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소재·부품·장비 산업은 후발주자의 이익에 기초한 대량생산 및 국제 분업 체계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며 성장해왔다.
그러나 범용 중심의 제품 구조는 중국 추격의 빌미를 제공, 부품·조립 위주 산업 구조는 핵심 소재·부품·장비의 해외 의존도를 높였다.
따라서 우리나라 산업의 부가가치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소재·부품·장비 산업의 구조적 취약성을 극복해야 한다.
글 이준 산업연구원(KIET) 소재산업실장
수출 규제에서 드러난 일본의 속셈
지난 7월 4일 일본 정부는 에칭가스(불화수소), 포토레지스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의 세 품목에 대한 대(對)한국 수출 규제를 전격 단행했다. 이로부터 약 한 달 뒤 수출 허가 간소화 대상국을 의미하는 화이트리스트에서도 우리나라를 배제함으로써 한국으로 향하는 전략 물품의 수출 통제 조치를 대폭 강화했다. 일본이 수출을 규제한 전략 물품 목록에는 우리의 주력 산업인 반도체, 디스플레이, 이차전지, 자동차, 기계 등의 생산에 필요한 첨단 소재·부품 및 장비 등이 대거 포함되었다.
이번 일본의 수출 규제는 높은 기술개발 리스크에 비해 산업화에 따른 잠재 수익이 상대적으로 적어 그간 우리가 쉽사리 진출하지 못하던 첨단 품목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가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IT 산업의 글로벌 가치사슬(이하 GVC)에서 일본이 강점을 지닌 소재·부품·장비는 공급망의 가장 후방에 위치한다. 생산액 면에서 보면 가치사슬 내 비중은 크게 높지 않은 분야다. 하지만 일본의 독점력으로 무장한 첨단 소재·부품·장비는 전방 가치사슬의 전 영역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특히 우리가 경쟁력을 갖춘 부품에서 최종재로 이어지는 공급망의 안정성에 결정적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1 이번 조치는 1970년대 공업화 이후 지속되어온 우리나라의 속칭 ‘가마우지형’ 산업·교역 구조의 취약점을 예리하게 공격하면서 우리가 현재 우위를 점하고 있는 GVC 체제를 교란시킴으로써 자국의 첨단 소재·부품·장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GVC 체계로 재편하려는 일본의 의중을 드러낸 일종의 전환기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제조 선진국이 첨단 소·부·장 산업을 강화하는 이유
소재·부품·장비(이하 소·부·장)는 최종 제품의 완성도와 부가가치 수준을 좌우하는 제조업의 핵심 근간으로, 한마디로 제조업 혁신의 출발점이다. 최근 중국, 인도, 아세안 등 신흥 제조국의 성장과 함께 최종재 조립 공정 수준이 세계적으로 상향 평준화되면서 제조 경쟁력의 원천이 소·부·장으로 옮겨가고 있으며, 첨단 소·부·장 기업의 가치사슬 내 영향력이 강화되고 있는 추세다. 이에 따라 독일, 일본 등 주요 제조 선진국은 조립 산업에서 첨단 소·부·장 산업을 중심으로 산업구조를 강화하고 있다.
