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영토는 현재 대한민국에 속해 있지 않기에 동시대 통일신라의 역사에 비해 연구 성과가 현저히 부족하다.
그럼에도 학자들의 꾸준한 관심과 연구를 통해 조금씩 성과를 보이고 있다.
중앙아시아와의 교역품이던 담비 모피를 통해 발해 대외무역의 양상을 살펴본다.
글 김현경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연해주에 위치한 발해 고성 터 노보고르데예프카 출처: 동북아역사재단(왼쪽)
크라스키노발해성 유적지 출처: 동북아역사재단(오른쪽)
발해의 교역로, 담비 모피의 길
담비 모피는 서기 1세기경부터 지금까지 고귀함의 상징으로 부귀한 자들이 애용하는 상급 모피다. 발해가 활동하던 7세기부터 10세기 사이에도 담비 모피의 인기는 엄청났다. 특히 유럽의 귀족들에게는 최고의 사치품이자, 그들의 지위와 부를 과시하는 상품이었다.
발해의 담비 모피는 그 품질이 매우 우수했다고 전해진다. 이로 인해 발해의 담비 모피는 조공으로 바치거나 진귀한 무역품으로 취급되었다. 중국 북송 시대 왕흠약과 양억이 편찬한 역사서 <책부원구(冊府元龜)> 권971 조공 4에는 발해가 사신을 보내 담비 가죽 세 장을 보냈다고 적혀 있다. 그뿐 아니라 남시베리아 지역의 통치자도 발해의 담비 모피를 애용했다고 당나라 역사서 <신당서(新唐書)>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발해는 물론 연해주 주변 지역에서도 담비 모피를 생산했는데, 이 일대 전역에서 생산한 모피가 모두 소비될 만큼 그 수요가 세계적으로 많았을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정한다. 그 결과 ‘초피로(貂皮路)’라고 부르는 담비 모피 교역로가 실크로드와 같이 형성됐다. 이렇듯 담비 모피는 중앙아시아에서 귀중한 무역품으로 여겨졌으며, 품질이 뛰어난 모피를 생산하던 발해는 이 길을 통해 자연스레 중앙아시아로 진출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발해의 담비 모피는 어떤 경로로 교역이 이뤄졌을까?
문화 접촉을 넘어 상생번영의 공동체로
위의 기록 외에도 동남아시아의 여러 왕조와 만난 기록이 전해지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로 교류했는지는 남아 있지 않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현대 이전 한반도와 동남아시아의 관계는 문화 접촉에 머물렀음을 알 수 있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끊임없이 탐구해왔으나 직접적 관계는 맺지 못한 것이다. 물리적 거리라는 한계도 있었으나 비단 거리만의 문제는 아닐 터다. 당시 국제적 상황 그리고 전혀 다른 기후와 문화를 극복하지 못했기에 좀 더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싶다.
최근 우리나라와 동남아시아 지역의 문화 교류가 늘어나고 있다. 우리나라 길거리에는 베트남, 태국 등 동남아시아 음식점이 즐비하다. 현재 동남아시아 국가에서는 K팝 등 한류 문화가 인기를 끌고 있다. 문화뿐이 아니다. 국가 차원의 노력과 함께 사회, 경제 등 전 분야에서 교류가 확장되고 있다. 근대 이전 한반도와 동남아시아의 한정적인 교섭사를 생각하면 수교 이후 우리나라와 동남아시아의 관계는 가히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다. 미래에는 동남아시아와의 교류가 어떤 형태로 발전할지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지금처럼 교류를 확대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면, 이웃을 넘어 절친한 친구와 같은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