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eat Exhibition of Industry of All Nations.
최초의 세계박람회인 1851년 영국 런던 세계박람회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
박람회 기념 석판화 세트 중 한 장이다.
이 그림은 최초의 국제 박람회인 1851년 영국 런던 세계박람회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정식 명칭은 ‘The Great Exhibition of Industry of All Nations’다. 우리나라에서는 구한말부터 일본식 번역으로 ‘런던 만국박람회’로 불리다가 요즘은 ‘런던 세계박람회’ 혹은 ‘런던 대박람회,’ ‘런던 엑스포’ 등으로 불리고 있다. 박람회 자체의 원조는 프랑스였다. 예술작품과 그 밖에 진귀한 물건들을 전시하고 거래하는 장에 공업적 발명품을 추가하고 여러 볼거리와 이벤트를 곁들여서 축제처럼 만든 산업박람회를 18세기부터 열기 시작한 것이다. 영국도 19세기부터 이것을 본받은 국내 산업박람회를 열어오고 있었다.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세계 최대의 공업국으로 성장한 영국은 이제 그 힘을 만천하에 과시하는 동시에 외국의 산업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박람회를 국제화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 박람회의 규모는 엄청났다. 런던 하이드파크에 세워진 ‘수정궁(Crystal Palace)’은 길이가 동서로 564m에 달했다. 서쪽은 영국, 동쪽은 타국의 전시로 구성됐고 새로운 화학 재료와 기계 발명품, 염직·금속·유리·도자기 공업 등의 산물, 예술작품 등을 선보였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 그림에 나오는 것은 일종의 만남의 광장이었던 분수인데, 조각작품과 왕실 초상화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근처로 인도, 중국, 스위스 등의 전시장이 보인다.
그림이 묘사하는 박람회 모습도 흥미롭지만 그림의 정체도 흥미롭다. 박람회 기념 석판화 세트 중 한 장인 것이다. 요즘도 엑스포가 열리면 엑스포의 하이라이트를 담은 기념엽서 세트가 기념품숍에서 팔리는 것처럼, 당시에 런던박람회가 엄청난 인기를 끌자 기념 석판화 세트를 낸 것이다. 무려 170여 년 전에 이런 ‘현대적인’ 비즈니스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 그림 한 점으로도 1851년 런던 세계박람회가 현대성의 본격적인 발현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851년 런던 세계박람회는 여러 가지 면에서 현대인에게는 익숙하지만 그전에는 없었던 것들을 선보였다는 점에서 현대의 시작점 중 하나로 손꼽히는 사건이었다. 박람회를 위해 새롭게 세워진 수정궁부터 그랬다. 유리와 철골 등 건축 재료 면에서도 혁신적이었지만, 원래 하이드파크에 있던 나무들을 그대로 보전하면서 그 나무를 둘러싸고 건축물을 세우는 새로운 기술을 선보인 면에서도 그랬다.
이것은 국가의 힘을 과시하는 측면도 있었지만, 동시에 미래 산업과 문명에 대해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런던 세계박람회의 여파는 엄청났다. 무려 640만 명의 관람객이 박람회를 찾았고 다른 서구 열강들도 경쟁적으로 세계박람회를 열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4년 후인 1855년에 파리 세계박람회(Exposition Universelle)를 연 뒤 1867년에 다시 열었으며, 영국도 1862년에 런던 세계박람회를 다시 열었다. 또한 1873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빈에 세계박람회를 열였고 미국은 1876년에 필라델피아 박람회로 열강들의 세계박람회 열풍에 합류했다.
1867년 파리 세계박람회는 파빌리온 방식이 도입돼 참가국들은 자국의 전통을 드러내는 전시관 건축에 힘을 썼다. 1876년 미국 독립 100주년 기념 필라델피아 박람회에서는 무려 167개의 파빌리온이 건설되기도 했다. 한국은 구한말인 1893년 조선으로서 미국 시카고 박람회에 참가함으로써 박람회에 처음 진출했다. 그리고 189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열린 파리 세계박람회는 그때 세워진 에펠타워로 잘 알려져 있다.
서구 열강의 우월주의, 제국주의 합리화 등 세계박람회 역사의 이면에는 빛 못지않게 어둠도 존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박람회는 발명과 혁신의 의욕을 고취하고 미래 비전을 제시한 것도 사실이고 빛과 어둠 모두가 전 지구적 현대성을 형성한 것이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