고부가가치의 특성을 지닌 첨단 소·부·장은 시장 실패(Market Failure)가 발생하는 대표적인 분야로, 장기간의 연구와 막대한 초기 투자 비용이 소요됨에도 성공 가능성이 낮아 초기 단계에서 정부의 적극적 역할과 지원이 필요한 분야다. 반면 산업 파급 효과는 매우 크다. 첨단 소·부·장 산업의 확보는 가치사슬 경쟁력을 상승시키고, 기술 축적 효과를 내부화함으로써 기술 분야에서 선도적 지위를 유지하는 데 기여하며, 최종 수요 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핵심적 역할을 한다. 미국, 일본, 독일, 중국 등 제조 선진국이 첨단 중간재 부문에 국가적 역량을 집중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2
글로벌 5위 수준의 소·부·장 산업 실상은 더딘 질적 성장
첨단 중간재 산업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인식한 우리나라 역시 국가 차원에서 정책적 지원을 강화해왔다. ‘부품·소재 전문 기업 등의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된 2001년 이후, 우리 소·부·장 산업은 강력한 수입 대체 및 수출 산업화 전략에 힘입어 우리 경제의 주력으로 성장했다. 2001년 이후 약 5조4,000억 원 규모의 R&D 투자를 진행했으며, 이 기간 소·부·장을 자급화하기 위한 기술을 확보하고 실증 테스트베드 및 신뢰성 인증 센터 설립 등 제반 인프라를 구축하면서 제조업 하부구조를 건실하게 만들기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3 그뿐 아니라 소·부·장 기업의 전문화·대형화 등 우리 소·부·장 산업이 안고 있는 해묵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을 집중적으로 추진했다. 이러한 민관의 노력에 힘입어 2001년 약 240조 원 수준이던 소·부·장 산업의 생산 규모는 2017년 786조 원 규모로 3배 이상 성장했으며, 제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2001년 43.7%에서 2017년 51.8%로 크게 확대되었다. 수출은 더욱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2001년 646억 달러 규모로 전 산업의 42.9%를 차지하던 소·부·장 수출은 2018년 3,409억 달러로 5배 이상 증가했으며, 전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56.4%로 크게 확대되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8억6,000 달러의 소·부·장 적자국에서 1,376억 달러의 엄청난 흑자국으로 변모했고, 어느덧 글로벌 5위 수준의 소·부·장 강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눈부신 양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질적 성장은 여전히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우리 소·부·장 산업은 후발 주자의 이익에 기초한 대량생산 체계와 국제 분업 체계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면서 범용 제품, 부품 및 수출 대기업을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해왔다. 그러나 범용 제품 중심의 제품 구조는 중국의 추격을 허용하는 빌미를 제공했으며, 부품·조립 산업 위주의 산업구조는 핵심 소재·장비에 대한 높은 해외 의존도를 야기하는 원인이 되었다.4 핵심 중간재에 대한 높은 해외 의존도는 우리 제조업의 낮은 부가가치율과 수출이 증가할수록 수입이 높아지는 성장 딜레마의 주원인인데5, 상당 부분 우리 소·부·장 산업의 구조적 취약성에 기인한다.
이는 우리나라의 소·부·장 교역 구조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 소·부·장 산업의 수출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분야는 전자부품과 화합물·화학제품으로, 그 비중이 2018년을 기준으로 각각 55.1%와 45.5% 수준이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구성은 매우 상이하다. 먼저 수출 품목별로 보면 합성수지, 고무 및 플라스틱 제품, 열간압연·압출 제품, 집적회로 반도체, 액정 표시 장치, 자동차 부품 등이 주력인데, 여기서 가장 큰 특징은 부품은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을 중심으로 수출하고 있지만, 소재는 범용 제품 위주라는 점이다. 반면 수입은 비철금속, 기초 유기 유도체 및 화합물, 기타 화학제품, 반도체·디스플레이 제조 장비 등 고부가가치 소재와 장비에 집중되어 있다.
소·부·장 품목별 교역 구조의 취약성은 소·부·장에 대한 국가별 교역 구조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우리 소·부·장 교역에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국가는 중국으로 2018년 기준 수출의 33%, 수입의 28%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에 편중된 수출 구조는 중국의 중간재 자급률 제고 전략이 본격화되면서 소·부·장 전체의 수출 성장세를 둔화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반면, 무역 역조가 가장 심한 국가는 일본이다. 우리 소·부·장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일본의 비중은 4.3%에 불과한데, 수입 비중은 18.2%로 매우 높은 수준이다. 전반적으로 일본, 독일, 네덜란드 등 전통적 소재 및 기계·장비 강국과의 교역에서 수입 역조가 두드러지는 특징을 보인다.
