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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FTA

역사로 보는 통상 이야기

남궁민·안은진 주연 드라마 ‘연인’으로 엿본 조선 시대 교역사

병자호란은 무역 불균형에서 시작됐다
2023년 여름·가을 주말 밤 드라마 폐인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드라마 ‘연인’은 ‘삼전도의 치욕’으로
역사에 기록된 병자호란(1637년) 전후의 이야기다. 역관 이장현(남궁민분)과 양반집 요조숙녀 유길채(안은진분)의 로맨스가 펼쳐지지만,
전쟁에서 패배한 나라 백성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는지를 담담하게 보여준다.
정원석 조선비즈 기자


드라마 ‘연인’ 포스터. MBC

드라마 14회에 병자호란이 일어난 배경을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 나온다.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의 역관이 된 이장현은 청나라 장수 용골대와 함께 명나라 출신 투항 장수인 경중명을 만난다. 명나라 정벌을 나선 홍타이지 황제를 위해 군량미 조달 명령을 받은 소현세자를 위해서다. 군량미 조달 날짜를 맞추기 어려워진 소현세자는 이장현의 꾀로 심양에 있는 경중명 집 곳간에 있는 쌀로 군량미를 대고 조선 의주에서 올라오는 햅쌀로 빈 곳간을 채워주기로 했다. “곳간 쌀을 황제에게 바쳐서 ‘명나라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묵은쌀을 햅쌀로 바꾸는 실리를취하시라”는 이장현의 한마디가 경중명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 장면은 병자호란의 본질을 보여준다.

명·청 교체기에 균형 외교를 펼친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 서인 정권의 사대 외교가 청나라의 침략을 유발했다는 통념과 달리, 병자호란은 무역 갈등에서 촉발된 전쟁이었다는 연구 결과가 최근 많이 나오고 있다. 예일대 역사학 교수인 피터 퍼듀에 따르면, 청나라의 첫 번째 조선 침략인 정묘호란이 일어난 1627년 무렵 당시 후금(청나라로 국호를 변경하기 전)은 만성적인 식량난을 겪었다. 농사짓기 척박한 땅인 만주가 본거지인 후금은 명나라 정벌을 위한 대규모 군량미 조달에 어려움을 겪었다.

승승장구하던 누르하치의 후금 군대가 1626년 영원 성 전투에서 명나라 원숭환에게 패배한 것은 식량이 제때 공급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627년의 식량 위기는 가장 격심했는데, 곡물값이 만주 신(1.8석)당 여덟 냥, 즉 1623년의 여덟 배로 올랐고, 사람을 잡아먹고 강도질을 한다는 흉문이 돌았다. 1635년과 1637년에 또 식량 위기가 닥쳤다. 군대의 보급 부족은 만주의 군사력을 심각하게 약화시켰다. 말은 너무 지치고 약해져 적을 추격하지 못했다(피터 퍼듀, 중국의 서진).”정묘호란 후 조선과 ‘형제간 맹약’을 맺은 후금은 중강(中江)과 회령(會寧)에 무역 시장을 열도록 했다.

식량과 물자를 조선을 통해 공급받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후금은 조선 측에 실제 가격보다 턱없이 낮은 수준에 식량을 팔 것을 요구했다. 후금 측의 불공정한 거래 요구는 양국 간 실제 개시(開市) 과정에서 정상적인 무역을 통한 물자 공급을 어렵게 했다.

만주의 식량난은 개선되지 못했다. 조선과의 지지부진한 무역에 불만을 느낀 후금 조정은 1631년 충분한 소와 말을 보내지 않는다면 침략하겠다고 협박했고, 황금·백금 1만 냥, 전투용 말 3000필 등으로 조공 요구 수준을 높였다. 1636년 후금의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바꾸고 홍타이지에게 ‘숭덕제(崇德帝)’라는 황제 칭호를 쓰기로 하면서 청나라는 조선에 정묘호란 때 맺은 ‘형제간 맹약’을 ‘군신(君臣)의 의(義)’로 바꿀 것을 요구했다. 조선에서는 사대부들의 반발 여론이 격앙됐고, 칭제건원을 통보하는 청나라 사신들의 목숨을 위협하기도 했다. 조선의 방자함을 꾸짖겠다면서 1637년 1월 3일 일어난 병자호란은 같은 해 2월 24일까지 57일간 이어졌다. 조선 왕 인조가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찧는 항복 선언)’ 치욕을 감수하면서 끝을 맺었다.


후금 측의 불공정한 거래 요구는 양국 간의 실제 개시(開市) 과정에서
정상적인 무역을 통한 물자 공급을 어렵게 했다.





드라마 '연인' 화면 캡쳐


1636년 후금의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바꾸고 홍타이지에게 ‘숭덕제(崇德帝)’라는 황제 칭호를 쓰기로 하면서 청나라는 조선에 정묘호란 때 맺은 ‘형제간 맹약’을 ‘군신(君臣)의 의(義)’로 바꿀 것을 요구했다. 조선에서는 사대부들의 반발 여론이 격앙됐고, 칭제건원을 통보하는 청나라 사신들의 목숨을 위협하기도 했다. 조선의 방자함을 꾸짖겠다면서 1637년 1월 3일 일어난 병자호란은 같은 해 2월 24일까지 57일간 이어졌다.

조선 왕 인조가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찧는 항복 선언)’ 치욕을 감수하면서 끝을 맺었다. 조선 도성인 한양에서 납치된 유길채는 청나라 수도 심양에서 ‘도망간 포로’ 신세가 돼 온갖 고초를 겪었다. 약 50만 명 이상 조선 백성이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갔다는 문헌도 있다.병자호란 전인 1600년대 1170만 명이었던 조선 인구는 전쟁 후인 1650년대에는 1090만 명 수준으로 줄었다. ‘호혜와 평등’이라는 분업 질서에 따른 국제 교역이 활발했다면 이런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까. 낯선 심양 땅에서 조선의 앞선 농사 기술로 풍작의 기쁨을 나누는 조선인 포로들을 그린 장면을 보면서 떠올려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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