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무역분쟁의 영향은 어디까지 미칠까? 두 나라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은 자명하다. 경제 무역 강대국인 미국과 중국은 각자 경제적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다. 양국의 행보와 영향은 이러한 경제적 네트워크를 따라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 역시 시장과 협력 대상의 안정성과 지속 가능성을 다시 검토할 때다.
국제경제 정세 변화와 동아시아
주요국의 동아시아 재인식
① 중국
동아시아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가장 먼저, 가장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선 국가는 중국이다. 유라시아 대륙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국가이자 육지 15개국, 바다 건너 경계까지 합쳐 17개국과 국경을 맞대는 중국에 러시아와 북한을 포함하는 동아시아 지역의 경제적·전략적 중요성은 따로 강조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실제로 중국의 수출에서 아시아 비중은 2008년 46.4%에서 48.5%로 9년간 2.1%P 증가했다. 특히 아세안의 비중은 8.0%에서 12.3%로 4.3%나 늘어났다. 반면 EU(28개국)는 20.6%에서 16.5%로 4.1%P나 줄어들었다. 북미의 비중은 같은 기간 20.2%에서 22.0%로 1.8%P 늘긴 했지만, 2015년까지만 해도 20%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답보 상태를 보였다.
중국의 대아세안 협력 노력은 말 그대로 전방위적이다. 우선 통상 분야에서 중·아세안 FTA가 발효된 지 오래됐고, 현재 후속협상이 진행 중이다. 싱가포르 등 아세안 개별 국가와 FTA도 발효됐거나 추진하고 있다. 또 아세안을 포함한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egional Comprehensive Economic Partnership, RCEP)도 적극적으로 추진 중이다. 심지어 최근에는 아세안 국가 상당수가 개입된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와 관련해 영유권 문제 자체를 해결하지는 못하더라도 평화적으로 이용하도록 노력하자며 공동 개발 및 활용에 힘쓰고 있다.
중국의 대아세안 협력 노력은 일대일로의 한 축으로 추진하는 ‘21세기 해상실크로드’와 메콩강 개발계획에서 정점을 이룬다. 현재 인도네시아 고속철도와 중국 윈난성에서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까지 연결되는 고속철도망 등 다양한 인프라를 건설하고 있다.
중국은 베트남 등과 갈등의 역사가 존재하는 데다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 등이 엉켜 있어 중국의 대동남아 ‘접근’ 전략이 뜻대로 이루어질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그러나 그간 경제적 성과에 대한 자신감과 중·동남아 간 경제 관계 확대, 그리고 보호주의 대두에 대한 공동 대응 필요성 등으로 인해 대동남아 개방 및 협력을 더욱 강화할 것이다.
한편 중국은 대동북아 협력 역시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사드를 둘러싸고 갈등이 표출됐다. 그러나 한국과의 갈등 지속이 중국의 주변국 정세를 악화하는 것은 물론 북핵 문제나 미·중 통상분쟁 등에서 여러모로 불리하다는 판단에 따라 한국에 협력적 태도로 선회하고 있다. 협력 관계를 유지할 필요는 북한과 러시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② 일본
일본은 동아시아 지역 협력에 대체로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여 왔다. 일본의 수출에서 중국이 중요한 존재이긴 하지만, 대미 수출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일본의 대미 수출의존도는 19.3%, 대중 수출의존도는 19.0%다. 특히 일본의 대중 수입이 소비재를 중심으로 빠른 속도로 늘어나면서 대중 무역수지가 적자로 돌아선 상태이고, 대한국 수출도 예전만 못한 실정이다.
2012년 극한 상태까지 치닫던 중·일 영토분쟁 및 역사 문제 갈등 등이 상황을 더 증폭했지만, 중·일 무역통상 분야 갈등과 비협조의 바탕에는 무엇보다도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위상 저하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최근 9년간(2008~2017) 아시아의 수출과 수입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2.1%P, 2.2%P까지 줄어들었다.