일본과의 교역 구조는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제조업 구조의 취약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2018년 기준 대(對)일본 소·부·장 무역수지 적자 규모는 224억 달러 수준으로 전 산업에서 발생한 대일본 무역적자의 93% 수준에 육박한다. 대일본 소·부·장 무역 역조는 2010년을 정점으로 다소 감소하는 추세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며, 질적 측면에서는 오히려 우리의 의존성이 더 강고해지고 있다. 무역 역조가 가장 현저하게 나타난 분야는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등 우리 주력 산업의 생산에 반드시 필요한 핵심 소재가 집중된 화합물·화학제품 부문이다. 우리 반도체·디스플레이 수출이 늘어날수록 일본으로부터 화합물·화학제품 수입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수출 규제는 이러한 구조적 취약성이 산업 생태계 전체를 좌우할 수 있을 정도의 파급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현실화했다는데 의미가 있다. 따라서 제품과 시장 구도의 고도화와 재편 차원에서 새로운 전략을 수립해야 하는 것은 자명하다.
불확실한 무역환경 극복의 길은 결국 ‘수출 포트폴리오 재편’
최근 글로벌 무역환경은 불확실성이 확대되고 있다. 미·중 간 무역분쟁은 장기화할 것으로 예상되며, 각국의 보호무역 기조도 강화되고 있다. 글로벌 생산 거점으로서 중국의 위상이 약화된 반면, 아세안이 부상하면서 글로벌 생산 네트워크도 크게 변화하고 있다. 또한 4차 산업혁명 등 기술의 발전으로 저임금 노동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지면서 생산비용 감소에 초점을 맞춘 기존 GVC의 기본 전략도 지역화 흐름으로 바뀌는 추세다.6 이와 같은 통상 지형의 변화는 대외 개방도와 GVC 참여도가 높은 우리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다.
불확실한 무역환경에서 소·부·장 제품과 시장 고도화의 요체는 결국 포트폴리오의 다변화다. 즉 제품과 시장의 편중되고 양극화된 구조를 완화하는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첨단 품목의 자립화와 수입 대체를 통해 산업의 외형 확대와 부가가치 수준을 제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출입 판로의 다변화를 통해 안정적 공급망을 구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일본 수출 규제에 대응하는 단기적 공급 안정화 대책은 물론 공급망 리스크 완화와 경쟁력 유지·강화를 위한 혁신 전략이 뒤따라야 한다.
우선, 미래 신산업 흐름과 공급망 재편에 적극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주력 제품의 구조를 고도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 우리나라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이차전지 등 고부가가치 구조로 전환된 일부 IT 부품을 제외하고 자동차, 조선, 기계, 기초 소재 및 장비 등의 고부가가치화는 여전히 정체 상태다. 주요 수요 산업의 제품 구조 혁신은 우리 소·부·장 산업의 체력과 체질을 근본적으로 전환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예를 들어 미래차 시대가 성큼 도래한 자동차 산업의 경우 융·복합 기술 비중이 높은 전장 부품의 비중 증가, 이에 따른 지식재산권 및 기술보호주의 강화, 서비스 비중 확산 및 표준 선점 중요성 부상, 전장화와 시스템화의 부담 증가에 따른 글로벌 아웃소싱 확대 등으로 GVC의 구성과 기능이 급속히 재편되고 있다. 따라서 시장과 제품에서 경쟁 우위를 확보할 수 있는 분야에 대한 맞춤형 투자를 통해 미래차 관련 소·부·장 구조를 고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동시에 GVC 참여 범위를 확산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그간 내수 공급망에 집중해온 역량 있는 중소·중견기업의 수출 기업화를 촉진함으로써 소·부·장 시장의 영세성이나 성장성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 소·부·장 수출 초보 기업이 글로벌 공급망 연계를 통한 전문 수출기업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GP(Global Partnering) 사업과 같은 수출 지원 프로그램을 내실화해야 한다.
