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업은 결혼과 닮았다. 상호 신뢰 관계 속에 미래를 약속하는 공동운명체이자, 경제적 이익을 공유하는 사이이기 때문이다. 둘 사이 관계가 수평적이고 같은 목적을 지향한다면 한없이 조화롭지만, 어느 한쪽으로 무게추가 기울면 파경에 이르고 만다. 이 때문에 연애든 사업 파트너십 구축이든 디딤돌을 놓듯 신중하게 서로의 의중을 파악해가며 신뢰를 쌓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이하 사우디)의 비즈니스 관계를 결혼과 비유하면 이제 막 맞선을 끝낸 상태다.
글 김유경 중앙선데이·이코노미스트 기자
경제협력 확대 위한 MOU 체결
무함마드 압둘라 빈 살만 빈 압둘 아지즈 알 사우드(이하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국 왕세자 겸 부총리가 지난 6월 26일 한국을 방문, 문재인 대통령과 국내 5대 기업 총수를 만나 최근 글로벌 경제 현안에 대해 논의했다. 같은 날 서울 서대문구 그랜드힐튼 호텔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 컬처위크’(Bridges to Seoul) 행사가 열렸고, 영부인 김정숙 여사가 참석했다. 사우디아라비아 투자청(SAGIA)은 이날 한국 기업 10곳과 경제협력 확대를 위한 양해각서(MOU) 등을 체결하고 2020년 한국사무소를 개설하기로 했다.
이브라힘 알 오마르 SAGIA 청장은 “한국 기업은 자본이 풍부한 사우디에 진출할 수 있고, 사우디는 한국 기업의 전문 기술을 전수하고 투자 유치를 할 수 있다”라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MOU에는 금융과 미디어·제조·석유화학·재생에너지 분야를 비롯해 한국 기업이 사우디에 사업체 설립을 허가하는 신규 라이선스 발행을 담았다. MOU는 법적 구속력 없는 상호 약속일 뿐이지만, 사우디는 한국의 기술과 경험, 콘텐츠, 인프라 등을 탐낸다고 명확히 드러낸 셈이다.
중동인들은 상대방이 가진 도자기·낙타 등을 칭찬하면 갖고 싶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세 번 칭찬하면 줘야 하는 것이 아랍인의 룰이다. 사우디는 원했고, 한국은 이에 응했다. 둘은 이제 웨딩 로드를 향해 걷기 시작하게 됐다.
한국 기술·경험·콘텐츠·인프라와 협력 희망
세계 최대 산유국으로서 아쉬울 것 없어 보이는 사우디가 한국에 러브콜을 보내는 이유는 글로벌 에너지 믹스의 변화 때문이다. 석유 의존 경제 체제에서 벗어나,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를 잇던 아라비아 상인의 모습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금융과 정보기술(IT) 인프라, 사물인터넷, 신재생에너지 등으로 경제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 ‘비전 2030’이란 구체적 실천 계획도 세웠다.
사우디로서는 한국을 롤모델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자동차·조선·철강·정유·석유화학 등 중후장대 산업, 반도체·디스플레이·스마트폰·가전제품 등 전자 산업, 인터넷·무선전화 등 통신 인프라 산업, 게임·영화·K팝 등 한류 콘텐트 산업…. 한국처럼 산업 포트폴리오가 다양하고 산업별로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나라는 드물다.
사우디가 최첨단 인프라를 갖춘 중계무역국으로의 체질 개선에 나설 만큼 석유 패권 시대 종식에 대한 중동 산유국의 불안감은 크다. 20세기 후반 세계경제의 가장 핵심적 중심축은 달러와 원유였다. 금융 부문에서는 미 달러화가, 실물 부문에서는 원유가 세계경제를 좌지우지했다. 1970년대 제1·2차 오일쇼크와 브레튼우즈 체제 와해로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달러와 원유는 미국과 사우디의 관계처럼 상호 의존했다.
