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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FTA

통상의 세계 돋보기
복잡함을 더해가는 미·중·중남미 트라이앵글
미국과 중국은 중남미를 자국의 경제블록으로 편입하기 위해 경쟁 중이다. 미국은 중남미에 막대한 양의 공적자금을 투입해 역내 국가의 발전에 공헌한 동시에 경제·외교 부문의 대미 의존성을 높여왔다. 중국은 2000년대 들어 석유, 광물, 농산품과 같은 원자재를 대량 수입하면서 중남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후 수출 다변화와 신시장 확보를 위해 중남미 지역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경제력을 지렛대로 한 중국의 중남미 내 영향력 확대는 역내 패권국인 미국의 경제적·지정학적 이익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이승호 전북대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

미국과 중국은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40%, 무역의 20%를 차지한다. 양국은 탈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국제 공조보다는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무게를 싣고 대응하고 있다. 자국 주도의 공급망 재편 움직임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러한 움직임이 심화할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두 나라는 각자의 방법으로 중남미를 자신의 경제블록으로 편입하려 노력하고 있다. 1차 상품의 확보와 제조업 가치사슬 재편은 이제 국가안보와 연결되는 사항이고, 중남미는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는 파트너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두 나라의 공급망 재편을 위한 여러 정책은 중남미 국가의 경제 여러 부문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미·중·중남미 트라이앵글

미국은 전통적으로 중남미에서 경제적·지정학적 영향력을 유지하는 것이 국가안보 증진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고 인식해왔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미국은 지리적으로 근접할 뿐만 아니라 1차 상품 확보, 시장 확대, 생산 네트워크 유지에도 중요한 중남미 여러 국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1823년 먼로 독트린 이후 중남미는 줄곧 미국의 ‘뒷마당’이었다.
미국 정부는 중남미에 막대한 양의 공적자금을 투입함으로써 역내 국가의 발전에 공헌함과 동시에 수원국에서 미국의 가치를 관철해 중남미 경제·외교 부문의 대미 의존성을 높여왔다. 또한, 많은 미국 기업은 중남미 시장 공략, 원자재 확보, 저임금을 이용한 임가공업과 같은 글로벌 가치사슬 활용 차원에서 중남미 국가에 많은 투자를 시행해왔다.
한편 중국은 자국의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2000년대 초반부터 중남미 자원 부국에서 1차 상품을 대량으로 수입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중국은 석유, 광물, 농산품과 같은 원자재 확보를 위한 주요 시장으로서 중남미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됐다. 또한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으로 중국의 세계경제 편입이 가속화되자 중국 정부와 기업은 수출 다변화를 위해 신시장 확보 측면에서도 중남미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중국의 대중남미 투자가 2000년대 중반부터 중국 공기업의 참여로 확대됐고, 비슷한 시기 국책은행의 정책금융 사업도 아주 커졌다.
경제력을 지렛대로 한 중국의 중남미 내 영향력 확대는 역내 패권국인 미국의 경제적·지정학적 이익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미·중 경쟁이 격화되는 중남미에서는 여러 분야에서 경쟁 양상이 나타나고 있지만, 통상의 관점에서 보면 두 나라가 중남미를 자국 중심의 경제권에 편입시키려는 목적으로 펼치고 있는 정책에 특히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른바 니어쇼어링으로 불리는 미국의 중남미 내 자국 주도 공급망 재편 움직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멕시코 등 여러 중남미 국가를 공급망 재편 구상의 핵심 파트너로 삼고, 자국의 새로운 공급망 구상에 이 국가들을 깊숙이 끌어들여 미·중남미 경제협력 관계를 강화하고 핵심산업에서 탈중국화를 제고하겠다는 계획이다. 중국은 지리적 한계로 미국처럼 중남미와 밀접한 공급망을 구축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지만, 핵심광물을 비롯한 원자재 확보 노력을 크게 확대하고 있다. 원자재 부문에서 일부 가치사슬을 구축하려는 구상도 엿보인다.

미국의 자국 중심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멕시코의 대응

멕시코는 사실상 미국의 공급망 재편 구상에 맞춰 자국의 산업 정책을 설계하고 있다. 미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미국·멕시코·캐나다 협정(USMCA)을 거치며 미국의 필수 불가결한 경제협력 파트너가 된 멕시코는 미국의 공급망 재편 계획에 적극적으로 호응해 제조업의 고부가가치화를 꾀하는 모양새다. 멕시코는 미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 계획이 본격화되면서 해당 구상으로 가장 큰 수혜를 누릴 국가로 지목돼왔고, 실제로 멕시코 정부는 미국과의 경제협력 강화와 국내 산업 정책을 통해 이러한 기회를 최대한 이용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작년 9월 열린 미국과 멕시코 간 고위급 경제 대화와 올해 1월 개최된 북미 3개국 정상회담에서 공통으로 논의된 의제는 전기차, 반도체, 재생에너지와 같은 새로운 핵심 산업에서 가치사슬 협력 강화였다. 올해 10월 멕시코 정부가 내놓은 니어쇼어링 촉진을 위한 세제 혜택 시행령은 배터리, 반도체, 전자부품 등을 수출하는 제조업 기업에 세금 관련 유인책을 제공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미국과 멕시코의 구상은 멕시코로 유입되는 외국인 투자의 증가로 나타나는 모양새다. 멕시코로 유입된 외국인직접투자는 코로나19 기간 잠시 주춤했지만, 2022년부터 빠르게 회복세를 보였다. 멕시코 중앙은행의 자료에 따르면, 2022년 멕시코의 외국인 투자 유입액은 약 364억 달러로 전년도에 비해 14.3% 상승했고, 2023년에는 전반기에만 약 290억 달러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멕시코 경제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제조업에 대한 외국인 투자는 2020년부터 빠르게 증가하고 있으며, 2023년 1/4분기에는 제조업에 전체 외국인 투자 유입액의 절반이 넘게 유입된 것으로 나타났다.

