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기는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변화하는 시기였다. 중국 서진이 몰락하면서 중원왕조 중심의 국제질서가 무너지고, 동북아시아의 여러 국가와 종족 집단의 정치적 영향력이 점차 확대되어갔다. 고구려 역시 이런 혼돈의 시기에 강력한 국가로 발전하고자 했다. 그들이 해상을 장악하며 영토를 확장하던 시기를 살펴보자.
글 김현경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고구려 안악3호분 고분 벽화 ‘행렬도’ 사진 제공: 동북아역사재단
영토 확장에 힘쓰다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고구려의 왕은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다. 이는 학교 교과서에서도 배웠듯이 고구려가 최전성기를 이루며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하던 시기다.
광개토대왕이 즉위할 당시 고구려는 위기 상황이었다. 연나라와 거란이 자주 고구려와 전쟁을 벌였고, 남쪽의 강성해진 백제가 틈틈이 공격해온 것. 여기에 흉년까지 겹치며 극심한 경제난에 빠졌다. 그러나 광개토대왕은 이를 수습하는 일에만 몰두하지 않았다. 그는 전쟁을 감행하며 영토 확장에 가장 신경을 많이 썼다. 즉위 첫해 요서와 동몽골 사이의 거란을 정벌했으며, 백제 함대가 포진한 강화도를 정벌함으로써 백제의 위협을 막아냈다.
군사적 성공을 거둔 광개토대왕에 이어 장수왕은 영토 확장뿐 아니라 주변 국가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일에 관심을 쏟았다. 기록에는 장수왕 시대 군사용 말 800필이 압록강 하구에서 출발해 무려 1,200km 이상 항해한 끝에 중국 상해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는 필히 장수왕이 중국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조공을 받친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은 내륙의 영토를 확장하고, 자신들이 확보한 항구도시들을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한반도에 고립된 채 나라를 운영하지 않고 바다로 나가 교류한 것으로 보인다.
바다 건너 교류하다
고구려는 선박 기술을 익혀 점차 대륙과 해양을 잇는 해륙 교통망을 완성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주변 여러 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으려 했다. 아쉽게도 현재 우리는 고구려의 유물이나 유적에 쉽게 접근할 수 없어 활발한 발굴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기록을 통해 고구려의 선박 기술을 유추해볼 수 있다.
고구려와 수나라, 당나라 사이에는 역사적으로 70여 년에 걸친 해륙 양면전이 벌어진 바 있다. 수나라에서는 25대 평원왕~26대 영양왕때 무려 800명의 전사가 탈 수 있는 오아(五牙)라는 배가 동원되었음에도 고구려가 승리를 거두었다. 또 일본 <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동해를 건너간 고구려의 배에는 50~100명이 승선할 수 있었다. 즉 고구려의 선박 역시 규모 면에서 결코 작지 않은 배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선박의 항로를 살펴보면, 중국 화북으로 갈 때는 평양성 부두를 출발해 대동강을 빠져나간 다음 백령도를 경유해 산둥반도에 도착했다. 남방으로 갈 때는 황해를 길게 가로질러 상해만을 통과한 후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일본으로는 남해 동부 항로를 이용하기도 했으며, 동해 북부 항로를 이용하기도 했다.
내륙으로 많은 영토를 확보하고 있던 고구려는 끊임없이 바다를 통해 이웃 국가와 교류하며 자신들의 위상을 널리 알릴 수 있었다. 그들의 도전 정신과 패기 또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