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국빈 방문 중인 2023년 12월 12일(이하 현지시각) 세계 1위 반도체 노광장비 기업인 ASML을 찾은 윤석열 대통령은 빌럼 알렉산더르 국왕과 함께 웨이퍼에 서명을 했다. 양국 간 반도체 동맹을 기념하는 의미를 공동 서명에 담은 것이다. 삼성전자와 ASML은 1조원을 공동 투자하여 극자외선(EUV) 기반 차세대 반도체 제조기술 연구 시설을 한국에 짓기로 했다.
이에 앞서 2023년 11월 20~24일 영국 국빈 방문 시 윤 대통령은 리시 수낵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 간 자유무역협정(FTA) 개선 협상을 개시하기로 했다. 같은 달 사우디아라비아·카타르 순방에서는 총 202억달러(약 27조2300억원) 규모의 투자를 유치했다. 윤 대통령은 2023년 4월 12년 만의 미국 국빈 방문에서 59억달러(약 7조8000억원)가량 첨단 기술 투자를 유치했다. 6월 베트남, 7월 폴란드 등 1년 사이 일곱 차례 국빈 방문을 통해 공급망 협력을 강화했다.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을 자처한 윤 대통령의 경제외교 행보는 산업통상자원부를 필두로 신통상 질서에 대응하는 우리 정부의 적극적인 대응을 보여준다.
윤석열 대통령이 경제외교 최전선에 선 것은 글로벌 공급망 재편 등 통상 질서 급변 때문이다. 2018년 미국의 고관세 부과로 시작된 미·중 갈등이 심화하고,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제 조업 생산 기반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미국, 유럽 주요국에서 리쇼어링(reshoring·생산 기지 본국 회귀), 니어쇼어링(nearshoring·생산 기지 인접국 이전) 등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후 세계 곳곳에서 지정학적 위기가 고조되면서 공급망을 안보 관점에서 재구축하는 움직임도 본격화하고 있다.
자유주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우방국끼리 원자재·소재·부품 공급망을 공유하는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을 구축하는 움직임도 강해지고 있는 것이다. 미국 내에서 생산하는 전기차 와 배터리 등에 세액공제 형태의 보조금을 지급하는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미국 내 반도체 생산 시설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반도체칩과 과학법(칩스법) 등이 대표적이다.
국내외 전문가들은 경제외교 최전선에서 윤 대통령이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이 통상 이익 극대화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평가한다. 윤 대통령은
2023년 4월 미국 국빈 방문 당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한미 동맹을 첨단 기술 동맹으로 확대하기로 하고 IRA와 칩스법에서 한국 기업의 부담과 불확실성을 줄여가는 방향에 합의했다. 이 합의는 IRA 보조금 요건 시행 규칙에 미국과 FTA를 맺은 나라에서 만든 배터리 완제품, 부품 등이 포함
되도록 한 조치로 이어졌다. 중국산 원자재로 우리나라에서 가공한 이차전지도 보조금 지급 대상에 포함됐다. 우리나라 배터리 업체의 IRA 보조금은 2025년 9조8900억원, 2026년 20조원으로 전망된다. 미국 IRA 사례는 유럽 등의 다른 우방국에도 영향을 줄 가능성이 크다.
영국, 유럽연합(EU), 인도 등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83%를 차지하는 나라들과 FTA를 맺고 있는 우리나라의 통상 이익에 긍정적인 영향이 될 전망이다. 2023년 10월 미국 정부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 내 반도체 공장에 대한 미국산 반도체 장비 반입 규제를 사실상 무기한 유예하기로 한 것도 우리 정부의 경제외교 성과로 꼽힌다. 새로운 통상 질서 재편에 대한 능동적인 대응은 중국에 편중된 수출 구조 다변화로 나타나고 있다. 대(對)중국 수출 감소에도 불구하고 미국, EU에 대한 수출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26%까지 치솟았던 대중 수출 비중은 19%까지 줄어든 반면 대미국·EU 수출 비중은 30% 수준으로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