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2001년 ‘부품·소재특별조치법’을 제정하며 소재·부품 산업의 발전을 이뤄냈다. 그러나 이번 일본의 핵심 소재 수출규제에 따라 발생하고 있는 문제들을 살펴보면, 고부가가치·핵심 소재 분야 경쟁력은 여전히 부족함을 알 수 있다. 국내 소재·부품 산업의 자립화 및 고부가가치화를 이뤄내기 위해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글 석영철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 원장
일본 정부의 소재 수출 규제 조치
2019년 7월 1일, 일본 경제산업성은 ‘국제 평화와 안전 유지’라는 이유로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생산의 핵심 소재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리지스트·고순도 불화수소에 대한 한국 수출규제 조치를 발표하였다. 이미 반도체 수요 감소 및 단가 하락, 디스플레이 경쟁 심화 등으로 고전 중인 우리 기업의 입장에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문제가 터진 것이다. 우리나라 전 산업 수출의 약 30%를 차지하던 핵심 주력산업인 반도체·디스플레이 산업이 고작 3개 품목의 수출규제에 왜 이리 동요하는 것일까? 해당 3개 품목은 일본이 글로벌 시장을 독과점하고 있어 해당 소재 없이는 반도체·디스플레이의 생산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리지스트·고순도 불화수소의 2019년도 대일본 수입의존도는 각각 93.7%, 91.9%, 43.9%에 이른다. 우리나라 반도체·디스플레이 수출이 늘면 늘수록 일본의 소재 수입도 덩달아 증가하는 구조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대중국 소재·부품 무역흑자는 467억 달러이지만, 대일본 소재·부품 무역적자는 151억 달러로, 중국에서 벌어들인 무역흑자의 3분의 1을 고스란히 일본에 가져다준 셈이다.
가마우지 구조, 해외 의존적인 한국 경제
1989년 일본의 경제평론가 고무로 나오키는 그의 저서 <한국의 붕괴>에서 ‘한국이 완제품을 생산해 매출이 발생하면 그 이익은 제품 생산에 필요한 소재·부품을 납품한 일본이 취하는 구조’라는 의미로 ‘가마우지 경제’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는 목에 줄이 묶인 가마우지가 강에서 물고기를 잡으면, 목줄 때문에 고기를 삼키지 못하고 주인에게 바치게 되는 구조를 말한다. 전통 제조업 강국인 미국, 독일, 일본 등은 1980년대부터 소재·부품 산업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인지하고 자국의 산업구조를 핵심 고부가가치 소재·부품 중심으로 전환했다. 하지만 후발 주자인 우리나라는 최종 제품 위주의 빠른 경제 성장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핵심 소재·부품의 해외 의존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에 우리 정부는 가마우지 경제라는 오명을 씻고, 글로벌 소재·부품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2001년 ‘부품·소재 전문 기업 등의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이하 특별법)을 10년 한시법으로 제정한 후 소재·부품 산업 육성을 위한 정책과 지원을 본격적으로 펼쳐 눈부신 성장을 일궈냈다. 우선 특별법 시행 10년 만에 소재·부품 수출은 2001년 620억 달러에서 2010년 2,290억 달러로 약 4배, 무역흑자는 27억 달러에서 779억 달러로 약 29배 증가했다. 이는 2010년 전 산업 수출의 49%, 무역수지의 1.9배에 해당하는 것으로, 소재·부품 산업이 전 산업 수출 및 무역흑자 증가를 주도한다고 할 만큼 성장했다. 대일본 소재·부품 수입 의존도 역시 특별법 시행 이후 완화됐다. 대일본 무역적자는 2001년 105억 달러에서 2010년 243억 달러로 확대되었지만, 수입 의존도는 2001년 28%에서 2010년 25%로 3%p 하락했다.
특히 2008년 글로벌 경기침체 속에서 달라진 소재·부품 산업의 위상은 더 큰 빛을 발했다. 2008년도는 우리나라 무역수지가 133억 달러 적자를 기록한 해였다. 그런데도 소재·부품 산업은 수출 1,835억 달러, 무역수지 348억 달러를 기록하면서 우리 경제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성장했음을 보여주었다. 이는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신흥시장을 대상으로 한 수출 호조세가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때를 기점으로 우리 산업은 소재·부품 중심의 무역구조로 점차 변화되기 시작했다.
소재·부품과 전 산업의 무역 추이
자료. 산업통상자원부, 소재·부품종합정보망(www.mctnet.org)
상대적으로 취약한 소재산업 발전에 집중
소재·부품 정책 10년을 통해 소재·부품 산업은 양적 성장과 소재·부품 강국으로 나아갈 수 있는 탄탄한 기반을 마련했으나, 해결해야 할 과제들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대일본 무역적자 중 소재의 비중은 2001년 42%에서 2010년 58%로 증가했고, 원천기술이 부족한 소재 중심으로는 역조 현상이 심화됐다. 세계 각국의 기술력 향상으로 범용 소재·부품의 기술 격차는 좁혀졌지만, 오랜 기간 많은 투자가 필요한 고부가가치·핵심 소재 분야의 기술 경쟁력은 여전히 부족했다.
