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커버스토리

깊이 보기
국제사회 반도체산업 질서의 변화
정보기술(IT) 산업의 필수품인 반도체산업에서 반도체 안보를 앞세운 각국의 과감한 투자가 이어지면서 기존과는 다른 반도체 질서가 형성되고 있다. 지금까지 국가산업으로서 경제와 IT 발전에 기여해왔던 우리나라 반도체산업은 이러한 변화의 파고를 잘 헤쳐나가야 하는 상황이다. 반도체산업 질서의 재편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선도적 지위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범진욱 서강대 전자공학과·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 반도체공학회 고문

반도체의 주도권을 다투는 반도체 패권경쟁이라는 다소 과격한 표현은 반도체의 자체 생산능력을 갖춘다는 반도체 자급화로 순화하여 표현할 수 있다. 2012년에는 미국에서 화웨이 통신장비의 악성코드 및 백도어가 발견됐다는 주장이 있었고, 그 여파로 2020년 12월 미 상무부는 거래 제재 명단에 화웨이와 150개 계열사를 포함시켰다. 2021년에는 코로나19 유행으로 정보기술(IT)기기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는데, 수익이 높은 IT기기용 반도체 생산을 위해 차량형 반도체 생산이 감소한 시점에 미국 텍사스 한파로 그 지역의 반도체 생산라인이 정지되고, 차량형 반도체 전문업체인 일본 르네사스 공장의 화재로 차량형 반도체 품귀 현상이 발생했다. 당시만 해도 반도체는 누구나 쉽게 구입할 수 있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기에 반도체를 국가의 기간산업으로 성장시킬 생각은 하지 않았으나 이때부터 각국이 반도체의 내재화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 평상시에는 반도체를 구하는 데 문제가 없으나, 공급망 재편성 등 위기상황에서 반도체를 구하지 못하는 것은 석유를 구하지 못하는 것같이 국가 체계 및 생존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인식의 확대를 통해 반도체의 중요성이 전 세계에서 한층 고양됐다. 한 예로 러시아의 경우 미국에 이은 제2의 군사대국이었으나 반도체산업은 열악한데,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로 반도체 수급이 어려워지자 무기 및 최신 IT 기기의 제작이 불가능해졌다. 이 같은 현실은 어느 나라에도 일어날 수 있어, 국가 차원의 대비가 필요하다는 분위기가 팽배해진 것이다.

세계 각국, 반도체 공급망을 재편하는 육성정책 잇달아 내놓아

중국은 이미 2015년에 반도체 자립률 70%를 이룬다는 반도체 굴기를 발표했다. 정부 차원에서 총 55조 원 규모의 국가 반도체 펀드를 조성하고 2025년까지 10년 동안 173조 원의 투자 계획을 수립했다. 특히 최근 미국을 중심으로 한 공급망 재편성 과정에서 반도체 및 반도체 생산장비의 수급이 원활하지 못해 반도체 자립에 대한 필요를 더욱 절실히 느끼고 있어, 반도체에 대한 지원 및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일본은 지난 2~3년간 총 3조 엔(약 27조 원)을 지원했으며, 추가로 3조4,000억 엔(약 30조 원)을 투입해 일본 내 반도체 공장 신설을 지원한다. TSMC의 구마모토 공장 건립과 일본 기업 합작 반도체 기업 라피더스,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의 히로시마 공장 등이 지원 대상이다. 유럽연합(EU)은 2022년 430억 유로(약 60조 원)를 투자하는 EU반도체법을 추진하고 있다. 2030년까지 세계시장에서 점유율을 현재의 10%에서 20%로 확보하겠다는 전략이다. 대만의 TSMC는 미국과 일본의 지원금을 이용해 생산시설을 해당국에 확장하고 있으며, 대만 정부에서도 지난 2023년 1월 ‘산업혁신 조례 수정안’을 대만 의회에서 통과시켜 연구개발 및 선진 생산공정 설비 투자비에 대해 각각 25%와 5%의 세액공제를 제공하기로 했다.

