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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호VOL.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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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통상,
새 술을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하다

갓 담가 발효성이 강한 술은 낡은 부대(負袋)가 버텨내지 못하는 모양이다. 전에 없던 ‘디지털 통상’이 나타났을 때 기존의 통상 관습과 규범에 맞춰보려 했지만, 결국 이리저리 새는 술 부대처럼 실효성이 떨어졌다는 게 세간의 평. 이제는 디지털 통상만을 위한 새로운 국제 규범을 논할 때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이면 상품이나 서비스를 받아볼 수 있는 전자상거래의 등장으로 많은 것이 변화했다. WTO는 1990년대 중반 전자상거래 작업반을 설치하며 디지털 재화(Digital Product)를 관세 없이 오갈 수 있도록 한시적으로 합의했다. 예를 들어 영화를 저장한 DVD를 수입한다면, 유형물인 DVD에는 관세가 붙지만 무형의 콘텐츠인 영화에는 관세가 붙지 않는다.
이후 강산이 세 번쯤 변하는 동안 변화는 더욱더 빨라졌다. 이제는 미국 할리우드 영화를 한국에서 보려고 DVD를 수입하지 않아도 된다. 애플리케이션에 접속하는 순간 데이터는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실시간으로 이동한다. 4차 산업혁명과 5G 시대가 도래하면서 디지털 통상을 이야기할 새로운 국면을 마주한 것이다.
하루 한시가 다르게 변하는 분야다 보니 통달한 전문가가 없다는 견해도 있지만, 불모지를 직접 발로 뛰며 개척해가는 사람도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선구적 행보를 보이는 이들과 디지털 통상과 새로운 규범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 디지털 통상 다룰 설명서, 국제 규범

디지털 통상이 등장했다. 분명 일상생활에서 빈번히 마주하는 일 중 하나인데, 설명하자니 그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명확하지 않다. 디지털 통상에 대한 정의조차 분명하지 않은 상황이지만, 산업과 국민의 일상에 큰 영향을 미치는 만큼 미지의 존재를 다룰 수 있는 매뉴얼, 즉 규범이 필요하다.


이종석 과장  디지털 통상의 정의를 광의와 협의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도, 상품으로 봐야 할지 서비스로 봐야 할지 논의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이미 디지털 통상을 행하는 시대에 있기 때문에 이런 논의의 종결보다 시급한 문제가 바로 디지털 통상을 다룰 규범이 없다는 점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디지털 통상에 왜 주목해야 하고 무엇이 문제인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우선 디지털 통상의 가장 큰 이슈는 기존 통상과 달리 물적 공급 기반이 속한 지역과 소비가 일어나는 지역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기존의 법제나 통상 규범이 닿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A사가 우리나라 소비자의 데이터를 오·남용한다 하더라도, A사의 서버가 있는 B국 법률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이를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이처럼 국가마다 법과 규범이 달라 실시간으로 자유롭게 오가는 데이터 및 디지털 재화와 같은 부분은 규제할 수 없다 보니 이 문제를 어떤 기준으로 다룰지가 디지털 통상의 쟁점입니다.


이효영 교수  양자 간 FTA나 뜻이 맞는 나라끼리 모여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논의하기도 합니다만, 국가마다 상황이 달라 쉽게 해결될 것 같진 않습니다. 디지털 통상에 대해 여러 논의가 있었는데, 최근 가장 눈길이 쏠리는 곳은 WTO입니다.
사실상 입법 기능을 잃은 WTO가 다시 예전과 같은 권위를 되찾을 수 있을지, 아니면 유명무실한 기구가 될지는 이 디지털 통상에 달려 있다고 봐야 할 텐데요, 디지털 통상과 관련해 가장 강력하게 자유화를 외치는 미국이 WTO 체제에서 유일하게 관심을 보이는 의제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WTO에서 회원국이 합의할 수 있는 디지털 통상 규범이 만들어진다면 회원국 모두 동일한 규칙에 따라 편하게 통상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것입니다. 반대로 실패한다면 미국뿐 아니라 모든 국가가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개별적으로 협상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다자간 무역협상의 큰 틀을 제시하고 무역분쟁을 해결하고자 설립한 WTO의 기능 역시 유명무실해질 것이고요. 소규모 개방경제로 WTO 체제가 주는 혜택을 누려온 우리의 입장에서도 큰 변화를 마주하게 되겠죠.


