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벽화에 그려진 스파르타의 전사들
“만약 스파르타라는 도시가 폐허가 돼 신전과 건물의 기초만 남게 된다면, 시간이 흐른 뒤 후손들은 이 지역이 과연 펠로폰네소스반도의 5분의 2를 점령하고 지역 맹주로 군림했던 강력한 장소였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 도시에는 신전이나 웅장한 기념물도 없다. 그저 마을들만 옹기종기 모여 있을 뿐이다. … 외관만 비교하면 아테네가 스파르타보다 2배는 강성했다고 추측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테네 출신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당대의 라이벌 스파르타의 ‘검소함’을 이렇게 묘사했다. 스파르타는 정말로 검소했다. 오늘날 스파르타는 그럴싸한 유적과 유물을 거의 남기지 못했다.
실제로 스파르타 지배층은 새로운 부의 창출보다는 근검과 절약을 미덕으로 여겼고, 이 같은 규범을 실천에 옮겼다. 이를 위한 상호 감시 시스템도 구축했다. 스파르타의 용사들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식사도 같이하고, 초라한 진흙 벽돌로 지은 집에서 잠도 같이 잤다. 보통의 스파르타인들에게 거주 이전의 자유를 비롯한 각종 개인의 자유, 사적재산의 소유 등은 극도로 제한됐다.
전체주의적 이상은 스파르타인의 삶과 의식을 지배했다. 스파르타인들은 농업·상업·전문직에 종사하는 것이 금지되는 대신 군인의 길만을 갈 수 있었던 병영국가에서 살았다. 60세 의무 복무기간으로 자유로운 개인 생활을 박탈당했던 스파르타 남성들은 20세까지는 ‘아고게(ἀγωγή)’라는 공동의 교육과 훈련을 받고, 20~30세에는 중앙 기숙사에서 공동으로 숙박을 함께했다. 20세 이후 40년간은 ‘페이디티아(φειδίτια)’라는 식사 공동체에서 집단생활을 했다.
함께 식사하고, 함께 훈련받고, 함께 전투하는 이 공동체는 격렬한 운동으로 ‘시장이 반찬’이 아니면 먹기 힘들다는 악명 높은 ‘멜라스 초모스(μέλας ζωμός)’라는 검은 수프로 끼니를 때우며 공동체 의식을 키웠다. “스파르타인은 사생활이란 원하지도 않고, 무엇인지도 모르고, 꿀벌처럼 공중의 한 부분이 되어 열광적인 애국심 속에서 자신을 잊은” 존재로 길러졌다.
평생 다른 삶을 살 기회가 없었던 대부분의 스파르타인은 획일적인 평등이 사회 전체적으로 통용된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스파르타인들은 정치적 평등과 평등한 삶의 상징으로서 ‘동등한 사람들’이라는 뜻을 지닌 ‘호모이오이(Ὅμοιοι)’라는 용어를 중시했다.
물론 그런 사회주의·국가주의·전체주의의 이상이 철두철미하게 관철된 것만은 아니다. 평등사회의 이념과 달리 실상은 경주마를 보유할 정도의 부자는 물론 대규모 토지를 소유해 다른 스파르타인들에게 임대하는 사람도 존재했고, 식사 공동체에 참가할 만큼에 필요한 최소한의 수입을 확보하지 못해 ‘동등한 사람’의 지위를 유지하지 못한 채 하층민으로 떨어진 사람도 적지 않았다.
여하튼 대외적으로 평등사회로 비쳤던 스파르타 사회는 당대의 소크라테스, 플라톤부터 후대의 서구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구성원이 동등한 재산권을 지니며 함께 모여 식사하고, 사치품을 금지하고 화폐를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그려진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스파르타의 전승을 바탕으로 했다. 17세기 영국에선 스파르타가 제한된 왕권의 완벽한 모델로 칭송받았다. 볼테르와 장 자크 루소에겐 평등하면서도 공산주의적인 공화국의 모범으로 여겨졌다. 카를 마르크스의 <독일 이데올로기>는 물론 히틀러 치하 나치 독일에서도 스파르타는 국가사회주의의 덕목을 두루 갖춘 ‘그리스의 노르딕 국가’로 칭송받았다.
이처럼 현대인의 눈에는 기괴하게 보이는 스파르타 사회는 오히려 ‘전체주의 유토피아’의 시원적 모델 역할을 하며 좌우 전체주의 사상의 양극단 모두로부터 환영받았다. 고대 스파르타가 뿌린 극단적 평등의 이상은 21세기 한국 사회와도 무관하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