세계 각국의 리튬 확보 노력 속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대응

칠레와 아르헨티나는 높은 리튬 매장량과 생산량으로 전 세계의 이목을 끌고 있다. 대표적인 신산업인 배터리 분야의 가치사슬을 둘러싼 국가 간 또는 기업 간 힘겨루기에서 리튬의 안정적 확보가 필수적인 고려 사항이 됐기 때문이다. 가치사슬에서 우위를 점하고 싶어 하는 미국과 중국은 리튬의 안정적 수급에 열을 올리고 있고, 양국 모두와 경제협력이 활발한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리튬 정책은 두 나라에 큰 관심거리다.
미국 지질조사국의 자료에 따르면, 칠레와 아르헨티나는 2022년 기준 전 세계 리튬 매장량의 46.2%를 차지했다. 미국과 중국이 두 나라를 리튬 확보를 위한 협력국으로 여기는 이유다. 칠레는 지금까지 리튬을 민간 기업에 대한 채굴 허가 대상에서 제외해왔으며, 두 개의 민간 기업만이 임대 계약에 따라 리튬을 채굴하고 있어 신규 외국인 투자가 제한적이었다. 반면 아르헨티나는 칠레와 달리 자유시장 원칙에 기반한 리튬 정책을 펼쳐왔으며, 채굴 사업자가 리튬을 제약 없이 자유롭게 상업화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어 신규 외국인 투자 유입이 활발했다. 특히 최근 중국 기업이 아르헨티나 리튬 채굴 분야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한편, 최근 칠레 정부가 내놓은 리튬 정책에 많은 이목이 쏠리고 있다. 발표된 리튬 정책은 민관협력을 통해 리튬산업을 확대하는 동시에 확장하는 리튬산업에서의 국가 통제 강화를 목표하는 것으로 보인다. 시장을 열어 신규 채굴 투자자를 유치하기 위한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동시에 채굴 투자자가 배터리 가치사슬에서 생산 연계 구축을 하도록 유도하는 ‘당근과 채찍’ 전략이다. 리튬산업의 고부가가치화를 위한 정책으로 해석된다.
눈여겨봐야 할 점은 칠레가 중국 전기차업체 비야디(BYD)의 투자 약속을 리튬산업 민관협력의 모범사례로 제시했다는 점이다. BYD는 최근 칠레 정부로부터 리튬 채굴권을 획득함과 동시에 칠레 내 양극재 생산시설 설립을 약속했다. 글로벌 배터리 가치사슬 전 부문에서 중국이 갖는 압도적인 위치는 투자 대상국의 기대에 부응하며 리튬을 확보하는 적극적인 움직임으로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칠레와 아르헨티나는 리튬 부국으로
배터리 분야의 가치사슬을 둘러싼
경쟁에서 주목받는 나라로 부상했다.

IRA 이후 멕시코와 칠레 투자 유인 강화 FTA 체결 및 현대화 서둘러야

미국과 멕시코의 공급망 연계가 양국의 여러 정책으로 강화되고 있는 가운데, 우리 기업으로선 양국 간 가치사슬에 참여할 유인이 충분하다. 특히, 지난해 8월 발효된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으로 인해 멕시코에 대한 투자 유인은 더욱 커졌다. IRA가 강제하는 최종조립 요건과 원산지 규정으로 인해 멕시코 내 전기차나 배터리 관련 제품의 생산시설 설립을 많은 기업이 고려하고 있다. 우리 정부가 멕시코와 양자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거나 태평양동맹 준회원국 가입을 서둘러야 할 새로운 이유가 생긴 것이다.
칠레의 리튬 정책 역시 글로벌 배터리 가치사슬의 중류와 하류 부문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는 우리 기업에 큰 관심거리다. 우리 기업에 리튬의 안정적 확보는 필수적이며, IRA가 요구하는 배터리 광물 및 부품 요건이 미국과 FTA를 맺고 있는 칠레 내 광물 및 부품 생산기업에 일정 부분 수혜를 줄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여러 기업이 전통적으로 외국인 투자에 우호적이며 정치적 안정성이 보장된 자원 부국인 칠레에 대한 투자를 검토하고 있다. 2004년 발효된 한·칠레 FTA가 현대화 작업을 거치고 있는 가운데, 우리 기업의 안정적 리튬 확보를 위한 협력 조항이 FTA에 포함된다면 이는 우리 기업에 새로운 선택지를 마련해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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