이에 2011년 정부는 특별법의 시한을 2021년까지 10년 연장하고, ‘소재·부품 미래비전 2020’ 정책을 선포하며 미래 세계시장을 선점할 수 있는 핵심소재 개발에 주력했다. 이처럼 10년 단위의 중·장기 정책을 두 차례 추진하면서 지난해 우리나라 소재·부품은 수출 3,162억 달러, 무역수지 1,391억 달러로 사상 최대 기록을 달성하는 정도로 성장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경제 중추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번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로 30년 전 지적된 가마우지 경제가 여전히 우리 산업구조에 남아있다는 것이 재확인되었다. 이제는 자유무역주의에 기반한 우리 소재·부품 정책의 기조를 핵심 소재·부품의 무기화에 대한 대응 및 자립화로 전환하는 것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자립화·고부가가치화 제조업 르네상스 전략
2011년 일본 경제평론가인 하세가와 게이타로(長谷川慶太郎)는 그의 저서 <소재는 국가다>에서 일본 제조업이 강한 이유는 소재 산업 때문이라고 말하며, 이미 압도적으로 많은 R&D에 투자하는 일본의 소재 산업을 경쟁국들이 쉽게 따라오지 못할 거라 주장했다. 일본의 신원소전략(2012~2021년), 신소재 혁신 프로젝트(2016년) 등 적극적인 정부 지원 정책으로 미루어본다면 향후 고부가가치 소재 시장에서 일본의 장기 독주가 예상된다.
돌아보면, 우리는 지난 20년간 범용 소재·부품 중심의 외향적 성과를 달성하기 위해 달려온 게 아닐까 생각한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새로운 미래의 먹거리가 되어줄 핵심 고부가가치 품목에 대한 집중적인 R&D와 지원을 통해 스스로 일어서야 할 때다.
산업의 체질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진단과 처방이 필요하다. 올해 6월 산업통상자원부가 발표한 ‘제조업 르네상스 비전 및 전략’에서 그 답을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소재·부품 글로벌 가치사슬(GVC)을 분석하여 소재·부품 산업의 맥을 짚어야 한다. 주력 산업별로 글로벌 가치사슬을 분석하고, 품목별로 우리의 강점과 약점에 대한 냉정한 진단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경쟁력이 취약한 품목의 원인이 무엇인지, 자립화를 위한 도전 가능성이 있는지 등을 판단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핵심 소재·부품의 자립화를 위한 담대한 투자가 있어야 할 것이다. 소재·부품 자립화가 필요한 대상 품목을 발굴하고, 해당 품목의 자립화를 위해 매년 1조 원 이상의 과감한 투자가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소재 강국의 기술력을 따라잡기 위한 새로운 혁신 방법론이 필요하다. 최근 미국, 중국, 일본 등 제조업 강국은 각각 MGI(Material Genome Initiative), CMGI(China MGI), MI2I(Material Research by Information Integration Initiative)라는 이름으로 소재·부품 경쟁력 강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인공지능(AI), 빅데이터를 활용해 소재·부품의 설계·실증·신뢰성 등 기술 혁신의 속도는 높이고 비용은 절감하기 위해서다. 우리도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제조업 가치사슬의 완결성을 확보해야 한다. 핵심 소재·부품의 해외 의존도 문제지만, 이를 만들어내는 장비의 해외 의존도 문제다. 제조업의 ‘소재(Input)→장비(Process)→부품(Output)’으로 이어지는 가치사슬의 건전성을 위해서는 소재·부품과 장비를 연계한 제조업 전체의 균형 발전을 이뤄내야 한다. 다행히 현 특별법의 정책 범위를 소재·부품에서 장비까지 확대하는 한편 특별법의 상시법 전환도 예정되어 있어, 소재·부품 산업 생태계의 자립화에 도움이 될 전망이다.
석영철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 원장(왼쪽 여섯 번째)은 지난 7월 18일 소재·부품 반도체 기업 현장방문을 진행했다.
정부의 소재·부품 관련 주요 정책의 경과
2001 ‘부품·소재 전문 기업 등의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 제정
2009 ‘제2차 소재·부품발전 기본계획’ 발표
2010 ‘10대 핵심 소재 국산화 프로젝트’ 발표
2011 ‘소재·부품 미래 비전 2020’ 정책 발표
2013 ‘제3차 소재·부품발전 기본계획’ 발표
2017 ‘제4차 소재·부품발전 기본계획’ 발표
2019 ‘제조업 르네상스 비전 및 전략’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