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상병 #일본_식물방역법 #WTO_SPS

과학적 위생검역의 중요성 알려준 미·일 사과분쟁

프랑스 화가 모리스 드니(Maurice Denis)는 이브의 사과, 뉴턴의 사과, 세잔의 사과를 역사상 가장 유명한 세 개의 사과로 꼽았다. <백설공주>에 등장하는 마녀의 독사과나 스티브 잡스의 애플(Apple) 등으로도 친숙한 과일이 치열한 국제사회의 무역경쟁 속에서 통상분쟁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적이 있다.

박정준 강남대 글로벌경영학부 교수

화상병(火傷病, fire blight)은 식물병으로 에르위니아 아밀로보라(Erwinia Amylovora)라는 세균으로 인해 발생한다. 북미·유럽 대륙뿐만 아니라 뉴질랜드와 일본 등에서 발생해 배·사과 농장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살구, 딸기, 장미 등도 이 병에서 자유롭지 않은데 일단 감염되면 열매, 꽃, 잎, 가지 가릴 것 없이 갈색이나 검정색으로 변하게 되고 점차 시들어 죽는 것이 증상이다. 이런 모습이 말 그대로 불에 그슬린 것 같아서 화상병이란 이름이 붙었다.
일본은 1950년에 이미 식물방역법을 제정, 사과나무 등 숙주식물 15종과 그 과일 수입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면서 특정 요건을 충족할 경우에만 수입을 허가하고 있었다. 2002년의 사과분쟁을 통해 미국에 제소당한 일본은 미국에서의 사과 수입에 대해 다음의 9가지 조건을 정해두고 있었다. 우선 ①미국 농무부(USDA)가 지정한 무병충 과수원에서 생산돼야 하며 ②과수원에 화상병 감염 식물이 없어야 한다. 그리고 ③무병충 과수원이 500m 완충지역으로 둘러싸인 상황에서 ④과수원 사이 완충지대는 연 3회 이상 점검이 필요한데, 특히 폭풍 후에는 추가로 점검해야 한다. ⑤수확된 사과는 하수슬러지 탈수에 1분 이상 적셔 표면을 소독하고 ⑥추수 컨테이너는 염소 소독이 필요하다. ⑦일본으로 수출할 때는 별도로 곡물 농약처리를 한다. ⑧미국의 식물 보호 공무원이 과실에 검역 해충이 없고 염소 소독을 했음을 서면으로 증명하거나 선언해야만 하며 ⑨미국 공무원이 필요한 보증서를 발급했다는 사실, 그리고 염소 소독과 과수원 지정이 적절하게 됐다는 점을 이번에는 일본 공무원이 확인하고 소독과 포장 시설을 검사한다. 이 같은 엄격한 조건들에 대해 미국은 일본을 세계무역기구(WTO) SPS* 위반으로 2002년 3월 제소하기에 이른다.

* 위생 및 식물위생 조치에 관한 협정 (SPS Agreement; Agreement on the application of sanitary and phytosanitary measures)
WTO 회원국 간에 식품위생 및 동·식물의 검역기준이나 절차가 무역규제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협정. 한 국가의 기준에 대해 국제적인 조화를 시키거나 조화를 시키지 못하는 경우에는 과학적 근거를 제시토록 하고 있다.
정당한 검역에는 정확한 과학이 필수

일본은 화상병균 전염경로 위험을 이유로 증상 없는 사과의 수입까지도 금지하고 있었기에 미국은 이러한 검역방식이 과학적이지 않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오히려 과학적 증거들을 통해 미국에서 일본으로 수출되는 사과가 화상병균의 전염경로가 될 수 없음이 증명된다고 주장했다.

1) DS245: Japan — Measures Affecting the Importation of Apples(WTO 홈페이지)

미국 vs. 일본 사과검역 분쟁(DS245)

  1. 2002.3: 미국, 일본을 WTO에 제소
  2. 2002.6 : WTO, 미·일 사과분쟁에 대한 패널 설치
  3. 2003.7 : WTO 패널심, 일본 패소
  4. 2003.8 : 일본, 판결에 불복 및 상소
  5. 2003.12: 일본, 상소심 최종 패소

판결에서는 WTO SPS에서의 과학적 증거란 ‘과학적 방법을 통해서 수집된 증거’만을 의미하며 그 외의 증거는 모두 인정되지 않고, 여기서 ‘증거’라 함은 ‘충분히 실질적이지 않은 정보’나 ‘입증되지 않은 가설’을 철저히 배제한다고 해석했다. 그만큼 검역방식 적용에서 과학적 증거의 필요성과 정확성, 둘 모두의 중요도를 동시에 확인해준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볼 때 일본의 화상병균 전염경로와 관련된 주장은 위험성도 적고 무시할 만한 수준이라고 판결했다. 따라서 일본이 내건 9개 조건, 특히 ③ ④ 등은 실재적 위험성에 비해 과도하다고 지적했다.
일본은 앞선 쟁점 패소에도 불구, 자신들의 검역방식이 WTO SPS상 ‘잠정조치’로는 인정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잠정조치 역시 ‘관련된 과학적 증거가 불충분한 경우’에 한해 취해질 수 있는 것인데, 일본의 주장과 달리 이미 많은 과학적 증거가 존재하고 있기에 ‘잠정조치’로서의 일본 검역방식 역시 인정될 수 없다고 판결냈다.

팬데믹 시대, 과학적 위생검역의 중요성

구제역, 아프리카돼지열병, 조류독감,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에 이어 원숭이두창까지 확실히 질병에 성역은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앞으로 각국의 검역 강화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검역 강화 자체를 막는 것보다 그 과학성을 확보하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미·일 사과분쟁이 주는 교훈은 남다르다. 엄격한 검역을 통한 자국 농업생태계의 보호는 모든 국가의 책임이다. 정당한 검역을 찾는 일에 과학은 문제가 아닌 해답을 제시해야 빛난다. 뉴턴도 사과가 떨어진다는 ‘문제’에 그치지 않고 만유인력이라는 과학적 ‘해답’을 찾아냈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자료: 『WTO 통상분쟁 판례해설(1)』(김승호, 법영사), 『WTO SPS 분쟁 사례 연구』 (대외경제정책연구원, ㈜휴먼컬처아리랑) 및 인터넷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