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해체의 시대, 새로운 문화 산업의 징후
게임 한류에 힘입어 국내 게임사는 출판·영상·방송통신·정보서비스업의 무역수지 흑자를 사상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파괴력을 보이고 있다. 2018년 우리나라 지식재산권 무역적자가 역대 최저 수준으로 개선되는 등, 수출 효자 품목인 게임의 저력을 보이는 것. 디지털 시대, 경계를 해체하는 지점에서 새로운 문화 산업이 개화하고 있다. 가상과 현실, 국가, 언어, 문화 같은 다양한 경계는 과연 깨져버릴 것인가. 가상의 K-Pop 걸그룹 K/DA(케이디에이)는 이 새로운 세계를 이미 우리 앞에 열어놓았다.
글 정덕현 문화평론가
2018년 롤드컵 결승전 무대가 보여준 파격
‘리그 오브 레전드(League of Legend)’는 2009년 처음 출시되어 지금껏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글로벌 게임이다. 이른바 ‘롤(LoL)’이라 불리는 이 게임은 2018년에 14억 달러(약 1조5,770여억 원)라는 놀라운 매출을 기록했다.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던 건 지난해 10월 우리나라에서 열린 이 게임의 국제대회 ‘롤드컵’에 쏠린 관심에서다. 지난해 롤드컵은 순 시청자 수만 무려 9,960만 명에 달했고, 최고 동시 시청자 수가 4,400만, 결승전 분당 평균 시청자 수가 1,960만 명에 이르렀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지난해 롤드컵이 보여준 결승전 무대의 파격이다. 가상의 케이팝 걸그룹인 K/DA와, 이들의 실제 가수인 여자아이들의 멤버 미연·소연 그리고 미국의 팝 디바 메디슨 비어와 자이라 번스가 함께 무대에 오른 것. 가상의 캐릭터와 실제 가수들이 한 무대에 설 수 있었던 건 증강현실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무대는 가상과 현실이 그 경계를 깨버리는 게임이라는 세계를 적확히 표현해냈다.
놀라운 건 이 오프닝 무대를 위해 라이엇게임즈가 K/DA의 노래는 물론이고 뮤직비디오 영상까지 만들어 발표했다는 점이다. 이른바 ‘사이버 가수’라고 부를 수 있는 화려한 걸그룹 캐릭터들의 노래와 춤이 담긴 뮤직비디오는 유튜브에 올라간 지 하루 만에 616만 조회 수를 돌파했고, 현재는 1억8,600만 뷰(3월 6일)를 넘어섰다. 유튜브에는 K/DA의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놀랍다’는 반응을 보이는 해외 유튜버의 리액션 영상들이 쏟아져 나왔다. 한국어와 영어가 혼용된 노래에 케이팝 임을 느끼게 하는 음악적 분위기가 더해진 데다, 캐릭터들의 댄스 동작 또한 케이팝 걸그룹들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K/DA의 성공은 케이팝 위상을 새롭게 실감하게 한다.
K/DA가 보여주는 케이팝의 위상
K/DA의 뮤직비디오 ‘Pop/Stars’를 보면서 한 유튜버는 “블랙핑크와 2NE1이 떠오른다”라고 했다. 사실이다. 각각 다른 분위기의 걸크러시를 보여주는 아칼리, 아리, 카이사, 이블린 네 캐릭터의 다소 반항적이고 도발적인 모습이 그들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캐릭터 이미지만이 아니다. 음악 스타일도 케이팝 걸그룹의 유전자를 갖추고 있다. EDM(Electronic Dance Music) 베이스에 유로 스타일 힙합 댄스 뮤직이 가미된 곡은 후반으로 치달으면서 케이팝 걸그룹들의 아이콘이 되어 있는 시그너처 군무를 통해 절정에 이른다. 특히 해외 유튜버에게 주목받은, 중간에 들어간 랩 파트는 전형적이지만 매력적인 케이팝 스타일을 만들어낸다. 그러니 해외 유튜버가 이 곡에서 “케이팝이 떠오른다”라고 말하는 건 꽤 자연스럽다. 그만큼 케이팝이 하나의 세계적 ‘장르’가 되어가고 있다는 방증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매년 가을 전 세계 프로 스포츠단 중 최고의 팀을 가리는 대회인 롤드컵 무대에 오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하는 점이다. 이 대회의 무대는 게임 마니아는 물론이고 전 세계 음악 팬의 관심이 집중되는 무대이기도 하다. 매년 세계적 유명 아티스트를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2013년에는 뉴 메탈 밴드 림프 비즈킷의 기타리스트 웨스 볼랜드가, 2014년에는 이매진 드래곤스가, 2015년에는 세계적 인기 DJ 제드가 이 무대에 섰다. 그런 무대에 케이팝 걸그룹 스타일을 전면에 세운 K/DA가 오른 것. 이는 향후 케이팝 같은 한류 콘텐츠가 어떻게 게임 등의 타 분야나 해외 유명 행사들과 조우할 수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다만 K/DA 처럼 모든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신기술과 콘텐츠의 결합이 가능하다면 말이다.
가상 아이돌과 실제 가수가 함께 무대를 꾸민 롤드컵 결승전. 사진 제공 라이엇게임즈
신기술과 콘텐츠의 결합, 한류의 새로운 길 열까
디지털 생태계의 주목할 만한 특징은 기존 아날로그 세계가 지닌 경계들을 해체해 새로운 문화적 집단을 이룬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국적, 언어, 민족, 피부색, 나이 등 기존 아날로그 세계를 구분하던 경계들이 사라지는 지점이 있다.
K/DA 같은 가상 케이팝 걸그룹은 여기에 가상과 현실의 경계 해체 또한 담아낸다. 화려한 그래픽 기술로 탄생, 음악과 스토리가 어우러진 캐릭터들은 노래와 춤까지 완벽하게 구현하며 실제 가수들과의 증강현실을 통한 컬래버레이션 무대로 실제성을 부여받는다. 과거에는 가상 캐릭터와 실제 인물이 엄밀히 구분되는 존재였지만, 우리는 점점 그 가상 캐릭터에 실제감을 갖고 몰입하는 경험을 하고 있다. 영화 <알리타>의 사이보그 알리타가 실제 인물과 사랑에 빠지는 걸 그다지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몰입하게 된 것과 마찬가지. 하물며 게임의 세계는 캐릭터와 실제 우리들 사이의 경계가 점점 사라져가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K/DA라는 가상 케이팝 걸그룹이 게임 속에서 탄생한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여겨진다. 게임이 추구하는 세계 또한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끝없이 지워내는 것이니 말이다.
K/DA는 이처럼 달라진 글로벌 디지털 문화 속에서 케이팝 같은 우리네 한류 콘텐츠가 나아갈 새로운 길을 보여준다. 가상과 현실을 없애버리는 신기술을 더해, 콘텐츠 속 캐릭터들은(그것이 실제 사람이든 가상 캐릭터든)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 무대에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 물론 여기서 전제되어야 할 것은 케이팝처럼 이미 세계가 하나의 장르로 인식할 만큼의 저변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된다면 향후 우리 한류 스타일을 세계 어떤 콘텐츠나 무대에서든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