미국의 반도체법과 가드레일

미국은 반도체 생산시설 면에서는 다소 미약하나 반도체 종주국으로 설계툴, 시스템반도체 설계, 반도체 시스템 분야에서 세계를 주도하고 있다. 미국은 2022년 8월에 반도체산업에 대한 527억 달러(약 68.5조 원) 지원과 투자금에 대해 25% 세액공제를 제공하는 반도체와 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 반도체법)을 통과시켰으며, 2023년 9월에 반도체법의 보조금 수혜에 따른 설비확장 규제 등을 정한 미국 반도체법 가드레일1) 최종안을, 발표했는데 이 중 우리나라 반도체 기업에 문제가 될 부분은 보조금을 받은 뒤 10년 동안 중국 내 반도체 생산능력 확장 및 신축을 제한하는 조항이다. 첨단 반도체의 경우 생산능력 5% 이하, 범용 반도체의 경우 10% 미만 확장이 허용된다. 다행히 지난 10월, 미국 정부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 내 현지 공장에 대해 미국산 반도체 장비 반입 규제 조치를 사실상 무기한 유예한다는 방침을 최종 통보했다. 이는 우리 정부가 미국을 상대로 적극적으로 협상에 임한 결과로, 중국 내 시설 운영 및 확장에 대한 불확실성이 사실상 해소됐다.
우리나라에서도 다양한 반도체산업 정책이 발표되고 시행되고 있다. 2021년 5월 K-반도체 전략을 통해 510조 원 이상의 민간투자 계획을 발표했으며, 반도체 등 첨단산업의 육성 및 보호를 위한 국가첨단전략산업법이 2022년 국회를 통과했다. 또한 정부는 2022년 7월 반도체 초강대국 달성 전략을 발표했다. 2026년까지 반도체산업에 340조 원을 투자해 2030년까지 시스템반도체 점유율을 10% 확충하고 소부장 자립화율을 50% 달성하는 목표를 제시하면서 10년간 약 15만 명의 인재를 양성하는 계획도 함께 공표했다. 또한 2023년 3월 국회를 통과한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에 따라 반도체 등 국가전략기술 시설 투자액에 대한 세액공제율이 대기업은 8%에서 15%로, 중소기업은 16%에서 25%로 확대됐다. 반도체 생산이 대부분 대기업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이러한 지원책을 통해 반도체 인력 부족 문제 해결과 반도체산업의 투자 활성화를 어느 정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1) 미국 반도체법 가드레일
반도체법에 따라 지급되는 보조금을 수령한 기업에 대한 세부 규정. 중국 등 우려국가에 대한 설비확장 규제에 관한 규정을 담았다. 2023년 3월 초안 및 2023년 9월 최종안 발표.

국내 반도체산업, 파운드리-팹리스 상생의 협력구조 구축해야

우리나라 반도체산업은 D램, 플래시메모리 등 단일품목으로 많은 상품 수요가 있는 메모리반도체 제품을 위주로 발전해왔으며, 반도체 생산기술 면에서 기술우위를 점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시스템반도체2) 분야의 우리나라 시장점유율은 3% 정도로 매우 작아 이 분야에서의 확장이 절실한 것이 현실이다. 반도체 시장 규모는 클라우드, 인공지능(AI), 자동차 반도체의 시장 확장에 힘입어 앞으로 더 크게 증가할 전망이다. 하지만 현재는 코로나19의 여파로 IT기기의 과잉투자와 금리의 지속적인 인상에 따른 투자심리 위축으로 반도체 제품의 수요 감소가 있었고, 이로 인해 촉발된 반도체 공급과잉으로 반도체 제품의 재고가 늘면서 반도체 회사의 이익이 급감하고 있다. 좀 더 장기적으로는 각국의 반도체 지원 정책에 따라 확장 또는 신설되는 여러 회사와의 피할 수 없는 미래 전쟁을 앞두고 있다. 반도체산업의 투자 증대에 따른 글로벌 반도체 인력 부족으로 인한 우리나라 반도체 인력 유출 문제도 함께 해결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반도체를 중심으로 세계 반도체 시장을 바라보면, 메모리반도체 시장에서 우리나라 반도체 기업의 우위는 한동안 유지되리라 예상할 수 있지만, 마이크론은 미국 반도체법에 따른 보조금 지급 대상임과 동시에 일본에서도 보조금을 받아 공장 증설을 앞두고 있으며 반도체 자립을 위해 미국에서 포기할 수 없는 기업이기에 지속적인 경쟁대상이 될 전망이다. 중국 메모리 기업의 경우 미국의 반도체 첨단장비 금수 조치 대상이며 전체적인 기술 수준에서 아직까지는 큰 위협이 되지 않지만 중국에서 발표하는 학술논문의 양과 질에서 미국을 앞서고 있는 만큼 장기적으로 위협이 될 가능성이 있다.

시스템반도체 파운드리3) 분야에서는 TSMC의 우세 속에 신설·확장되는 기업의 약진이 있을 수 있어, 우리나라 기업에게는 어려운 싸움이 될 것이다.
시스템반도체 업계는 반도체 생산을 담당하는 파운드리와 반도체 설계를 담당하는 팹리스로 나누어진다. TSMC, SMIC 등은 파운드리 기업이고 퀄컴, 브로드컴, 엔비디아, 애플, AMD 등이 팹리스 기업4)으로 분류된다. 우리나라 파운드리 기업인 삼성전자의 경우 3nm 반도체를 세계 최초로 상용화하는 등 공정기술 부분에서는 우수하나, 우수한 공정기술을 이용한 사업화에서는 아직까지 큰 성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우수한 공정기술을 잘 활용할 수 있는 상품에 주력하면서, 국내 팹리스와 협력해 함께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성장한 국내 팹리스 기업을 통해 파운드리가 다시 발전하는 파운드리-팹리스 상생의 협력구조를 구축함으로써 우리나라 반도체산업이 한 단계 성장하는 기회가 만들어지기를 기대한다.

2) 시스템반도체
컴퓨터의 중앙처리장치(CPU)처럼 데이터를 연산·제어·처리하는 비메모리 반도체를 말한다. 자율주행차, 사물인터넷(IoT), 인공지능(AI) 등에는 시스템반도체가 탑재된다.
3) 파운드리(Foundry)
반도체 위탁생산 업체를 의미한다. 주로 팹리스로부터 반도체 설계 디자인을 위탁받아 생산 공정을 전담하는 업체다.
4) 팹리스(Fabless)
팹리스는 fabrication+ less의 합성어로, 반도체 제품을 직접 생산하지 않고 반도체 설계만 전문적으로 하는 반도체 업체다.
관련 컨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