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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호VOL.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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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섭사 속 그날

조선에서 온 카펫, 조선철

일본 교토의 기온 지역에서 1100년 넘게 이어져온 축제 기온마쓰리에서 수레 장식품으로 사용하는 조선철(朝鮮綴)은 짐승의 털로 문양을 짜 맞춘 묵직한 직물을 지칭하는 것으로 조선에서 제작했다. 조선철은 어떤 경로로 일본에 전파됐으며, 실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당시 상황을 살펴보자.

  김현경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자료  <조선철을 아시나요> 경기여고 경운박물관, 2016년


조선 통신사, 일본에 건너가다

한국과 일본의 외교적 교류는 통신사를 파견하기 이전 고려 시대부터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통신사가 아닌 회례사(回禮使), 보빙사(報聘使), 경차관(敬差官) 등의 명칭을 사용했다. 본격적으로 일본에 특사를 보내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공을 탐지할 목적으로 파견됐다. 이후에는 점점 문화적 교류로 성격이 변해 선진 문물의 전달 창구로서 조선 통신사의 역할이 강화됐다. 통신사는 일본에서 국빈 대접을 받았고, 일본의 문인과 귀족뿐 아니라 민중 문화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이들은 춤·미술·공예 등 다양한 문화 예술 부분에 영향을 미쳤는데, 일본 화가가 통신사의 행렬이나 활동을 병풍이나 판화로 남긴 것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조선 통신사는 선진 문물은 물론 외교적 선물을 전달하기도 했는데, 기록을 살펴보면 왕이 일본에 화석(花席)이나 채화석(彩花蓆)을 선물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화석은 꽃무늬를 놓아서 짠 돗자리로, 에도시대의 국서와 별폭(別幅)을 통해 매회 20장씩 총 240장의 화석이나 채화석을 통신사가 일본에 전달했음을 알 수 있다. <한국고전용어사전>에는 세종 11년에 화석을 중국에 보내거나 국가에서 사용하는 것 이외에는 금지했다는 설명이 있다. 이처럼 현재 한국에는 화석이나 조선철과 같은 유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제작하는 이도, 사용하거나 알고 있는 이도 매우 적은 특산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조선철은 대부분 일본에 소장되어 있어 국내용이 아닌 수출용으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어떤 형태로 제작되었는지 살펴보자.

모직물 겉옷   18~19세기, 어깨폭 54cm, 길이 87cm, 소매폭 66cm, 요시다 고지로 소장.  
사진 제공   경기여고 경인박물관

오학병화도    19세기, 117×327cm, 경운박물관 소장.   
사진 제공   경기여고 경인박물관


조선철에 매료되다

한반도에서도 일찍부터 동물의 털을 사용해 만든 카펫을 제작했다. 주로 산양이나 양의 털을 사용했으며, 안료를 써서 선이나 그림을 그려 넣었다. 한국에서는 온돌 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카펫 생산이 쇠퇴했으며, 주로 중국과 일본의 수출용으로 제작한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전해지는 조선철을 살펴보면 화려한 색채가 돋보이는데, 주요 문양으로는 사자, 오학, 봉황, 모란, 까치, 호랑이, 중국 고사 등이 있으며 뒷면에 묵서명(墨書銘)을 한 것도 보인다. 특히 18~19세기 조선의 청화백자에도 사용한 능화문과 나비 문양을 장식했다는 점에서 당시 조선의 다른 공예품과도 문양의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철이 일본에 전해지면서 교토의 마치슈(町衆), 즉 부유한 상공업자들은 그 매력에 흠뻑 빠져버렸다. 이들은 조선철을 자택의 실내장식으로 사용하기도 했으며 제사에 사용하는 가마를 덮는 용도로 쓰기도 했다. 또 무사들은 조선철로 옷을 지어 입거나 벽에 걸어 그림으로 감상하기도 했다.
조선 통신사를 통해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철은 현재 일본의 유산으로 보존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주거 문화의 변화로 쇠퇴해 사라졌지만, 통상 과정에서 오래전 건너간 우리의 것이 다른 나라에 살고 있다. 그 덕에 우리는 잊힌 선조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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