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이슈 팩트 읽기 전쟁이 바꾼 세계 에너지 안보 질서 지정학적 위기 속 ‘에너지 안보’가 곧 ‘산업 경쟁력’… 공급망 다변화 서둘러야
이재명 대통령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5월 19일 경북 안동의 한 호텔에서 공동 언론 발표를 하고 있다. 뉴스1

2월 28일(이하 현지시각)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촉발된 이란 전쟁이 세계를 전례 없는 복합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이란 해협청이 전 세계 원유 물동량의 약 20% 이상이 통과하는 핵심 길목인 호르무즈해협을 ‘통제 해역’으로 선포하고 사실상 봉쇄 조치에 나서면서, 글로벌 공급망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충격은 즉각 거시 경제지표의 발작으로 이어져, 한국의 4월 생산자물가지수는 외환 위기 이후 약 28년 만의 최고치인 128.43으로 치솟았다.

이번 사태는 예사롭지 않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지난 4월 “전 세계 33개국을 포괄하는 자체 거시 경제 모형(GVAR) 분석 결과, 호르무즈해협 봉쇄가 장기화하고 카타르 등 주요 에너지 시설에 대한 공격이 확대되면, 국제 유가는 배럴당 최고 174달러까지 폭등하는 역사상 유례없는 위기 상황을 도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수출 주도형 경제이자 에너지 수입의존도가 절대적인 한국에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다. 글로벌 8대 해상 병목 지점(choke point) 중 수에즈운하, 바브엘만데브해협, 호르무즈해협에 위협이 집중돼 있고, 효율성만 좇아 설계된 현재의 물류 경로가 얼마나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는지 그대로 드러냈다. 김연규 한양대 국제대학원장은 “이번 전쟁은 단순한 지정학적 갈등을 넘어, 회복 탄력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새로운 산업 안보 지형으로의 재편을 전 세계에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속도 내는 공급망 재편과 한일 에너지 안보 동맹

당장 세계 액화천연가스(LNG)공급량의 20%를 차지하는 카타르라스 라판 가스 단지가 피격되면서 한국을 비롯해 세계 에너지 수급에는 초비상이 걸렸다.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정부와 정유 업계는 생존을 위한 최우선 전략으로 ‘공급망 다변화’와 ‘국제 공조’를 전면에 내세우며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5월 19일 경북 안동에서 열린 이재명 대통령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의 정상회담은 ‘한일 에너지 안보 협력’이라는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전략적 돌파구를 제시했다. 한국과 일본은 각각 세계 3위, 2위의 LNG 수입국이자 호르무즈해협을 통한 원유 수입 비율이 압도적인, 비슷한 경제구조의 국가다. 양국은 비상 상황 발생 시 원유 및 석유제품의 스와프(교환)와 상호 공급을 장려하고, 원유 조달 및 운송 분야에서 공동 협력하기로 뜻을 모았다. 특히 비축유 공동 활용 등 아시아 지역 전체의 회복력을 높이기 위해 일본이 제안한 ‘아시아 에너지·자원 공급망 강화 파트너십(POWERR Asia)’ 구상에 협력하며 고위급 ‘한일 산업 통상 정책 대화’도 출범하기로 했다. 이는 특정 지역에 편중된 화석연료 의존을 탈피하고 자원 무기화에 맞서 아시아 국가가 추진하는 새로운 안보 동맹이라는 성격이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반복되는 위기 노출된 화석연료 경제

한국과 일본이 에너지 안보 연대를 맺고 새로운 공급망 재편에 사활을 거는 이유는 두 국가 모두 에너지 시스템 저변에 자리 잡은 고질적이고 치명적인 대외 의존도 때문이다. 한국은 원유 수입의 69.1%를 중동에 의존한다. 석유 화학 산업의 기초 원료인 나프타 역시 호르무즈해협 인근 국가에서 수입하는 비율이 34.4%에 달할 정도로 위험 노출도가 극도로 높다. 일본 역시 나프타 공급 위기를 맞고 있다. 국경을 맞댄 우방국이 없는 지리적 환경에서 해상 수송로 마비는 국가 경제 전체의 마비로 직결된다. 게다가 이번 이란 전쟁은 군사 기술의 압도적 우위가 글로벌 물류 경로의 안전을 완벽히 보장할 수 없다는 뼈아픈 역설을 드러내기도 했다. 한국국방연구원(KIDA)은 “미국이 인공지능(AI)을 지휘 통제 체계에 도입해 개전 24시간 내 1000여 곳을 무력화하는 전례 없는 ‘AI 킬 체인’을 가동했지만, 전략적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며 “오히려 이란의 모자이크식 분산 타격이 중동의 주요 에너지 인프라 피격으로 이어지면서 글로벌 첨단산업의 조업 중단 위기로 전이되는 구조적 취약성을 적나라하게 노출했다”고 진단했다.

신물류망 개척과 복합 에너지 전략이 살길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지난 4월 보고서에서 “미국과 이란 간 휴전이 성사돼도 파괴된 에너지 인프라의 완전 복구에는 3~5년이 소요된다”며 “지정학적 리스크와 공급 차질로 세계경제에 배럴당 90달러 이상의 구조적 비용 프리미엄이 장기간 굳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공급망 다변화 전략은 단순한 에너지 수급 정책이 아닌 국가의 명운이 걸린 산업 재편 전략과 에너지 안보 전략까지 요구한다.

빙현지 산업연구원(KIET) 전문연구원은 “앞으로 정부와 기업은 지정학적 리스크를 실질적 비용으로 인정해야 한다”며 “과거 적기 공급 방식을 중단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핵심 병목 품목을 선제적으로 식별해 전략 재고를 쌓는 예비 생산 체계로 선회해야 한다” 고 말했다. 앤 소피 코르보 컬럼비아대 글로벌에너지정책센터 연구원은 통상과 인터뷰에서 “한국과 일본 같은 에너지 수입의존도가 높은 국가의 에너지 포트폴리오의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며 “핵심광물처럼 다른 대외 의존성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을 의식하면서 전기화를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연규 원장은 정책의 일관성을 주문했다. 김 원장은 “정권 교체 등 정치적 외풍에 흔들리지 않고 원유뿐 아니라 헬륨, 암모니아 등 필수 산업 소재의 비축일수를 의무화하고, 장기 계약 비율을 포함한 수입처 공급 집중도, 전력망의 유연성 자원 비율을 명시한 ‘국가 에너지 회복력 지수’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