상호간 수혜 될 수 있도록 국가별 맞춤형 전략 필요
제품의 고도화 및 다양화에 따른 혁신은 시장 혁신을 수반해야 빛을 발할 수 있다. 전략적 자급화와 수입 대체를 통한 GVC의 재설계는 우리 소·부·장의 중국에 대한 교역 의존도, 고질적 대일 무역 역조를 해소하는 길이기도 하다. 미국, 일본, 중국 등에 집중된 소·부·장 시장 구조의 완화는 곧 새로운 시장 개척과 생산 네트워크 구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시장 다변화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아세안, 인도, 중남미 등의 산업화 여건과 발전 상황에 기초한 세밀한 소·부·장 진출 전략을 수립함으로써 시장의 범위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우선 국가별 경제·산업 성숙도에 기초해 맞춤형 소·부·장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예를 들어 경제성장 초기국은 철강 건축재, 합성수지, 고무·플라스틱 등 기초 소재에 대한 수요가 높다. 경제성장 중기국의 경우 가격 대비 성능이 좋은 범용 부품에 대한 자본재 수요가 높은 특징이 있다. 이 같은 여건을 고려해 진출 전략을 수립하되 신시장 진출에 따른 리스크 점검은 반드시 선행해야 한다.
단적인 예로 중국 다음으로 잠재 시장으로 부상하고 있는 인도의 경우 무역구제 조치와 비관세장벽이 높은, 기업의 통상 리스크가 큰 국가다. 우리와 한·인도 CEPA가 체결되었지만 현재 자유화 수준이 낮고 활용률이 저조한 편이므로 리스크를 완화하기 위해서는 개정 협상이 필요하다. 또한 새로운 생산 거점으로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 아세안 지역은 한·아세안 FTA의 수준을 뛰어넘는 개별 국가 간 FTA 체결을 통해 기업의 불확실성을 완화해 줄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상호 협력적·포용적 협력 사업에 기초해 다 함께 수혜를 누릴 수 있는 장기적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이미 아세안, 인도, 중남미, 아프리카 등 우리 산업의 신흥시장으로 떠오른 지역은 대부분 일본, 중국 등이 선점해 강고한 공급망을 구축한 곳이다. 따라서 차별화된 전략이 필요한데, 결국 협력 사업을 강화함으로써 진출 기반의 내실을 다지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미 베트남 V-KIST 등과 같은 산업 기술 이전 프로그램을 통해 상호 간 신뢰와 협력 기반을 강화한 경험이 있다. 각국의 협력 수요에 기반한 신뢰를 토대로 소·부·장의 안정적이고 지속 가능한 진출 기틀을 우리 소·부·장의 포트폴리오 재편 차원에서 마련해야 한다.
1 일본 제조 백서에 따르면 1,200여 개의 주요 첨단 소재·부품·장비 중 일본이 공급하는 품목 수는 894개이며, 이 중 세계시장 점유율이 60% 이상인 품목은 270개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 미국은 2001년부터 국가나노기술개발 전략(National Nanotechnology Initiative)을 수립·시행하고 있으며, 2011년부터는 물질게놈개발 전략(Material Genome Initiative)을 추진하며 소재 산업 혁신을 위한 투자를 가속화하고 있다. 일본도 신원소 전략(2012), 신소재 혁신 프로젝트(2016) 등을 통해 첨단 소재에 대한 주도권 확보를 국가 차원에서 추진하고 있다.
3 2001년 입법 이후 지금까지 네 차례에 걸쳐 ‘소재부품발전기본계획’을 수립하며 정책 지원을 체계화했다. 2015년 소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지원 체계를 고도화하기 위해 ‘소재·부품 전문 기업 등의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으로 개정된 바 있다.
4 산업연구원(2018)에 따르면, 우리 제조업의 중간재 자립화율은 여전히 60%대에 머물러 있으며, 특히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등 핵심 주력 산업의 국산 소재·부품·장비 조달률은 50% 미만에 불과한 실정이다. 5 한국은행(2013)에 따르면, 최종재 수출의 자국 부가가치 유발 효과는 한국이 58.8%로 일본(86.1%), 미국(83.2%) 등 제조 선진국에 비해 낮은 수준이다. 6 최근 독일의 산업 전략을 담은 ‘국가산업전략 2030’에서도 글로벌 공급망 구축 전략을 EU지역을 중심으로 한 Closed Supply Chain을 기반으로 재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