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기업은 유럽 등에서 도입하려는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때문에 걱정이다. 탄소비용 부담으로 경쟁력을 잃을까 염려하고 있다. B기업은 유럽에 수출하는 기업이다. 독일,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연합(EU) 차원에서 공급망 인권 실사가 의무화돼 거래처로부터 인권 실사를 요구받고 있다. 인권경영 체계를 수립하지 못하면 공급망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크다. C기업은 국제거래 비중이 높은 중소기업이다. 규모가 작아 내부에 통상팀이 없고, ESG 경영의 도입도 미루고 있다. ESG가 새로운 통상장벽이 된다는 언론보도를 보고 고민이 많다. 이는 새로운 통상질서에 직면한 국내 기업들의 상황이다.
과거의 통상질서는 관세를 내리거나 폐지하고 국가 간 장벽을 낮춰 시장 접근성을 확대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환경, 사회, 지배구조와 같은 ESG는 통상질서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세계무역기구(WTO)가 1994년 ‘무역과 환경위원회’를 구성해 다자무역체제와 환경보호의 조화를 모색했고, 2001년 도하개발어젠다를 출범시켜 환경문제를 공식 의제로 삼았지만 환경, 지속가능성을 무역과 연계하려는 시도는 쉽지 않았다. 논의만 무성할 뿐 결실이 없었다. 자유무역의 가치가 우선한 시기여서 지속가능성을 무역 기준으로 삼는 국제적 합의는 어려웠다. 그러나 분위기가 달라졌다. WTO 안에서 2020년 ‘무역과 환경 지속가능성에 관한 회의’ 및 ‘플라스틱 오염방지 비공식대화’가 발족했다. 이번에는 관련 기준이 수립될 것으로 전망된다.
자유무역협정(FTA)은 보다 적극적으로 환경·노동을 비롯한 ESG 의제를 포함시키고 있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대체하는 미국·멕시코·캐나다 협정(USMCA)이 2020년 7월 발효했는데, 여기에는 강력한 환경 및 노동 챕터가 들어갔다. EU의 경우 2010년 체결한 한·EU FTA에 지속가능발전 챕터를 포함시킨 이래, 주요국과의 FTA에서 지속가능성을 강조하고 있다.
EU, 미국 등은 강화된 ESG 기준을 법규화하고 있다. 그중에는 국제 거래 및 무역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많다. 먼저 환경 분야의 여러 법규는 새로운 무역장벽이 되고 있다. 탄소국경조정제도가 대표적이다. 탄소국경조정제도는 어느 국가가 온실가스 규제를 통해 자국 상품에 탄소비용을 부과하고 있을 때 거래 상대방도 상응하는 탄소비용을 지불하도록 하는 제도다. EU는 2023년부터 과도적 시행(보고의무만 부과)을, 2026년부터 본격 시행을 예정하고 있다. 나아가 EU는 2021년 ‘Fit for 55’라는 환경 관련 입법 패키지를 시작했다. 온실가스 배출량을 2030년까지 1990년 대비 55% 감축하기 위한 다양하고 방대한 입법안이다. 에코디자인 규정 및 탈플라스틱 법규도 속속 만들어지고 있다. 미국도 환경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지난해 제정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만 보더라도 인플레이션 감축이라는 명분 아래 기후변화 대응, 녹색에너지 전환 등 환경 목적의 규범들이 포함돼 있다.
사회 영역의 규제도 국제거래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공급망 실사법이다. 공급망에 대한 인권 실사를 의무화하는 이 법은 국제거래의 상대방에게 인권 실사를 요구한다. 인권위험이 중대한 경우 거래중단도 가능하다. 노동과 통상의 연계도 일반화되고 있다. 나아가 무역과 성평등 이슈도 제기되고 있다. 2022년 상반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무역위원회에서는 무역에서의 성별 격차 해소에 관해 논의했다. 영국과 일본, 영국과 뉴질랜드 사이에 체결된 FTA에는 ‘무역에서의 성별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조항이 포함됐다.
지배구조 개선도 오래된 통상 이슈의 하나다. OECD 뇌물방지협약으로 대표되는 부패라운드는 국제거래의 부패관행을 퇴치하려는 국제규범이다. 1999년에 채택된 OECD 기업지배구조 원칙은 세계경제의 글로벌화 가운데 거버넌스의 중요성을 제기한 규범이다. ESG 정보공시가 의무화되면서 국제 거래 및 무역에서의 ESG도 강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EU, 미국 등은 강화된 ESG 기준을 법규화하고 있는데
국제거래 및 무역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 많다.
국내 기업은 이제 다양한 통상규제에 촉각을 기울여야 한다. 통상조약 및 각국의 ESG 규제가 국제 거래 또는 무역에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통상 컴플라이언스’를 구축해 공급망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해야 한다. ESG가 해외시장의 진입장벽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기회가 될 수도 있다. ESG 경영을 도입할 경우 중국, 인도 등에 편중돼 있던 글로벌 공급망에서 기회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국제거래는 지속 가능한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엔진”이라고 표현한다. 국제상업회의소(ICC)는 최근 지속 가능한 무역과 무역금융에 관한 규정을 제안했다. 바야흐로 ‘지속가능 무역’의 시대가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