특히 일본 대외경제 활동의 안마당이던 대동남아 무역의 부진은 일본 경제의 위상 하락을 잘 보여준다. 동남아의 수출에서 일본 비중은 2008년 11.5%에서 2017년 7.4%로 5.9%P나 하락했다. 동남아의 수입에서 일본 비중은 9년간 4.8%P나 줄었다. 아세안과의 FTA 타결, 메콩강 개발계획을 둘러싼 일본과 중국의 주도권 경쟁은 어떤 점에서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③ 동남아
최근 들어 국제경제적 역할과 중요성이 커지는 곳, 이를테면 몸값이 올라가는 곳은 동남아 지역이다. 국제무역에서 아세안의 비중 확대는 가장 눈에 띄는 변화 중 하나다. 일본은 물론, 일대일로를 표방하는 중국의 대동남아 협력 노력은 날이 갈수록 더 적극적으로 추진될 것이다. 2016년 대만 정부는 대동남아 경제협력 강화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신남향정책’을 시작했다. 우리 정부 역시 ‘신남방정책’을 핵심 대외경제 전략으로 설정해 추진 중이다.
동남아 지역은 오래전부터 외교·안보 면에서 비동맹 및 중립외교를 추진해왔고, 경제적으로는 발전 수준과 국가 규모의 다양성을 고려해 아세안 공동시장이라는 경제 통합의 노력을 지속해왔다. 과거 아세안은 동아시아의 평화와 협력을 촉진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해왔으나, 실질적인 힘, 즉 경제력이 뒷받침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최근 경제 발전과 국제무역 성과가 두드러져 글로벌 무역환경 불안정과 동북아 지역 협력의 한계를 보완해줄 동남아의 전략적·경제적 가치도 높아지고 있다.
④ 한국
이제 우리 차례다. 한·중 수교를 계기로 과거의 수출드라이브를 ‘중국 활용하기’ 전략으로 전환한 한국은 중국을 생산 거점 및 소비시장으로 삼고, 미국과 EU 등을 최종 시장으로 삼아 비교적 양호한 발전을 이룩해왔다. 이런 한국에 최근의 상황은 도전과 기회가 모두 존재한다. 한국은 비중화권 국가 가운데 중국과 가장 성공적인 협력 사례를 만들어왔다. 2018년 1월부터 10월까지 중국과 홍콩이 한국의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5%에 이르렀다. 한국은 2013년 이후 6년째 중국의 수입 1위 국가다. 한국의 대중 투자가 예전에 미치지 못한다고는 하나, 중국은 여전히 사실상 최대 투자 상대국 중 한자리를 유지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중국의 대한국 투자도 늘어나고 있다.
한국은 최근 베트남 등 중국 이외 지역으로 투자 진출과 수출을 다각화하고 있다. 그 이유로 2017년 전후 발생한 사드 사태가 거론되고 있고, 실제로 투자 다변화의 중요한 이유이긴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 기업의 진출 지역을 동남아 등지로 다변화한 데는 중국의 글로벌 경제 역할 변화, 즉 글로벌 생산 기지에서 글로벌 개발 및 시장 중심지로의 전환과 글로벌 통상환경 변화에 따른 동남아의 투자 가치 상승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신남방 지역은 어느덧 한국 대외경제의 중요한 대상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터져 나온 미·중 통상분쟁과 보호주의의 대두는 우리에게 무역 규범과 시장을 재점검할 과제를 던져주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무역의존도가 말해주듯이 한국은 자유무역으로 성장해왔고, 성장의 기회를 찾았다. 다행히 부상하는 동아시아에서 자유무역 체제를 부정하는 국가는 없다. ‘국가자본주의’로 집중 공격을 받는 중국이 오히려 미국을 대신해 시장 개방, 무역 원활화, 국제협력을 외치는 역설적 상황은 동아시아 경제의 진행 방향을 함축해서 보여준다.
앞으로 우리의 무역 대상에서 중국과 동남아 시장의 위치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여러 우려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규모의 경제 효과와 정보기술 혁명, 정부 정책 등을 고려하면 중국이 앞으로 상당 기간 6% 중간 수준의 성장률을 이어갈 가능성은 매우 크다. 신산업 분야를 중심으로 중국이 연구개발과 생산, 시장을 주도할 개연성도 높다.