‘석유 시대’의 종언, 중동 패권국 사우디의 불안감
그러나 원유 패권이 붕괴되기 시작하며 변화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미국이 독점 발행하는 달러와 달리 원유는 미국·러시아 등 생산국이 많다. 셰일 혁명을 일으킨 미국은 사우디를 제치고 세계 1위 원유 생산국이 됐다.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감산 조치로도 원유 가격이 오르지 않는 상황이다. 그간 사우디가 주도하는 OPEC이 원유 생산의 카르텔을 형성해왔는데, 올해 초 카타르가 탈퇴하는 등 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또 세계적으로 환경의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신재생에너지 수요는 커진 데 비해, 원유 사용은 죄악시되고 있다. 석유를 매개로 얽힌 중동의 정치·경제·산업·사회·문화에 변화가 일어날 전망이다. 사우디의 역내 정치·외교적 패권도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뜻이다.
사우디는 글로벌 자금과 기술의 허브로 도약함으로써 역내 패권을 지키려는 모습이다. 스마트 시티 ‘네옴(NEOM)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아카바만·홍해 사이의 좁은 협로에 짓는 네옴의 프로젝트 규모는 5,000억 달러(약 600조 원)에 달한다. 사우디의 ‘비전 2030’ 전체 프로젝트 8,200억 달러(약 1,000조 원)의 절반 넘게 차지한다.
네옴은 실리콘밸리와 같은 기술 혁신 도시이자 두바이·홍콩 같은 유통 및 금융 허브를 지향하고 있다. 사우디는 자본력은 풍부하지만 대규모 도시 개발 프로젝트 경험이 적고 기술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세계인이 주목하는 스마트 시티를 지으려면 토목·건설·수도·에너지·교통·환경·통신·디자인 등 여러 요소를 복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여러 분야별로 입체적·유기적 관리가 필요한데, 사우디는 경험이 부족하다. 사우디는 자국의 풍부한 자본에 뛰어난 IT 기술과 풍부한 토목·건설 및 운용·관리 능력을 갖춘 나라의 인프라를 접목할 생각이다. 단기간에 대규모 도시 개발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나라는 한국과 중국·일본 정도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6월 26일 청와대에서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겸 부총리를 만나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 제공: 연합뉴스
‘네옴’에 600조 투자, 역내 패권 지키고 거점화 전략
다만 사우디로서는 유라시아 대륙의 패권국을 자처하는 중국이나, 외교적·군사적으로 미국과 밀접하게 연관된 일본에 프로젝트의 전권을 맡기기엔 부담스러운 입장이다. 이에 한국을 중요한 비즈니스 파트너로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네옴 프로젝트는 사우디의 외교적·안보적 이익을 위한 목적도 있다. 네옴은 이집트와 요르단·이스라엘·수단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지리적으로 위험할 수도 있는 곳에 대규모 스마트 시티 프로젝트를 진행하면 글로벌 자본과 물류, 사람의 이동을 자유롭게 함으로써 근린국의 압력을 해소하고 전략적 우위를 점할 수 있다.
이 프로젝트를 중국에 일임하면 미국의 견제가, 일본에 맡기면 요르단·팔레스타인 등 사우디와 관계가 좋지 않은 나라들의 도전을 부를 수 있다. 여기에 중국의 21세기 해상 실크로드의 종착지가 홍해로 이어진다는 점에서도 네옴 프로젝트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빈 살만 왕세자는 올 2월 중국과 35개 경제협약을 맺고 280억 달러(약 34조 원) 규모의 합작 투자를 진행하기로 했다. 21세기 해상 실크로드의 동선에 있는 인도·파키스탄과도 대규모 투자를 집행하기로 했다.
이 밖에도 홍해 관광 개발 사업, 키디야 엔터테인먼트 시티 사업, 메카의 관광단지화, 메디컬 단지 구축 등 14개 프로젝트를 함께 추진하고 있다. 이런 프로젝트들을 성사시키기 위한 ‘핫’한 기술도 함께 도입된다. 미국에서 좌절된 초고속열차 하이퍼루프와 인공 강우, 안면인식, 유전자 수정 프로젝트, 로봇 하인, 비행기 택시, 드론이나 홀로그램을 사용한 인공 달 등이 대표적이다.
