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현 전무
미국 반도체법의 목적은 미국 내에 반도체 제조시설을 짓고자 하는 것인데 생산성과 비용 문제로 쉽지 않다. 그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보조금을 지원하겠다는 것이 반도체법의 취지다. 소재·부품·장비를 포함해 미국 내에 반도체 제조시설을 짓고자 하는 기업에 현금으로 지원하는 방안을 담고 있다. 대신 가드레일을 통해 여러 조건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대중국 반도체 조치와 관련된 규정을 담고 있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중국 내에 반도체 제조시설을 운영하고 있는 만큼 이러한 조항은 우리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중국 내 반도체 제조시설을 운영하는 데 있어 여러 제재 조항이 적용되는데 1차 발표 때 중국 내 공장의 생산능력을 10년간 5% 이내로만 확장할 수 있도록 제한하는 등 규제조항이 포함됐다. 우리 입장에서는 최종안이 확정될 때까지 기업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최소화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결과적으로 크게 바뀐 사항은 없지만 사실 10년 이내에 생산능력을 5% 늘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리스크는 없다고 보면 된다.
경희권 부연구위원
미국 CHIPS 프로그램(반도체법) 오피스는 500여 건의 보조금 신청과 투자의향서를 접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글로벌 반도체 가치사슬을 구성하는 주요국인 우리나라, 유럽, 대만, 일본 정부와 미국 상무부 간에 가드레일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었다. 미국의 중장기 반도체 분야 대중국 견제와 자국 제조 및 혁신 기반 강화 정책 기조에 변함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가드레일과 관련한 주요 쟁점은 결국 가드레일을 얼마나 완화해줄 것이냐, 대중국 견제 전략의 강도와 범위를 얼마나 조정할 것이냐 하는 점이었다.
결론적으로 보면 반도체 장비의 중국 내 반입을 허용하는 장비 수출통제의 유예조치 연장으로 한국, 대만 등 동맹국 기업의 중국 내 생산활동과 수익성이 보장될 전망이다. 다만 이는 중장기적으로 중국 외 생산기지의 물량 확대를 위한 시간적 여유를 제공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더불어 대중국 견제 전략에 대한 미국 양원의 초당적 컨센서스 또한 변함이 없다. 사실 한국 반도체 기업에 대한 중국 내 장비 도입 허용 조치는 예상됐던 부분이다. 미국의 빅테크 플랫폼 기업이나 정보통신기술(ICT) 기업은 최종재 조립을 대부분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들의 수익성 보장을 위해서라도 한국 기업의 중국 내 생산시설 가동을 향후 5~10년 이상 연장해줄 필요가 있었다.
안기현 전무
해당 부분은 통제대상인 인공지능(AI) 반도체에 대한 규제 범위를 확대한 것으로 우리 기업들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은 거의 없다. 한국은 첨단 AI칩을 거의 생산하지 않고 있고, 최근 미국 정부로부터 ‘검증된 최종사용자(VEU)’ 승인을 받았기 때문이다. 반도체 제조 부문과 관련해 강화된 조치는 현재로선 없다. 지난해 발표된 대중 수출통제 조치는 중국 내 시설에 대한 통제를 의미한다. 이번에 확정된 가드레일은 기술적인 세부 기준을 정해놓은 것이다. 미국은 지난해 10월 18나노미터(nm) 이하 D램, 128단 이상 낸드(NAND) 플래시, 14nm 이하 시스템반도체 등 첨단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미국산 장비의 중국 수출을 금지했다.
이러한 조치가 우리에게 해당되는 사항이다. 또 하나 지난해 중국 내 생산시설을 소유한 외국 기업들에 대해 1년간 미국산 장비 반입 규제 유예 조치를 적용했다. 메모리반도체를 생산하는 우리 기업들의 장비 업그레이드가 이뤄지지 않으면 사용기간이 급격히 줄어 생산성이 떨어지게 된다. 이와 관련해 최근 우리 기업들이 VEU 방식으로 미국 반도체 장비의 중국 공장 반입 등에 대해 무기한 제재 유예 조치를 받게 되면서 리스크가 크게 줄어든 상태다. 우리로선 생산설비의 사용기간을 늘려가며 생산성을 유지할 수 있는 좋은 결과를 맞게 됐다고 볼 수 있다.
