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품은 ‘디자인의 수도’
유엔 산하 자문기구인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가 공개한 ‘2019 세계행복보고서’에서 전 세계 156개국 가운데 가장 행복한 나라로 선정된 곳. 핀란드는 ‘삶의 질’과 관련한 다양한 지표에서 줄곧 최상위에 위치한다. ‘그 행복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걸까?’ ‘행복하게 잘 사는 비결이 뭘까?’ 이렇듯 핀란드를 필두로 한 북유럽의 라이프스타일은 늘 적지 않은 호기심과 궁금증을 일게 하는데, 지난 6월 문재인 대통령의 북유럽 3개국 순방을 계기로 다시 한번 주목받고 있다. 그 행복의 속살이 자못 궁금했던 어느 날, 백야가 내려앉은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의 여름 속으로 가만히 걸음을 옮겼다.
글 서진영(instagram.com/ricovacilon)
핀란드 경제 개관(2017년 한국은행, The World Bank, 대만통계청 기준)
•국내총생산: 약 2,518억 8,488만, 세계 43위
•면적:약 3,384만 4,600㏊, 세계 64위
•인구: 약 556만 1,400명, 세계 115위
•경제성장률: 2.63%, 세계 114위
어스레한 하늘빛, 새벽녘인지 해거름인지 모를 풍경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시계가 고장 난 것이 아니라면 둘 다 틀렸다. 밤 10시에서 11시로 넘어가는 즈음, 말로만 듣던 백야의 시간. 7월의 헬싱키는 여행자를 더욱 부지런히 움직이게 했다.
단순하게, 간결하게, 그런데도 아름다운
헬싱키 여행자들의 일정표는 박물관, 미술관, 성당, 고성, 중세 유적 같은 역사 문화 명소들이 ‘반드시 가야 할 곳’ 리스트 맨 꼭대기에서 순위 싸움을 하는 유럽의 여느 도시와는 사뭇 다르다. 마리메꼬(Marimekko), 아르텍(Artek), 아라비아(Arabia), 이딸라(Iittala), 요한나 글릭센(Johanna Gullichsen) 등 디자인 브랜드들이 빼곡하게 포진해 있는 것이다.
꽤 많은 여행자가 헬싱키 땅에 발을 내딛기 전부터 아주 전략적으로 핀란드 디자인에 노출된다. 핀란드 국적기인 핀에어와 마리메꼬의 컬래버레이션 때문. 일반적으로 비행기 내부는 항공사를 상징하는 한 가지 색상을 중심으로 심플하게 디자인하는데, 핀에어는 다르다. 경쾌한 색감과 독특한 패턴을 자랑하는 핀란드의 대표 디자인 브랜드 마리메꼬의 디자인이 기내 곳곳에 적용돼 있다. 그뿐 아니라 탑승객에게 간단한 소지품을 넣을 수 있는 마리메꼬 파우치를 어메니티로 제공하니 첫인상부터 좋을 수밖에.
숙소는 일찍이 호텔이 아닌 에어비앤비로 예약했다. 현지인들의 ‘진짜’ 사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며칠이지만 ‘진짜’ 살아보고 싶어서. 100년이나 되었다는 아파트엔 엘리베이터도 없었고, 머무는 닷새 중 하루는 오전 내내 단수가 되기도 했지만, 더없이 좋은 선택이었다. 애써 꾸민 느낌 하나 없이 필요한 것만 있어야 할 곳에 딱딱, 그럼에도 인테리어 잡지에나 등장할 것 같은 말끔한 분위기. ‘핀란드 디자인의 힘은 그것을 생활 속에서 즐기는 일상에 있다’는 말이 실감이 났달까.
헬싱키 중심부 무려 25개 거리에 걸쳐 형성된 ‘헬싱키 디자인 디스트릭트(Design District Helsinki)’는 핀란드의 디자인 트렌드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도심 여행의 출발점이다. 핀란드 디자인을 전 세계적 트렌드로 만드는 데 기여한 브랜드 숍과 갤러리, 박물관, 아티스트 스튜디오, 레스토랑, 카페 등이 한데 모여 있는 것. 안목도 키우고, 쇼핑도 즐기며, 헬싱키 도심을 촘촘하고도 깊숙이 거닐게 한다.
