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별책 : 기술 표준

Overview
전략적 가치 자산으로의 기술표준
기술표준은 엔지니어링 혹은 일개 산업의 영역, 무역을 원활하게 하는 도구를 넘어서 전략적 가치를 지닌 자산으로 간주된다. 이제 기술표준은 기술패권 경쟁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기술표준의 전략적 가치는 기업/산업, 통상, 그리고 경제안보 세 가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물론 세 시각은 상호 밀접하게 연결돼 있지만 편의상 나누어서 기술한다.
이희진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디지털통상연구센터  

산업과 통상 관점에서 기술표준의 중요성

산업 측면에서 기술표준의 중요성은 하나의 네트워크로서 호환성 및 상호운용성이 중요한 전기전자 및 정보통신기술(ICT) 분야에서 본격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흔히 ‘표준전쟁’의 고전적 사례로 언급되는 베타맥스와 VHS의 비디오카세트 경쟁을 여기서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최근에는 다양한 충전기 연결 방식 중에서 테슬라의 ‘북미충전표준(NACS)’이 대세가 되면서, 새로운 ‘표준전쟁’의 사례로 등장하고 있다.
무역에서 차지하는 기술표준의 중요성은 어떤 제품을 수출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가 요구하는 규격 등을 맞추어야 한다는 점에서 출발하는데 이것은 수출업체에게 엄청난 부담이다. 또한 일부 국가는 고유의 규격을 만들어서 무역장벽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런 부담을 줄이고 무역장벽을 낮추고자 세계무역기구(WTO)는 새로운 규격, 규제 등을 도입할 때 관련 국제표준이 존재한다면 자국의 새로운 표준, 규격을 만들 것이 아니라 국제표준을 사용할 것을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다. 기술표준이 무역에서 더욱 중요해진 계기다. 특정 국가의 어떤 기업이 개발한 표준이 국제표준이 된다면 그것은 여러 나라에서 국내 규격의 기본이 될 것이고, 이들 국가의 기업은 수출하기 위해 이미 익숙한 자국의 규격, 규제 등을 따르면 된다.
국제표준이 무엇이냐에 대해선 논란이 있지만, 국제표준화기구(ISO), 국제전기기술위원회(IEC) 등에서 만들어진 표준이 일반적으로 국제표준으로 인정된다. 따라서 기업들은 위에서 언급한 사실상 표준(또는 디팩토 표준: VHS, NACS) 외에 자국 정부의 지원 및 협력 아래 국제표준기구에서 만들어지는 공식 표준(또는 디주어리 표준)에도 자원을 투입하고자 한다. 그러나 여러 다양한 표준화기구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많은 자원이 요구되고, 기업의 전략적 결단 없이는 참여가 쉽지 않다.

경제안보 관점에서 기술표준의 전략적 가치

경제안보 관점에서의 기술표준을 논하기 위해서는 경제안보가 무엇인가를 먼저 살펴야 한다. 기술경쟁의 맥락에서 경제안보는 “복원 가능하고 신뢰할 만한 공급망 구축 및 유지” 그리고 “지정학 경쟁국에 대한 기술우위 확립 및 유지”에 초점을 맞춘다. 먼저 기술표준의 전략적 가치는 글로벌 공급망 또는 가치사슬(GVC)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GVC 효율성의 토대는 생산의 모듈화(modularization)다. 모듈화는 레고로 집을 만들고, 성을 쌓듯이 하나의 시스템을 여러 하위 시스템 또는 모듈로 나누고, 각 모듈을 가장 비용효과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지역, 국가 또는 기업에 넘기고 이것들을 모아서 완제품을 만드는 방식이다. 모듈화된 방식이 작동하기 위해서 필요한 기초가 바로 표준이다. 미국이나 주요 선진국의 다국적기업은 표준화를 비롯해서 전체 시스템을 설계하고 가장 부가가치가 높은 부분은 자국에 두고, 낮은 부분은 중국을 비롯한 개발도상국에 두면서 가치를 실현해왔다.
표준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기술표준이 해당 기술의 발전 궤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다. 기술표준을 보유한 기업은 관련 기술의 향후 발전 궤적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고 심지어 결정도 할 수 있다. 미국이 오픈랜(Open RAN)이라는 새로운 표준화 모델을 내세우면서 중국의 5G 주도권에 제동을 거는 이유는 그 영향력이 5G에 그치지 않고, 향후 6G 등 차세대 무선통신기술에서도 중국이 주도권을 가져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익과 권력의 원천으로서의 기술표준

기술표준은 오늘날 ‘이익과 권력의 원천’으로서 국가가 주도해 전략적으로 획득하는 것으로 인식돼가고 있다. 이것이 미국이 기술표준을 국가전략의 차원으로 승격시키면서 더 많은 투자, 더 많은 기업과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참여, 인력양성, 완결성(integrity)과 포용성(inclusivity)이라는 가치를 내세우고, 이에 동조하는 국가와의 긴밀한 협력을 행동 방향으로 강조하는 이유다.
미·중 두 나라의 기술을 둘러싼 대립 속에서 유럽연합(EU), 호주, 영국, 일본, 인도 등도 글로벌 규칙 제정, 핵심기술의 국제표준화 문제에 대해서 공통되는 고민을 하고 있다. 미래 기술의 표준과 규범이 두 열강의 경쟁구도 속에서 상호 배타적으로 형성되거나 분절화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기술선진국으로 기술표준 또는 규범 제정의 장을 이끌어갈 역량이 있다. 그러나 규범 제정의 리더십은 기술역량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정치적 역량과 정당성 확보가 관건이다. 이들과 협력하며 논의의 장을 만들어가면서, 기술규범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나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근본적인 가치는 지키되 국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여러 나라와의 협력이 필요하다.

용어 설명

베타맥스와 VHS의 비디오카세트 경쟁
1980년대 소니와 마쓰시타 사이에 벌어진 비디오테이프 표준전 쟁. 소니는 베타맥스, 마쓰시타는 VHS라는 포맷을 각각 비디오 녹화방식으로 채택했는데 결국 VHS가 시장을 석권했다. 베타맥 스가 기술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소비자 니즈를 무시한 채 기술적 우위만 믿다가 결국 표준경쟁에서 밀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실상 표준(de facto standard)
기업 간 기술경쟁을 통해 승리하는 기술이 시장을 지배하고 사후적으로 실질적 표준이 되는 사실상의 표준. 오디오 압축 포맷인 MP3 등이 대표 사례.

공식 표준(de jure standard)
표준화 과정에 따라 정부나 공공기관에서 주도하여 사전적 합의를 통해 발생하는 법적 표준.

관련 컨텐츠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