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깊이 보기 특별기고 이상림 에너지경제연구원 에너지협력전략연구실장 공급망 다변화를 넘어 에너지 안보 협력으로, 한국의 대응 과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은 에너지가 언제든 지정학적 압박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최근 중동 정세 불안과 호르무즈해협 리스크 역시 그 충격이 아시아 에너지 수입국에도 직접 전이될 수 있음을 드러냈다. 에너지는 평시에는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이지만, 위기의 순간에는 외교·안보·금융·물류가 결합한 전략 자산으로 전환된다. 미·중 전략 경쟁과 우방국 중심 공급망 재편, 자원 무기화가 맞물리면서 에너지 안보는 국가 경제와 산업 경쟁력에 큰 영향을 미치는 통상, 경제 안보의 핵심 의제가 되고 있다. 한국에도 이 변화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국내 에너지자원이 제한적이고 제조업·수출산업 비중이 높은 한국에서 원유, 액화천연가스(LNG), 석유제품, 나프타 등의 공급 차질은 단순한 가격 상승에 그치지 않는다. 석유화학, 철강, 반도체, 자동차, 배터리 등 주력 산업의 비용 구조와 생산 안정성에도 영향을 줬다. 

에너지 공급망의 불안은 곧 산업 공급망의 불안으로 이어지고, 수출 경쟁력과 물가 안정에도 영향을 미치는 통상 리스크가 된다. 특히 호르무즈해협은 이런 위험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병목 지점이다. 2025년 이 해협을 통과한 원유와 석유제품은 하루 평균 약 2000만 배럴로, 세계 해상 석유 교역의 약 25%에 이른다. 이 물량의 80%는 아시아로 향했다. 카타르 LNG 수출의 약 93%, 아랍에미리트(UAE) LNG 수출의 약 96%도 호르무즈해협을 지난다. 결국 호르무즈해협 리스크는 중동 지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아시아 에너지 수입국이 함께 관리해야 할 공급망 리스크다.

대한민국 에너지 안보 전략은 수입선 다변화를 넘어, 아시아 공급망 회복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해야 한다.

IEA 비축유 방출의 한계와 에너지 안보의 재정의

이런 위기 속에서 국제에너지기구(IEA)의 역할도 다시 주목 받고 있다. IEA는 1973년 제1차 석유 위기 이후 석유 수입국이 공급 차질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 1974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틀 안에서 설립된 협력체다. 회원국의 석유 비축 의무와 비상시 공동 대응은 IEA의 핵심 수단이다. 최근 중동 정세 불안에 따른 에너지 시장 교란 국면에서도 IEA 공조 체계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26년 3월 11일, IEA 32개 회원국은 시장 안정을 위해 비상 비축유 4억 배럴을 방출하기로 합의했다. 최종 확정된 할당 규모는 4억2600만 배럴, 한국에 할당된 규모는 2250만 배럴이다. 그러나 비축유 방출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안정적인 에너지 흐름을 회복하려면 호르무즈해협의 정상 통항, 해상보험, 선박 보호, 항만 운영과 정제 능력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 원유를 확보했더라도 항로가 막히고, 선박과 보험이 끊기며, 정제 시설과 제품 공급망이 흔들린다면 산업 현장의 충격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공급망 다변화의 의미도 다시 정의할 필요가 있다. 과거에는 어느 나라에서 더 안정적이고 저렴하게 수입할지가 핵심이었다면, 이제는 어느 항로로 들어오는지, 우회로가 있는지, 저장 시설과 항만이 작동하는지, 선박과 보험을 확보할 수 있는지 등 시스템 전체를 함께 봐야 한다. 에너지 안보의 질문이 ‘어디서 살 것인가’에서 ‘충격이 와도 경제가 멈추지 않도록 어떤 선택지가 있는가’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아시아 에너지 수입국 간 협력 체계 구축 필요