‘카모메 식당’에서 ‘알토 하우스’까지
사실 이토록 빼어난 핀란드의 디자인보다 먼저 헬싱키에 관심을 갖게 된 건 2007년에 국내 개봉한 일본 영화 <카모메 식당>을 보고 난 후다. 헬싱키의 어느 조용한 거리에 낯선 이방인 사치에가 자그마한 일식당을 열면서 시작되는 이야기. 처음엔 뒤뚱거리는 비둘기 한 마리 얼씬하지 않던 식당이지만(카모메는 핀란드어로 ‘비둘기’란 뜻이다) “하고 싶었던 일을 해서 좋은 게 아니라, 하기 싫었던 일을 하지 않아서 좋은 거예요”라고 말하는 사치에의 소박하지만 정성 가득한 솜씨와 차림은 저마다 슬픔과 외로움을 안고 있던 사람들에게 온기를 불어넣었다. 허구의 공간이지만 제발 그 모습 그대로 있어주었으면 하는 공간이기도 했는데, 영화를 본 사람들은 다 같은 마음이었나 보다. 팬덤으로 영화가 촬영된 바로 그 자리에 구조는 조금 다르지만, 콘셉트는 동일한 ‘카모메 식당(Ravintola Kamome)’이 성업 중이다. 영화 속 대사처럼 “누구든 뭔가 먹어야 살 수 있는 법이니”만큼 사치에의 ‘소울 푸드’였던 오니기리로 속을 채우고 나니 긴긴 백야의 밤을 지새우기가 한결 가뿐해졌다.
영화를 보다 보면 ‘와, 저거 참 멋있다’ ‘저긴 어딜까?’ 싶은 아이템이나 장소들이 왕왕 등장하는데, 이 모든 것은 한 사람에게 가닿았다. 핀란드를 대표하는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인 알바 알토(Alvar Aalto) 이야기다.
알바 알토의 ‘모더니즘’은 확연히 다르다. 20세기 초 모더니즘의 주 소재로 부상했던 철을 거부하고 자연 소재인 나무에 집중한 그는 목재를 유연하게 구부리는 기술을 고안했고, 디자인 브랜드 아르텍과 이딸라 등을 통해 세련되지만 차갑게만 느껴지던 모더니즘의 기운을 우아하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단순한 아름다움’의 경지로 이끌었다. 디자이너이기 전에 건축가로서 아이덴티티가 있는 그는 건축에서도 자연과의 유기적 조화를 구현해냈다. 영화 <카모메 식당>에도 등장하는 아카데미넨 서점(Akateeminen Kirjakauppa)은 자연광이 들어오는 기하학적 구조의 천장이 인상적이다. 이 밖에 헬싱키대학교, 핀란디아홀 등 알바 알토가 구현해낸 건축물들은 도심 곳곳에 헬싱키의 랜드마크로 자리하고 있다.
헬싱키 도심에서 1시간 거리의 리히티(Riihiti)에는 알바 알토가 실제 살았던 집 알토 하우스(the Aalto House)와 작업 공간으로 사용한 스튜디오 알토(Studio Aalto)가 뮤지엄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집이라는 공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빛’이라고 생각한 그는 해가 뜨고 지는 흐름을 고려해 동쪽에서 서쪽으로 천장을 경사지게 만들고 창을 냈다. 그리 쨍한 날이 아니었는데도 환하게 느껴지던 스튜디오에서 공간 안내를 담당한 도슨트는 “해가 쨍한 날은 선글라스를 끼고 싶을 정도라니까요” 하며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떤 공간이든 공간 자체보다 그 속에서 생활하거나 움직이는 사람을 우선해 공간이 지닌 의미와 기능을 두루 고려했던 알바 알토의 철학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자연이 곧 디자인이고, 예술이고, 삶이다
알바 알토는 ‘핀란드의 거장’이라 할 만큼 뛰어난 인물이지만, 사실 그 바탕에는 핀란드의 자연이 있었다. 알바 알토 이전에도 이후에도 핀란드의 자연은 늘 이곳 사람들의 일상을 풍요롭게 했다.
바위 언덕을 깎아 거기에서 나온 바윗덩어리들로 벽을 쌓고, 그 돌벽과 돔형 천장 사이에는 유리를 둘러 자연 채광이 은은하게 들어오도록 한 템펠리아우키오 교회(Temppeliaukio Church)는 주어진 자연환경과 루터교의 절제, 극한의 추위 등 한계와 이상향을 절묘하게 일치시킨 걸작이다.
자연 가까이에서 자연스럽게, 넘치지 않는 소박함으로, 이번 여행에서 얻은 건 그런 것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