김정곤 팀장    디지털 통상을 다루는 하나의 정의나 규범을 아직 마련하지 못한 것은 국가마다 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기 때문인데요, 일찌감치 미국은 1950년대부터 소비자 정보 등 데이터를 거래하는 업태가 발달해왔습니다. 일반적인 데이터뿐만 아니라, 개인 정보까지도 상업적으로 거래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고 있죠. 그러나 EU는 개인 정보를 이른바 ‘천부적인 인권’의 하나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를 보호하기 위해 지난 2018년부터 시행한 것이 GDPR인데, EU 역외국의 기업이 EU 시민의 개인 정보를 GDPR에 준하는 정도로 보호하지 않는다면 이 정보를 EU 밖으로 반출할 수 없도록 막고 있습니다.
국외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기업의 규모에 따라 또는 소비자와 사용자의 입장에 따라 디지털 통상을 둘러싼 이해관계가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습니다. 모두가 만족하는 규범을 만드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어렵다고 포기할 상황이 아니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겁니다. 지금 이 순간도 새로운 통상 규범을 향한 다양한 논의 및 협상 노력이 계속되고 있죠.


# 국가마다 디지털 통상 대하는 태도 달라

디지털 통상을 주도하는 기업, 이른바 글로벌 플랫폼 기업은 태생적으로 승자독식의 독과점 양태를 보인다. 이러한 기업을 많이 보유한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 사이에 디지털 통상을 바라보는 시선 차는 냉탕과 온탕의 온도 차만큼이나 극명하다. 이처럼 다른 견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효영 교수  미국은 디지털 통상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공론화한 국가일 뿐 아니라, 가장 수준 높은 자유화를 주장하는 국가입니다. WTO에서 미국의 입맛에 맞지 않는 방향으로 논의가 전개된다면, 미국은 WTO 체제의 필요성에 의문을 품고 뒤흔들려 할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디지털 통상 분야는 미국의 방향성을 주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EU는 더욱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는데,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면서도 기업의 활동을 가로막는 불필요한 규제는 줄이고자 합니다. 일부에서는 EU의 사례를 보고 개인정보보호를 무조건 강화해야 한다고 보기도 하는데, 이는 한쪽만 강조한 게 아닌가 싶어요.
중국은 인터넷 검열을 ‘인터넷 안보’를 지킬 수 있는 국가의 주권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자국민의 데이터를 국외로 이전할 수 없도록 제한하고, 기업의 데이터 센터를 중국 내에 두도록 합니다. 미국은 중국이 디지털 통상의 자유화를 제한한다고 비판하고 있고요.
또 개도국은 선진국과 관세에 대한 입장이 다릅니다. 전자적 전송물의 관세를 영구 유예하자는 선진국과 달리 개도국은 관세를 부과하자고 하는데, 이는 관세 수입이 개도국에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종석 과장  통상은 그 나라의 국격을 대변하는 일이라, 각국은 저마다의 이익을 그럴듯한 의제로 포장해 주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는 조금이라도 자국의 이익을 더 확보할 수 있도록 치열한 두뇌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죠. 제가 보기에 미국이 수준 높은 자유화를 강조할 수 있는 것은 10대 글로벌 플랫폼 기업 가운데 7곳이 미국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가장 선진적인 개인정보보호 내용을 담았다는 EU의 GDPR도 역외국가에 대해서는 까다롭게 규제하지만, 역내국 간에는 자유화를 보장해 기업의 데이터 활용을 촉진합니다. 이런 이중성을 고려하지 않고 상호 간 규제 수준을 무조건 높이기만 한다면, 그만큼 우리의 성장 가능성도 가로막고 말 것입니다.
결국은 필요한 수준의 규제와 자유 간의 균형점을 맞추는 것이 관건인데, 우리 정부는 WTO에 여러 가지 사항을 고려한 제안서를 제출한 바 있습니다. 현 단계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언급할 수는 없지만, 여러 국가가 겪고 있는 상황을 반영하는 동시에, 우리만의 목소리를 담아 특색 있는 제안을 제출했다고 봅니다.

김정곤 팀장   디지털 통상과 관련해 주요 이슈마다 개인정보보호와 활용의 조화, 국경 간 데이터 이동의 자유와 제한 등 상반된 시선이 있습니다. 나라마다 인공지능이나 빅데이터 같은 기반 기술 및 산업 경쟁력의 차이가 있고, 온라인 플랫폼을 기반으로 하는 비즈니스의 특성상 승자독식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데서 오는 우려 때문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많은 데이터를 가진 플랫폼은 소비자를 유인할 수 있으며, 이는 또다시 더 많은 데이터의 축적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속성은 소수 기업이 독과점하는 구조를 만들고, 신생 또는 소규모 기업이 진입하는 데 큰 장벽이 되고 있습니다.
이렇듯 디지털 통상에는 그간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이슈가 많은데, 한 가지 면만 보고 강력한 규제를 가한다면 성장 동력을 잃을 수 있는 만큼 각국은 저마다 디지털 통상환경을 조화롭게 구축, 운영할 수 있는 지점을 찾으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가 최근 데이터 3법(개인정보보호법, 정보통신망법, 신용정보법) 개정을 추진하며 혁신 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고자 하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성과로 생각합니다.