이런 관점에서 에너지 수입국 간 협력 방식도 새롭게 고민해야 한다. 생산국이 석유수출국기구 플러스(OPEC+)1)를 통해 공급과 가격 안정을 도모해 왔다면, 수입국도 변화한 위기 양상에 맞는 협력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 다만 수입국 협력은 OPEC+를 단순히 뒤집은 형태가 될 수 없다. 수입국은 국내 안정 공급, 산업 보호, 물가 관리, 비축, 수요 관리를 동시에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과제는 기존 IEA 협력 기반 위에서 실제 위기 대응에 도움이 되는 정보 공유와 지역 협력 방식을 넓혀가는 데 있다. 아시아에서도 관련 논의가 확대되고 있다. 일본은 아시아 제로 에미션 공동체(AZEC)2)를 기반으로 역내 협력을 추진해 왔고, 2026년 4월 AZEC+ 온라인 정상회의를 계기로 아시아 에너지·자원 공급망 강화 파트너십(POWERR Asia)3) 구상을 제시했다. 

이 구상은 원유와 석유제품 조달, 비축과 방출 체계, 저장 인프라 구축, 핵심광물 확보, 에너지 다변화 등을 포괄한다. 이는 아시아 에너지 안보가 주요국 간의 지역 협력 의제로 부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도 이러한 흐름을 참고해 아시아 에너지 안보와 공급망 회복력 강화에 기여할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정유, 석유화학, 철강 등 에너지 다소비 산업과 조선, 자동차, 반도체 배터리 등 주력 제조업 기반을 갖추고 있으며, LNG 도입 경험과 전력 기자재, 원전 분야의 산업 역량도 축적해 왔다. 국제 에너지 논의에 참여해 온 경험과 이러한 산업적 기반을 바탕으로, 한국 역할을 아시아 지역의 공급망 회복력 강화와 연결해 나갈 필요가 있다. 

물론 아시아 수입국 간 협력은 쉬운 과제가 아니다. 미·중 전략 경쟁, 한·중·일 관계, 인도와 동남아 국가의 전략적 자율성, 위기 시 각국의 국내 우선 공급 원칙 등이 모두 변수다. 최근 미·중 정상회담 계기로 호르무즈해협의 통항 안정과 에너지 조달 문제가 함께 거론된 점은 에너지 안보가 기술 패권, 핵심광물, 해상 수송, 산업 공급망과 얽힌 복합 지정학 의제로 진화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여기에 인공지능(AI)이라는 새로운 변수도 더해지고 있다. AI 경쟁은 반도체와 데이터의 경쟁이면서 동시에 전력의 경쟁이다. 

전 세계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량은 2025년 485TWh시(테라와트)에서 2030년 950TWh로 두 배 가까이 늘고, AI 중심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는 같은 기간 세 배가량 증가할 전망이다. 이는 에너지 안보가 전력망, 변압기, 에너지저장장치(ESS), 반도체, 핵심광물 공급망까지 확장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지정학적 리스크가 상시화된 시대에 경제를 온전히 보호할 안전지대는 없다. 그러나 외부 충격을 흡수하고 버텨낼 국가적 역량은 만들어 갈 수 있다. 대한민국의 에너지 안보 전략은 단순한 수입선 다변화를 넘어, 아시아 지역의 공급망 회복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할 필요가 있다. 그 출발점은 위기의 순간 실제로 작동할 수 있는 정보 공유, 공동 훈련, 수요 관리, 물류 협력의 절차를 마련하고, 아세안과 주요 파트너국을 중심으로 협력의 신뢰 기반을 넓혀가는 일이다.


용어설명
  • 1석유수출국기구 플러스(OPEC+)

    11개 회원국과 러시아 등 10개 주요 비회원 산유국이 연합해 2016년 출범한 거대 생산 조정 협의체.

  • 2아시아 제로 에미션 공동체(AZEC·Asia Zero Emission Community)

    2023년 일본 주도로 출범한 국가 간 협의체, 아시아 지역의 탈산소화, 경제성장, 에너지 안보 동시 달성 목표.

  • 3아시아 에너지·자원 공급망 강화 파트너십(POWERR Asia·Promotion of Wider Regional Energy Resilience in Asia)

    일본이 아시아 국가의 에너지 안보와 자원 공급망을 강화하기 위해 발표한 100억달러 규모의 지역 에너지 협력 프레임워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