다음은 아세안이다. 우리 기업의 베트남 등을 향한 생산 기지 이전과 아세안 소비자의 수요 확대로 한국의 수출에서 아세안 비중은 2008년 11.7%에서 2017년 16.6%로 4.9%P나 늘어났다. 앞에 밝혔듯이 우리 기업의 아세안 시장 진출은 상당 부분 한·중의 국제분업을 아세안 지역으로 확대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실제로 중국에 진출한 한국의 섬유 의류나 전자 분야 관련 기업 중 상당수가 한국·중국·베트남 등 다국적 생산과 공급망을 운용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동아시아 지역과 국가를 별개로 생각해선 안 되고 하나의 네트워크, 즉 통으로 놓고 봐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 대외경제 정책에 대한 시사점
이상의 논의를 통해 ①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글로벌 경제에서 동아시아, 특히 중국과 아세안의 성장세가 두드러졌고, ② 역내 주요국은 각자 이유는 다르지만, 동아시아 시장 진출과 지역 협력 노력을 강화하고 있고, ③ 최근 미·중 무역분쟁과 보호주의의 대두는 이러한 역내시장 개척과 지역 협력을 촉진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밝혔다.
앞으로 동아시아 국가의 상호 시장 개척과 협력 강화는 피할 수 없는 대세다. 한·중·일·대만 간에 형성된 동아시아 지역 가치사슬(Value Chain)은 동남아가 포함되면서 더욱 확대·심화할 것이다. 북한이 개방의 길로 들어서면 북한도 이 동아시아 지역 가치사슬의 한 축을 담당할 것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기회를 이용하며 나아가 또 다른 기회를 만들어내는 일이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이러한 기회를 잘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세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첫째, 앞으로 동아시아에서 지역주의는 불가피한 추세이자 중요한 과제가 되겠지만, 이 지역주의는 반드시 개방적이어야 한다. ‘개방적 지역주의’는 APEC의 기본 원칙이기도 하다. 또 동아시아지역 국가들 하나하나가 자유무역 시스템에서 성장할 수 있었고, 앞으로도 이 지역의 역외시장 의존도는 높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타깃 시장과 관련해 동아시아 지역 국가를 별개의, 독립된 시장으로 봐서는 곤란하다. 중국은 이미 꽤 오래전부터 자력으로 해외시장을 개척해왔다. 중국·홍콩·대만은 사실상 하나의 시장이나 마찬가지다. 동남아의 부상은 중국과의 경제 교류가 촉진했고 이제 중·동남아 간 교류를 이끌 것이다. 요컨대 앞으로 동아시아 시장은 네트워크 혹은 조달·생산·공급이 하나의 사슬로 연결된 곳이라는 시각이 필요하다.
셋째, 같은 동아시아 지역이라 할지라도 동북아와 동남아 간 지정학 및 경제협력 구조의 차이에 주목해야 한다. 동북아와 동남아는 같은 듯 다르다. 강대국이 모여 있는 동북아 지역은 통합 경제력은 크지만, 협력(혹은 통합) 유인은 크지 않다. 반면에 아세안이 주도하는 동남아 지역은 아직 경제력이 부족하지만 협력 촉진 유인은 매우 풍부하다. 이러한 동북아와 동남아 간 지정학적·지경학적 구도의 차이는 앞으로 동아시아 협력 정책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참고 사항이 될 수 있다.
2019년 한국에서 열릴 한국과 아세안 간 정상회담은 동아시아, 특히 동남아의 전략적 가치를 되돌아보는 계기라는 점에서 우리 대외경제 정책에 중요한 기회다. 어려운 환경을 기회로 만드는 힘은 좀 더 넓은 시야에서 지역 판세 변화를 잘 살펴보고 한발 앞서 미래를 준비하는 데서 나온다.
글 정환우 KOTRA 중국조사담당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