FI에서 SI로 능동적 프로젝트 추진, 해외 투자 유치도
이런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사우디가 과거와 크게 달라진 점은 단순 재무적투자자(FI)에 머무르지 않고, 전략적투자자(SI)로서 나서고 있다는 점이다. 프로젝트를 능동적으로 구성하는 한편, 간섭과 개입을 적극적으로 벌이고 있다.
이는 2000년대 투자 실패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이슬람 율법은 이자를 금지하고 있어 그간 사우디 등 중동 산유국들은 해외 기업에 돈을 빌려주는 대신 지분 투자에 나섰다. 그러나 중국 등 신흥국 투자에서 적지 않은 실패를 경험했다. 또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조성한 비전펀드에도 사우디 국부펀드(PIF)·아부다비 무바달라투자공사 등을 통해 FI로서 600억 달러를 투자한 바 있는데, 이와 관련해 내부적 논란이 적지 않았다. 손 회장이 소프트뱅크가 보유하고 있던 위워크·센스타임그룹 등 일부 회사를 비전펀드가 고평가 매입하면서다. 사우디 경제계는 반발했지만, 펀드 주도권은 손 회장이 쥐고 있었다.
사우디로서는 이런 경험들이 누적되며 주체적으로 투자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자기 주도로 사업을 구축하는 한편 한국·중국·일본 등의 굵직한 대기업을 프로젝트에 합류시키고 있다. 또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기업 및 국가의 투자를 이끌어내고 있다. 이들을 단지 용역을 받고 사업을 수행하는 하청 기업이 아닌 투자사로 끌어들임으로써 사업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석유 거버넌스 탈피 여부에 성패 달려
사우디가 네옴 등 신경제 프로젝트를 공격적으로 진행 중이지만 꼭 성공으로 이어지리란 보장은 없다. 석유에 의존하는 기존 경제 질서를 대체할 수 있을 것이냐는 의문에서다. 실제 1990년대 후반 아랍에미리트(UAE)의 신도시 건설 프로젝트에서 많은 사람의 예상과 달리 아부다비를 제치고 두바이가 핵심 거점 도시로 성장했다. 중계무역을 통해 이윤을 만들어온 두바이가 중동 경제의 핵심으로 성장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우디도 네옴 등 신경제 질서를 무게감 있게 추진하려면 석유 의존적 경제 체제를 지키려는 기득권의 반발과 저항을 잠재워야 한다. 수소 등 한국의 신에너지 기술이 사우디에 자리 잡는 데 만만찮은 저항이 있을 수 있다. 최근 기업공개(IPO)를 재추진 중인 사우디 아람코가 지난해 IPO를 포기한 것도 권위가 흔들릴 수 있다는 왕가 안팎의 반발 때문이었다.
또 여전히 두바이에 세계적 기업과 자금이 몰리고 있고, 쿠웨이트도 스마트 시티 압둘라 프로젝트를 가동하고 있다는 점도 사우디에는 부담으로 작용한다. 주변 여건은 녹록지 않지만, 사우디가 빈 살만 왕세자를 중심으로 공격적인 경제개혁에 나서고 있다는 점은 한국에는 고무적인 일이다. 대다수 프로젝트를 외주에 맡기던 것과는 달리 직접 발로 뛰고 있어 한국으로서는 미국·중국 등 강대국의 손을 거치지 않고도 일대일 협상이 가능해 보인다. 사우디 현지에서 중국·일본 등과 경쟁해 한국의 프로젝트 경쟁력을 입증한다면 앞으로 중동 사업에서 비교 우위를 점할 수 있다. 한국은 사우디를 단지 물건을 구매할 시장으로 취급해선 안 되며, 공동 기술 개발 및 프로젝트 구축 등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중·장기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한국의 기술 스타트업을 대거 진출시켜 한·사우디가 함께 투자해 성과를 동등하게 나누는 것도 방법이다. 변화의 시점에는 기회 역시 크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