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주에서 청해진까지
중국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의 문집에 장보고(張保皐, ?~846)는 해상 무역의 요지를 장악하며 신라인들을 보호하는 사람으로 묘사돼 있다. 당시 그의 업적은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각국의 무역상과 승려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번 호에서는 그가 한반도와 중국 사이에서 어떤 교역을 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글 김현경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지도 장보고 기념관
산둥반도에 적산 법화원 설립
지금의 완도 지역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당으로 건너간 신라인 장보고는 무령군 궁중소장직을 맡아 활동했다. 이를 그만두면서 산둥반도 적산포에 적산 법화원을 세워 당에 거주하던 신라인들에게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신라인들은 당시 당나라에 다양한 물품을 수출하며 무역을 했는데, 주로 인삼이나 신라의 토산품이었다. 수입품으로는 고급 비단, 옷, 책, 공예품 등이 있는데, 특히 중국 도자기가 신라시대 유적지에서 많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이 시대 많은 도자기가 한반도로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신라는 뛰어난 조선술을 바탕으로 200톤 이상의 짐을 싣고 항해했는데, 그만큼 진귀한 물품이 많아 이를 노리는 해적도 많았다.
법화원은 항해 전 안전을 기원하는 장소였으며, 또 정보가 오가는 신라인들의 사랑방 같은 역할을 했다. 법화원은 무역 선단의 활동뿐 아니라 당시 당나라로 온 신라와 일본 승려들의 안식처로도 사용했는데, 일본의 승려 엔닌(圓仁)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그가 장보고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장보고는 이런 다양한 네트워크를 구축함으로써 가까운 미래의 해상무역을 장악할 수 있는 힘을 키웠으며, 신라로 돌아가 흥덕왕을 알현하고 청해진을 세울 수 있는 기반을 세웠다.
중국 산동반도에 남아 있는 적산 법화원 장보고 기념관. 사진 제공 연합뉴스
새로운 바닷길을 열다
장보고는 다양한 중국의 무역항과 신라의 교역로를 확보하는 데 힘을 쏟았다. 현재 저장성에 위치한 닝보는 과거 명주 혹은 영파로 불리던 항구인데, 고대부터 중국의 중요한 국제 중계 무역항으로 대형 무역선이 오가는 곳이었다. 명주에서 조금 북쪽에 위치한 양주는 동아시아뿐 아니라 아라비아 선박이 최종 기착하는 곳으로 해상 실크로드의 길목이기도 했다. 이곳으로 드나드는 교역품은 당시 사치품으로 간주할 정도로 귀중하고 아름다운 것이 많았으며, 각국의 최상의 물품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항로 확보와 더불어 장보고는 신라인들이 안전하게 교역을 할 수 있도록 해적을 소탕하는 역할도 했다. 특히 바닥이 뾰족한 첨저형 교관선을 만들어 쉽게 전복되지 않는 선박을 사용했고, 해류를 이용하는 탁월한 항해술로 보다 빠르고 안전하게 이동시켰다.
이렇게 중국과 청해진 사이의 교역로를 장악한 장보고는 점차 일본과 중국 사이의 중간 무역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일본과 청해진 사이의 교역은 다음 호에서 이어가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