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5년 구법승으로 선출된 일본의 승려 엔닌은 당나라로 가기 위해 여러 번 출항했다. 숱한 생사의 기로를 넘어선 끝에 당나라에 도착했지만, 배는 부서지고 짐은 유실되었다. 도움이 절실하던 엔닌은 장보고를 떠올리며 적산법화원에 머물렀고, 장안으로 가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일본으로 돌아와 고승이 된 엔닌은 적산선원을 세워 장보고를 기리게 되었다. 한 승려의 수행을 도운 것에서 그치지 않았지만 그의 업적이 일본 전역에 미치게 된 영향에 대해 살펴본다.
글 김현경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신용거래를 통한 해상무역 장악
당시 사람들에게 장보고와 거래하는 것은 부자로 가는 지름길로 인식되었다. 일본의 기록을 살펴보면 장보고 선단의 활동을 살펴볼 수 있는데, 그 횟수는 수없이 많다. 일본 현지 귀족들은 장보고 선단이 들여오는 신라와 당나라 그리고 서역의 물건을 애호했고, 고위 관리들은 그와 거래하고자 했으며, 이권을 둘러싸고 다투기도 했다. 한 예로 당시 지쿠젠국(현재 후쿠오카)의 태수였던 훈야노 미야타마로는 자리에서 물러난 뒤 본가인 교토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후쿠오카에 남아 장보고와 거래했을 정도다.
장보고는 또한 국가조직이 아닌 독립 무역 선단으로 신용거래를 도입하게 된다. 당시 무역은 현물거래가 원칙이었으나, 장보고 선단과 거래하고자 하는 이가 많아 미리 비단을 내고 현물을 확보하고자 하는 이들이 증가했다. 즉 장보고 선단의 장악력과 세력이 동아시아의 무역 흐름에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일본의 귀족들과 조정에도 연관되어 일본인들에게는 상징적 인물이 된 것이다.
일본의 승려 엔니 동상.
적산대명신이 되다
일본 교토에서는 매달 5일 거래 대금을 정산하는 관행을 지금도 지켜오고 있다. 이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일본에서 전해지는 속설이 하나 있는데, 매달 5일 적산대명신의 기념일을 참배하면 사업이 번창하고 외상값 수금이 잘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적산대명신은 누구인가?
적산대명신을 모신 교토 천태종 사원 적산서원은 천태종 3대 좌주 엔닌이 교세를 확장한 곳으로, 그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엔닌은 그가 중국에서 신라명신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했고, 입적하면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를 기릴 것을 명했다. 신라명신이 장보고라는 것은 많은 연구를 통해 알려져 있다. 즉 엔닌은 장보고의 은혜를 일본의 신으로 남겨 후대에도 기억하길 염원했던 것이다.
장보고가 해상왕으로 활동하고, 동아시아 무역에 큰 역할을 한 것은 많은 이가 단편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여 활동했는지에 대해서는 상세히 정리되어 있지 않다. 이는 필히 후대에도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장보고는 당시 무역을 통해 큰 부를 얻었지만 그럼에도 사람을 연결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국가 간 통상환경에서도 잊지 말아야 할 메시지다.
전라남도 완도에 있는 장보고 동상. 사진 제공 장보고기념관
장보고 무역선. 사진 제공 장보고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