# 디지털 통상, ‘바로 알기’가 관건

디지털 통상은 분명 무역의 새 장을 열었다. 때마침 대한민국은 디지털 인프라와 5G 등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앞서갈 기반을 갖춘 바 있다. 그러나 기회를 알아채지 못한다면, 아무리 좋은 능력도 발휘할 수 없다. 새로운 시대에 희망을 써 내려가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 모두의 인식을 바로잡는 일이라고 전문가는 말한다.


김정곤 팀장  디지털 통상은 지금까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마치 회색지대와 같다고 볼 수 있죠. 그렇기에 오히려 새로운 혁신의 자산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디지털 통상을 좁게 보면 전자상거래를 들 수 있습니다. 전자상거래를 통해 상품이나 유형의 재화가 오가는 것 같지만, 사실 소비자의 선호도나 소비 패턴과 같은 무형의 데이터가 축적됩니다. 사물인터넷과 빅데이터, 인공지능, 신속한 5G와 같은 기술로 혁신과 시장의 확대가 이뤄지고 있지요. 이 때문에 디지털 통상의 개념은 전자상거래나 콘텐츠, 서비스에만 국한한 개념이 아니라 ‘데이터 축적을 수반한 혁신적인 국제적 거래의 모든 형태’로까지 확장합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IT 강국임을 자타가 공인하고 있으나, 아직 그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GAFA 같은 주요 글로벌 플랫폼 기업의 공세에는 다소 밀리는 듯하지만, 국내시장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동남아 시장에 진출해 고무적 성과를 내기도 합니다. 따라서 균형을 잃은 규제는 양날의 검이 되어 우리를 해칠 수도 있습니다. 우려 사항에는 목소리를 내며 적극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는 한편, 수세적 입장은 지양하고 전향적으로 대응하는 등 산업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는 방향을 고민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효영 교수  결론을 내리자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디지털 통상 관련 국내법의 입법 방향은 글로벌 무대의 규칙과 방향이 비슷하면 비슷할수록 덜 수고롭다는 것이죠. 글로벌 플랫폼 기업의 자유화로 국내기업이 역차별을 겪는다는 점만 보고 세계적인 트렌드에 맞지 않는 국내법을 고집한다면, 우리가 감당해야 할 부분이 많아집니다. 투자 유치도 어려울 뿐 아니라, 국내기업이 해외에 진출할 때 국제 기준의 수준을 맞추려면 살을 깎는 고통을 감내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무역 실정에 잘 맞는 국내법을 갖추고 있다면, 세계 어떤 무대에서도 두려움 없이 경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적인 차원의 논의에서는 CPTPP처럼 각국의 상황에 따라 예외 조항을 일부 허용하는 방향으로 유도해야 할 것 같습니다. 미국은 점차 예외 없는 의무 조항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처럼 유연하지 않은 규범은 위험성이 있어요.

이종석 과장  무엇보다도 디지털 통상을 우리 산업을 혁신하고, 새로운 생태계를 구축하는 기회라고 인식해야 합니다. 앞으로의 통상은 산업통상자원부나 일부 전문가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디지털 통상만 하더라도 방송 통신 기술과 개인정보보호법, 행정 분야에 걸쳐 논의를 진행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점차 전방위적으로 범주를 넓혀갈 것입니다. 잘 팔리는 세탁기 하나를 만들려고 해도 소비자의 데이터를 활용하는 것이 관건이고요.
일본은 디지털 통상 관련 산업 생태계의 큰 그림을 그리는 범정부적 기구를 출범, 기구의 수장을 총리로 하는 등 한발 앞서가고 있습니다. 우리도 발 빠르게 국가적 전략을 수립하고 전문가를 양성해야 합니다.
“외부보다 내부와의 협상이 더욱 어렵다”는 말이 있습니다. 디지털 통상에는 그동안 통상을 생소하게 여겼던 여러 부처와 협력해야만 풀 수 있는 문제도 많습니다. 산업부는 여러 정부 부처부터 모든 국민이 디지털 통상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쉬운 언어로 홍보하며 인식을 제고해야 함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새로운 현상이 등장할 때 필요한 규범은 한 번에 뚝딱하고 만들어지지 않는다. 할 수 있는 일부터 차근차근 해치우는 것밖에 도리가 없다. 무엇보다 디지털 통상이 우리 국민의 먹거리를 책임질 수 있다는 인식을 갖고, 국제적인 논의를 주도해가는 일. 이는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시대의 장에서 대한민국이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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