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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FTA

통상의 세계 돋보기
IPEF, 필러 2 공급망 협상 조기 타결 선언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는 ‘21세기형 경제 협정’이라 불리는 미국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 지역 국가 간 경제협력의 틀이다. 무역, 공급망, 청정경제, 공정경제 등 필러별로 별도의 참여와 협상을 통해 기존 FTA와 다른 새로운 경제협력의 틀을 만드는 협상이다. 지난 5월 27일에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IPEF 장관회의 후 공동성명에서는 공급망 협상 타결을 선언하고, 나머지 세 개 필러의 협상 진행 현황과 앞으로의 방향도 제시했다. 공급망 협상이 먼저 타결됐지만, 미국은 나머지 세 개 분야에서도 오는 11월 APEC 정상회의까지 협상 타결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김계환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사진 한경DB

협상 진행 중 내용 공개가 불가한 일반적 관행 때문에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협상 내용이 공동성명을 통해 드러나게 됐다. 기존의 FTA 협상과는 내용과 형식 모든 면에서 성격이 다른 IPEF의 윤곽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공급망 협상 타결은 매우 중요한 이정표다.
필러 2 공급망 협정은 공급망 관련 최초의 국제협정이라는 의의가 있을 뿐만 아니라 반도체, 이차전지 등 중요 기술과 품목에서 공급망 재구축의 흐름이 강화되는 상황과 맞물려 있다. 따라서 협정이 지니는 함의가 무엇인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공급망 협상 타결로 IPEF의 전체 윤곽 드러나

우선, 참여국은 공급망 복원력, 생산성, 지속가능성, 투명성 등을 증진하고 역내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개별 국가의 노력과 국가 간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여기에는 공급망 병목 식별과 관리 및 해결, 관련 기업의 준비 지원, 공급망 물류와 인프라 강화 노력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또 새로 설치되는 공급망위원회는 참여국들의 노력을 점검하고, 공통으로 관심을 가지는 협력 방안을 준비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회원국 공통의 핵심 분야 및 품목을 중심으로 마련한 액션 플랜을 검토하는 역할도 이 위원회가 맡도록 하고 있다. 이 액션 플랜에는 ‘공급선 다변화, 인프라 및 인력 강화, 물류 연결성 강화, 공동 연구개발(R&D), 무역 원활화’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와 같은 평상시의 공급망 위험축소를 위한 노력뿐 아니라, 공급망 위기 발생 시 대응책 마련과 관련 제품의 조기 배송을 위해 공동으로 노력한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특히 공급망 위기 대응 네트워크의 설치가 예정되어 있어 참여국이 공급망 위기를 겪을 경우 신속하게 정보를 교환하고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한 소통창구 역할을 맡게 하고 있다.
세 번째로 노동자와 기업, 특히 중소기업이 공급망 강화 노력의 혜택을 볼 수 있게 하고 있다. 핵심 분야와 품목의 숙련 노동자 확보를 위한 노력을 강화하는 방안으로 각 회원국 대표로 구성되는 노동권 자문기구를 설치하여 노동권 현황을 진단하고 개선 방안을 제안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모든 활동이 무역 제한 등 교란 위험을 최소화하고 기업의 비밀을 유지하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다만 협상의 진전 속도가 더딘 나머지 다른 세 필러에 대해서는 진행 상황에 대한 전반적 평가와 향후 협상의 방향만을 간략히 제시하고 있다.
필러들 중에서 공급망 협상이 가장 먼저 타결된 것은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이나 자연재해, 정치적 분쟁 등 비상 상황에서도 중요 물자의 공급이 끊기지 않게 해야 할 필요성에 참여국이 보다 빨리 공감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세관 절차의 전자화, 노동자의 권리 보호를 다루는 ‘무역’ 필러, 클린 에너지 기술개발, 넷 제로를 위한 투자 확대를 다루는 ‘청정경제’ 필러, 글로벌 기업의 과세, 부패 방지를 위한 협력을 다루는 ‘공정경제’ 필러는 타결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처음부터 무역 필러에 참여하지 않은 인도의 행보에서도 알 수 있듯이, IPEF 협상에는 신흥국 입장에서 민감할 수밖에 없는 쟁점들을 포함하고 있다. 게다가 전통적인 통상협상과는 달리 선진국의 수입관세 인하를 통한 시장 접근성 개선이라는 유인도 없다.

