쟁이 고조되고 갈등이 격화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미국과 중국 모두 디커플링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앞으로 세계는 첨단기술 등 민감한 분야에 대해서는 보호와 견제를, 상업적 이해관계가 크게 걸려 있는 분야에서는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복합적 세계질서’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다. 복합성에는 불확실성이 도사리고 있는 만큼, 단선적인 전략보다는 통상의 양면성을 체계적으로 고려한 ‘복합전략’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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