경희권 부연구위원
미국은 2019년 에릭 슈미트 구글 전 CEO를 위원장으로 한 ‘인공지능 국가안보위원회’를 만들었다. 이는 미·중 전략 경쟁에서 승리하려면 AI 기술 개발이 중요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인데, 그렇다 보니 반도체를 반드시 잡아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미국의 대중 반도체 규제 전략은 중국 AI 관련 빅테크플랫폼 기업의 기술 진보 속도 저하와 CXMT, YMTC, SMIC 등 중국 핵심 반도체 기업 3사의 선단공정 진입 저지라는 목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보면 된다. 최근 미국에서 나온 조치 중 하나는 2027년부터 미국 연방정부 조달계약에 중국 반도체 3사를 배제하도록 한 것이다. 중국에 대한 수출통제 범위를 28nm(1nm는 10억분의 1m)까지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규제조치들로 인해 글로벌 반도체 시장은 여전히 미국, 유럽, 일본, 대만, 한국 등 반도체 가치사슬 구성 주요국의 주도권과 통제력이 유지·강화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 전망이다. 이는 곧 세계 주요 반도체 기업들로 하여금 중국과 그 영향권에 놓여 있는 국가에 대한 시설 투자를 기피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결국 중장기적으로 미국과 동맹권역의 반도체 제조 점유율과 혁신 기반이 확대되리라 생각한다. 한국 입장에서는 오히려 선단공정의 메모리와 비메모리 분야에서 미국 마이크론, 인텔 등 국가적 지원에 힘입은 기업들과 어떻게 경쟁할 것인지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안기현 전무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중국 내에 있는 한국 기업의 공장은 주로 메모리반도체를 제조하는 시설이다. D램과 낸드플래시, 특히 D램의 경우 항상 첨단 기술과 설비를 유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산성이 떨어져 제품을 아무리 팔아도 밑지게 된다. 첨단기술을 유지하려면 기술 업그레이드가 필수이며, 기술 업그레이드를 하려면 그 기술에 맞는 장비가 들어가야 한다. 미국은 반도체 장비를 통해 중국 수출을 제재한다. 기술 수준을 정해놓고 그에 맞는 장비만 중국에 반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미국의 대중국 통제 방식이다. 그런데 중국 내 한국 공장에도 중국 기업의 공장처럼 장비를 들일 수 없다면 그 메모리반도체 공장의 생산성은 물론 한국 기업의 경쟁력도 타격을 받게 되고 글로벌 공급망에도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러한 배경에서 이번 유예 조치가 나왔고 우리 기업들의 중국 공장 내 미국산 장비 반입이 가능해졌다. 이에 따라 우리 메모리반도체 업계가 큰 부담을 덜게 됐고 사업상 리스크도 해소됐다고 보면 된다.
경희권 부연구위원
트럼프 행정부 시기부터 지속된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및 기술 제재는 분명 우리 주요 기업들의 메모리반도체와 스마트폰 등의 사업 수익성과 생명선을 5년 이상 연장시켜준 요소로 평가할 수 있다. 화웨이가 미국의 제재를 받지 않았다면 2016~2017년 이후 안드로이드 기반 스마트폰 시장 1위에 등극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인식이 강했다. 중국 기업들의 빠른 추격이 한국과 미국의 주요 경쟁 기업에 큰 위협 요소였으나 현실화되지 않아 이에 대해 정책 당국자는 물론 국민 대부분이 잘 모를 수 있다. 국내 기업들의 중국 내 생산시설 운영 수익 악화가 우려됐지만 이번 조치로 불확실성이 일부 해소됐고 향후 5년 정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다. 결국 중국 내 생산시설의 레거시화 완료 시점만 뒤로 미뤄졌을 뿐이며, 중장기적으로 국내 기업들의 생산시설 이전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현재 대중국 반도체 수출통제 조치는 바세나르 협약으로 대체된 과거 대소련 수출통제 수준 대비 매우 낮은 수준이라 볼 수 있다. 즉 향후 중국의 자급화 노력이 거세질수록 수출통제 조치는 보다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안기현 전무
반도체업계는 그동안 정부에 미국의 대중국 수출통제 조치와 관련한 규제 기준을 완화해달라고 요청해왔다. 그중에서도 중국 공장에 필요한 장비 반입과 관련해 적용된 규제 유예 기간을 늘려달라는 요구가 핵심이었다. 최소 1년에서 3년 정도 기한을 연장해주길 바랐는데 미국의 발표를 보니 기한을 특정하지 않았다. 우리 기업들의 기대보다 굉장히 좋은 결과를 맞게 됐다. 미국 정부의 결정과 우리 정부의 협상 노력에 깊이 감사할 따름이다.
경희권 부연구위원
국가첨단전략산업특별법이 제정됐음에도 불구하고 반도체 가치사슬 구성 주요국 대비 한국의 현재 반도체 기술개발 지원은 현저히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 전략 가치는 돈을 버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주요 열강들에 한국의 외교안보 이익을 관철할 수 있는 지렛대, 즉 생존가치인데,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메모리와 비메모리 모두 미래 기술 패권 경쟁의 주 전장인 AI의 핵심 기반 기술로서 국가적 지원 수준을 높이고 지방정부 차원에서도 이권다툼을 넘어 신속한 조치가 이뤄졌으면 한다. 지금 실기(失期)하면 다음 기회는 절대로 주어지지 않는다. 또한 향후 주요국 경쟁기업과의 치열한 경쟁 흐름 속에서 3~5년 내 우리 메모리반도체 기업들의 경쟁환경 악화와 인도·태평양 지역의 반도체 수요 급부상 가능성이 전망되는 만큼 인·태 지역에 초점을 맞춘 반도체와 전자제품 제조(EMS) 분야의 장기 전략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안기현 전무
우리가 지금까지 반도체 강국으로서 경쟁력을 키울 수 있었던 배경에는 미국, 유럽, 일본 등 다른 국가들이 제조를 하지 않았던 측면도 있다. 그 나라들은 반도체 설계·소재·장비 등 다른 부문에서 경쟁력을 갖춰왔다. 그런데 그 국가들이 생산성이 뒤처져 못했던 제조 부문에 관심을 갖고 부족한 부분을 돈으로 상쇄하려 한다. 우리도 반도체 제조가 중요하다는 데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지만 그들만큼 간절하지 않은 것 같다. 반도체산업은 전 세계적으로 전략산업, 국유산업이 되어가는 중이다. 반도체를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전략자산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다. 우리도 그러한 인식하에 이미 갖고 있는 경쟁력을 유지하거나 개선할 수 있는 방향을 고민하고 투자해야 할 시점이다. 첨단 제조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제조 시스템을 선진화하고, 인허가 등 각종 규제 사항을 원래 취지에 맞는 수준으로 합리화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