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은 언제부터 다른 나라와 교역을 했을까?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유물은 전부 우리가 만든 것일까? 경주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국보 제193호 유리병과 잔은 교역사 한 페이지에 남은 발자취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4세기 로마에서 만든 유리병, 월터스 아트 뮤지엄 소장
로마에 원형을 둔 신라의 유리병
1975년 10월 발굴 조사 당시, 삼국시대 신라의 무덤인 황남대총 98호 남분에서 연한 녹색의 유리병 1점과 잔 3점이 나왔다. 국보 제193호가 바로 그 주인공. 이 중 유리병은 목이 가늘고 주둥이 끝부분을 새의 부리처럼 좁게 오므린 모습이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 ‘봉수형(鳳首形) 유리병’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유리병은 로마시대 통의 용기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신라의 유리제 용기는 유사한 형태뿐 아니라 제작 기법과 성분 분석 결과로도 서역과 교역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학계에서는 이 유물이 대롱을 불어서 용기를 만드는 방법을 개발한 로만 글라스 또는 이를 한층 더 발전시킨 사산조페르시아(226~651)의 유리, 즉 사산 글라스일 것으로 추정한다. 서역에서 만든 유리제 용기는 당시 세계적 명성을 떨친 고급 공예품으로, 육로의 실크로드나 해상 교역로를 따라 신라의 경주, 더 멀리는 바다 건너 일본에까지 이르렀다.
문화를 더욱더 풍요롭게 하는 무역
신라의 수도인 경주가 실크로드의 종착점이자 시작점이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바 있다. 왕릉급 무덤에서 다수 발견되는 유리제 용기가 이를 뒷받침한다. 이국적인 유리제 용기를 함께 묻음으로써 신라의 문화는 더욱더 풍성해졌다.
황남대총은 신라 시대 최대의 고분으로, 남분에는 남자가, 북분에는 여자가 묻혀 있어 신라 왕족 부부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특히 남분은 4세기에서 5세기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 유리병과 잔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1,500여 년 전 서역에서 유리그릇을 소중하게 가져와 신라 왕실에 판매하는 상인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소장자가 이 유리그릇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는 깨진 손잡이를 금실로 정성껏 수리한 점과 소장자와 함께 부장하도록 한 권력자의 지시에서 짐작할 수 있다.
유리병과 잔을 소장자의 부와 권위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이용한 것이다. 수천 킬로미터의 거리와 수천 년의 세월을 지나온 작은 유리병이 모험담을 들려주고 있다.
명칭 경주 98호 남분 유리병 및 잔(慶州 九十八號 南墳 琉璃甁 및 盞) 종목 국보 제193호 분류 유물 시대 신라 시대
유리병 높이 25cm, 배 지름 9.5cm,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유리잔 ① 높이 12.5cm, 구연부 지름 10cm, 문화재청 제공
유리잔 ② 높이 10.5cm, 구연부 지름 9.5cm, 문화재청 제공 유리잔 ③ 높이 8cm, 구연부 지름 10.5cm, 문화재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