디커플링이 아니라 위험축소로 중심 이동

최근 바이든 정부가 대중국 정책이 디커플링이 아니라 위험 축소(derisking)라고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 대통령 안보보좌관인 제이크 설리번은 지난 4월 27일 브루킹스연구소 연설에서 미국의 대중국 정책이 디커플링이 아닌 위험축소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으며, 바이든 대통령도 G7 정상회담 후 이 방향을 재확인했다. 더욱이 유럽연합(EU) 집행위 의장인 우르줄라 폰 데어라이언도 대중국 정책의 방향이 위험축소라고 거듭 강조하여 미국과 유럽 사이에 대(對)중국 접근에서 같은 의견 수렴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이크 설리번은 앞의 연설에서 새로운 통상질서인 ‘혁신적인 국제경제 파트너십’은 기존의 통상질서가 충분히 다루지 못한 핵심 도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밝혔다. 여기서 말하는 핵심 도전이란 관세 인하와 시장 접근성의 개선에 초점을 맞췄던 1990년대와는 다른, 앞으로의 새로운 통상 이슈를 의미한다. 즉 공급망 다변화와 안정화, 에너지 전환과 지속가능 성장을 위한 투자, 좋은 일자리 창출, 디지털 인프라 개방성과 안전, 다국적 기업의 조세, 노동 및 환경 규범, 부패 방지 등 관세 문제를 훨씬 넘어서는 새로운 도전에 초점을 맞추는 새로운 국제경제 파트너십이 필요하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IPEF도 이러한 신통상 이슈를 다루기 위한 새로운 접근법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협상 이후 정책 공조와 협력을 위한 조직과 인력 정비 및 확충

공급망 협상 결과는 공급망 위기 시 정부 간 공조, 공급망 다변화와 안정화를 위한 공동 노력, 공급망 분야 노동 환경 개선 협력을 주요 내용으로 포함하고 있다.
IPEF는 기존 무역협정에서 품목별 관세 인하나 시장 접근성 개선 조치가 국내 정책으로 실행되는 절차와는 매우 다르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분야별 정책 공조와 협력을 위해서는 보다 많은 행정 자원이 투입되어야 한다. 특히 공급망 협정의 분야별로 거버넌스 체계가 만들어져야 한다. 이러한 방식의 협력은 민간부문으로부터의 많은 정보의 투입이 필요할 뿐 아니라 이행을 위해서도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민관 협력이 더욱 강화되어야 하며 협상 이후의 이행에 필요한 행정, 인력자원의 확충과 긴밀한 민관 협력의 틀을 준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IPEF가 미국 주도의 새로운 통상전략이며,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경제적 주도권을 재편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목표 설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떠한 방식으로 재편하려고 하는가다. 디지털, 그린, 바이오 기술 및 산업혁명으로 세계경제와 산업 지형이 근본적으로 전환되는 시기에 새로운 통상 이슈에 대한 규범을 누가, 어떻게 만드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기존의 통상 체제인 WTO가 새로운 통상 이슈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WTO의 개혁을 통해서든 별도의 통상질서를 통해서든 새로운 통상 규범을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봐야 한다. 인도·태평양 지역의 IPEF, 미-EU 무역기술위원회(TTC) 등 양자 및 다자 간 이니셔티브는 신통상 분야의 표준을 선점하기 위한 경쟁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또 기존 WTO 다자체제를 완전히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도 주의해야 한다. WTO가 1995년 출범한 이후 관세 인하나 개방 확대 등 추가적인 성과가 없다는 비판을 비롯하여 WTO의 대법원에 해당하는 상소 기구의 기능 정지에 따른 무용론에 이르기까지 많은 비판이 있지만, 여전히 세계 무역의 제도적 백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IPEF는 소수의 국가를 중심으로 WTO가 충분히 다루지 못한 특정 분야로 한정된 협정이기 때문에 WTO를 완전히 대체하는 것도 목적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새로운 이슈의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WTO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낮아지고 통상정책의 중심이 IPEF 등 새로운 통상질서로 옮아갈 것은 분명하다. WTO 자체도 내외부로부터 개혁의 압력을 받고 있고 개혁을 위한 노력도 이루어지고 있어 아직까지 전 세계의 대부분 국가가 참여하는 가장 포괄적인 무역 인프라로서 기능을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 IPEF에서 다루는 복잡한 이슈들을 WTO 내 복수 국가 협정(plurilateral agreement)을 통해 다루지 않고, WTO 밖에서 미국의 이니셔티브하에 유사 입장국 중심으로 다루고 있지만, 이것이 서로 대체관계가 아니라는 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대중국 경제와는 성격이 다른 이슈들이다. 무역과 국제 분업이 확대되어 경제성장을 촉진하고, 기후위기와 사회적 불평등을 완화하여 성장의 지속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공공재적 성격을 갖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IPEF가 14개 국가로 이루어진 클럽형 질서로 출발하지만, 타국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만든 새로운 규범이 점차 타국으로 확산되는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국제통상질서의 새로운 시발점이 되는 IPEF에 참여하면서, 조건을 충족하면 원하는 국가가 참여할 수 있는 개방성을 확대할 수 있도록 만드는 노력을 강화해야 한다.

IPEF는 기존 무역협정에서 품목별
관세 인하나 시장 접근성 개선 조치를
국내 정책으로 실행하는 절차와는
매우 다르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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