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부터 시작된 WTO 한·일 공기압 밸브 분쟁에서 우리나라가 최종 승소했다.
이번 승소로 우리 정부는 공기압 밸브에 대한 덤핑방지관세 부과 처분을 유지할 수 있으며,
불공정 무역으로부터 국내 산업을 보호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글 김두식(법무법인 세종 대표변호사), 김재희(법무법인 세종 변호사)
WTO 분쟁 3년 6개월 끝에 승소 확정
2019년 9월 30일 세계무역기구(WTO) 분쟁해결기구가 정례회의에서 일본산 공기압 밸브 분쟁에 대한 WTO 패널 및 상소기구 보고서를 채택했다. 2016년 3월 일본 정부가 우리 정부의 일본산 공기압 밸브에 대한 덤핑방지관세 부과 조치를 문제 삼으며 WTO에 제소한 지 3년 6개월 끝에 분쟁이 최종 확정된 것이다.
일본 정부는 WTO에 제소하며 대한민국 정부의 덤핑방지관세 부과 조치가 WTO 협정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WTO 분쟁의 판단 기구인 패널 및 상소기구는 일본 측이 제기한 주요 쟁점에서 우리 정부의 손을 들어줬다. 일부 절차적·실체적 쟁점에서 문제는 있었으나, 전체적으로는 반덤핑조치의 적법 타당성이 인정됐다. 우리 정부로서는 일본산 공기압 밸브에 부과 중인 덤핑방지관세를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 정부의 반덤핑 조치 및 일본 정부의 제소
일본산 공기압 밸브를 둘러싼 한·일 양국 사이의 분쟁은 2013년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3년 12월 국내 공기압 밸브 생산자들은 일본 생산자의 덤핑으로 국내 산업이 피해를 입고 있다는 이유로 무역위원회에 반덤핑 조사 개시를 신청했고, 2014년 2월 무역위원회는 일본산 공기압 밸브에 대한 덤핑 조사를 개시했다.
덤핑방지관세란 외국 물품이 정상 가격 이하로 수입되어 국내 산업이 실질적 피해를 받거나 받을 우려가 있다는 점이 조사를 통해 확인되고, 국내 산업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될 때 부과하는 것이다. 그 경우 덤핑 물품의 정상 가격과 덤핑 가격 사이의 차액에 상응하는 덤핑마진을 관세로 부과하게 된다.
무역위원회는 반덤핑 조사를 개시한 후 11개월 동안 조사, 예비 판정 및 공청회 과정을 거쳤고, 이를 통해 일본 공기압 밸브 생산자들이 국내시장에 제품을 덤핑했으며 이로 인해 동종 물품을 생산하는 국내 산업이 피해를 받고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이에 무역위원회는 일본산 공기압 밸브에 덤핑방지관세를 부과할 것을 최종적으로 건의했다. 기획재정부는 2015년 8월 무역위원회의 판정을 토대로 일본산 공기압 밸브 생산자에 대해 덤핑방지관세(11.66~22.77%)를 부과하는 처분을 내렸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일본산 공기압 밸브에 대한 덤핑방지관세 부과 조치가 WTO 협정에 위배된다고 주장하면서 우리 정부에 협의를 요청했다. 이로써 WTO 한·일 공기압 밸브 분쟁이 개시됐다. 한·일 양국이 양자 협의에서 합의에 이르지 못하자 일본 정부는 WTO 분쟁해결기구에 패널 설치를 요청했고, 분쟁해결기구가 구성한 패널이 한·일 공기압 밸브 분쟁을 심리하게 됐다.
WTO 패널의 판정 및 일본 정부의 상소
2018년 4월 12일 패널은 일본 정부가 대한민국 정부의 반덤핑조치가 WTO 협정에 위배된다는 취지로 제기한 총 13개의 쟁점 중 7개 쟁점은 각하, 3개 쟁점은 기각 판정을 내렸다. WTO 패널은 3개 쟁점에 관해서만 일본 측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중에서 2개 쟁점은 절차에 관한 것이었고, 실체적 쟁점은 1개에 불과했다.
제소국인 일본이 제기한 쟁점 중 다수가 각하된 것은 WTO 분쟁으로서는 이례적 결과다. WTO 패널이 일본 측 주장을 판단하지도 않고 각하한 이유는 WTO 분쟁의 제소장 역할을 하는 패널 설치 요청서에 구체적 근거를 충분히 적시하지 않아 우리 정부의 방어권이 침해됐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비록 이러한 WTO 패널의 각하 판정은 기존 판례의 해석과 다르다는 이유로 WTO 상소기구에서 번복되기는 했으나, 분쟁 전략 측면에서는 일본 정부를 크게 당황시킨 계기가 됐다.
결과적으로 WTO 패널은 실체적 쟁점 1개에 관해서만 WTO 협정 위반을 인정했고, 이를 제외한 나머지 실체적 쟁점에 관해서는 우리 정부의 반덤핑조치 적법·타당성을 확인했다. 문제가 된 1개의 쟁점도 인과관계 분석 과정의 일부 오류에 불과했다. 덤핑방지관세를 부과하기 위해서는 덤핑으로 인해 국내 산업에 피해가 발생해야 하는데, 무역위원회가 덤핑 물품이 국내 동종 물품 가격에 미친 영향을 검토하며 사용한 분석 방법에 일부 오류가 있어 인과관계를 판정하기에 흠결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WTO 패널이 문제 삼은 일부 분석 방법만 시정하면 덤핑방지관세 부과 조치는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정부는 WTO 패널 판정에 불복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다만 일본 정부가 불복해 상소를 제기하자 전략적으로 맞상소를 제기했다. 이로써 한·일 양국은 WTO 상소기구에서 다시 한번 승부를 가리게 됐다.
우리 정부의 승소를 확정 지은 WTO 상소기구의 판정
2019년 9월 10일 WTO 상소기구는 우리 정부의 덤핑방지관세 부과 조치가 WTO 협정에 합치한다는 당초의 WTO 패널 판정을 대부분 유지 또는 지지했다. WTO 상소기구는 일본 측 주장을 각하한 WTO 패널 판정은 번복했지만, 우리 정부의 반덤핑 조치에 관해서는 여전히 그 적법·타당성을 인정했다. 특히 WTO 상소기구는 무역위원회의 인과관계 분석에 오류가 있었다고 판단한 WTO 패널 판정을 파기했다. 무역위원회의 인과관계 판단이 적법했다고 인정한 것이다.
WTO 패널은 무역위원회가 덤핑 물품이 국내 동종 물품의 가격에 대한 효과를 분석하며 사용한 방법에 관한 오류로 인해 인과관계 분석에까지 흠결이 발생했다고 판단했으나, WTO 상소기구는 달리 보았다. 비록 무역위원회의 가격효과 분석에 문제는 있었지만, 인과관계 분석에까지 오류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로써 덤핑과 국내 산업의 피해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판단한 무역위원회의 판정에 흠결이 없었다는 점이 WTO 상소기구 판정을 통해 최종적으로 확인됐다. 즉 WTO 상소기구의 판정에 따라 우리 정부가 덤핑방지관세 부과 처분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음이 더욱 분명해진 것이다.
불공정 무역행위로부터 국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초석
공기압 밸브는 압축 공기를 이용해 기계적 운동을 일으키는 공기압 시스템의 구성 요소로, 자동차, 일반 기계 및 전자 등 분야에서 자동화 설비의 핵심 부품이다. 다른 소재·부품·장비 산업과 마찬가지로 일본 생산자가 우위를 점하고 있는 분야다. 실제로 국내 공기압 밸브 시장에서는 일본산 제품이 70% 이상의 비중을 차지할 만큼 독자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국내 생산자의 기술력 강화 및 국산 제품의 품질 향상에 따라 일본산 제품의 위치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국내 생산자는 시장점유율이 높아졌고, 일본 생산자는 점차 그 비중이 낮아졌다. 그러자 일본 생산자는 정상 가격보다 낮은 가격에 수출하는 덤핑 행위로 국내시장에서의 지위를 지키고자 했다. 국내시장에서는 일본산 제품이 평균적으로 국산 제품에 비해 높은 가격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일본 생산자들은 경우에 따라 국산 제품보다 낮은 가격에 공급하겠다는 조건을 내세우기도 했다.
이번 WTO 공기압 밸브 분쟁은 불공정 무역행위에 맞서 국내 산업을 보호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WTO 분쟁에서 패소해 덤핑방지관세 부과 처분이 취소되는 경우에는 국내 공기압 밸브 시장을 일본 생산자에게 내어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일본 생산자가 국내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감행한 덤핑을 막아낸 것이다. 이번 사건이 향후 여타 분야에서 동일한 형태의 불공정 무역행위가 있을 경우 우리 산업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초석을 마련한 것이라고 평가받는 이유도 그래서다.
최근 통상환경에의 시사점
세계적으로 보호무역주위가 강화되면서 통상환경에 여러 어려움이 발생하고 있다. 특히 최근 일본과의 관계에서는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산업에서 필수적으로 사용하는 소재에 관한 수출 규제 강화로 인해 우리 기업이 직접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일본산 소재에 의존해오던 국내 기업 중에는 당장 제품 생산 일정에 차질을 감수해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우리 기업이 겪고 있는 어려움은 직접적으로는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에 따른 결과이기는 하지만, 그동안 국내 산업이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탓도 있을 터다. 물론 그 이유를 불공정 무역행위에서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국내 공기압 밸브 시장에서와 같이 국내 생산자와 외국 생산자사이에 경쟁이 발생했을 때에는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국내시장에서 언제라도 발생할 수 있는 불공정 무역행위에 대해 향후에도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