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는 2020년부터 시작된 팬데믹이 경제적 불확실성을 증폭시킨 가운데, 2017년 이후 심화된 미·중 갈등과 2022년 2월 발발한 러·우 사태 이후의 지정학적 리스크를 통상대응 전략의 핵심 변수로 인식하고 있다. 현재 일본 정부가 인지하고 있는 지정학적 내지 지경학적 리스크는 많은 부분이 중국과의 경제관계에서 비롯되고 있다. 특히 높은 중간재 대중 의존도는 일본의 주요 통상 리스크다.
글 김규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일본동아시아팀 선임연구위원 사진한경DB
2001년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이후 경제규모가 일본을 추월하는 과정에서 일본 기업은 중국과의 무역관계를 강화하고 중국에 대한 직접투자를 확대했다. 이로 인해 중간재 대(對)중 의존도가 지속적으로 높아졌다. 미국의 대중 디커플링 정책이 본격화된 2018년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주력 수출품목이라 할 수 있는 전기·전자제품과 자동차의 대중 수출 합계액 추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일본 정부는 미·중 갈등 같은 지정학적 리스크는 특정 국가에 대한 생산거점의 집중이 초래할 공급망 단절 리스크로 연결될 소지가 크다고 경계하고 있다. 일본 경제산업성이 지난 6월 발행한 <통상백서 2022>에 따르면 2021년 기준 중국에 대한 수입의존도가 50%를 넘는 주요 품목은 리튬이온전지(66.1%)와 광전성 반도체디바이스 및 발광다이오드(LED)(66.6%)다. 한편 일본의 광공업제품 중 수입의존도가 가장 높은 품목은 휴대폰 94.1%, 개인컴퓨터(PC) 63.4%로 나타났다. 광공업제품의 수출액 대비 수입액을 의미하는 ‘국내대체가능도’ 역시 휴대폰 114.83배, PC 8.83배로 다른 품목에 비해 ‘유사시’ 일본 국내에서의 대체가능성이 매우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은 휴대폰과 PC를 거의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하고 있다. 다만 가치사슬 관점에서 휴대폰과 PC는 중간단계(midstream)의 조립에 해당하는 것으로 상류단계(upstream)의 제품설계나 디자인, 하류단계(downstream)의 판매나 사후서비스(AS)에 비해 부가가치가 낮다. 다시 말해 일본 기업이 미·중 갈등 같은 지정학적 리스크의 증폭에도 불구하고 중국을 해외 생산거점으로 선호하고 계속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중국 내 제조비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기 때문이다. 일본 기업이 중시하고 있는 제조비용 등 제반 기업환경과 일본 정부가 우려하고 있는 ‘차이나 리스크’ 혹은 지정학적 리스크 간에 일종의 ‘인식의 간극’이 뚜렷한 지점이다.
일본을 둘러싼 지정학적 리스크 증폭에 대한 일본 정부의 통상대응은 경제안전보장 강화로 나타났다. 경제안전보장 개념을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2017년 트럼프 미국 행정부 출범 이후의 미·중 대립 속에서는 미국의 대중 디커플링 정책의 영향으로 일본에서도 공급망 강화를 통한 경제안전보장이 핵심 통상정책으로 부상했다.
일본 정부가 2020년 4월부터 실시하고 있는 리쇼어링(제조업의 본국 회귀) 정책은 공급망 강화를 도모하기 위한 경제안전보장 정책의 일환이다. 일본의 리쇼어링 정책은 경제산업성의 ‘국내투자촉진사업’과 ‘해외공급망 다원화 지원사업(JETRO 위탁사업)’으로 구체화됐다. 일본 기업 국내회귀 지원사업에는 2020년도 1차 추경예산에서 2,200억 엔, 제3차 추경예산에서 2,108억 엔이 투입됐다. 그 결과 반도체, 화학, 자동차부품, 배터리, 전자부품, 항공기엔진부품, 정보통신기기, 희토류 등 다양한 업종의 일본 기업이 중국에서 본국으로 리쇼어링했다. 중국 소재 일본 기업의 아세안 등지로의 생산설비 이전을 지원하는 JETRO 위탁사업에는 2020년도 1차 추경예산에서 235억 엔, 제3차 추경예산에서 116억7,000만 엔이 투입됐다. 그 결과 총 60개 일본 기업이 베트남, 말레이시아, 태국, 인도네시아 등 아세안 지역으로 설비를 이전했다.
일본의 경제안전보장 정책 중 여론의 지대한 관심을 끈 것은 반도체 전략이다. 반도체산업을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한국을 비롯해 미국, 중국, 유럽연합(EU) 등 세계 주요국 간 기술패권 경쟁에서 도태될 것이라는 일본 정부의 위기의식이 투영되어 있다. 2021년 6월 경제산업성이 발표한 ‘반도체 전략’은 반도체 제조 기반의 국내 거점 강화와 차세대 반도체 기술의 연구개발(R&D) 강화를 핵심 전략으로 설정하고 있다. 반도체 제조 기반의 국내 거점 강화 전략은 대만 TSMC의 일본 구마모토 반도체 공장 신설이라는 성과를 거두었고, 차세대 반도체 기술 연구개발 강화 전략 역시 2021년 11월, TSMC의 ‘Japan 3D IC 연구개발센터’ 설립을 이끌어냈다.
일본 정부의 반도체 전략은 반도체 관련 3개 기금 설치로 구체화되고 있다. 첫째는 2021년 12월 신에너지·산업기술종합개발기구(NEDO)에 6,170억 엔 규모로 설치한 ‘첨단 반도체의 국내 생산기반 정비기금’이다. 이 기금은 ‘5G 촉진법’(2022년 3월 시행)이 정한 기준에 맞는 반도체의 국내 생산 기반 정비에 대해 필요 자금의 최대 절반을 보조한다. TSMC의 구마모토 공장은 이 기금을 활용한 첫 번째 정부보조금 사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470억 엔 규모의 ‘일본 국내 반도체 공장 설비 교체·증설’ 기금이다. 보조금액은 설비투자액의 3분의 1, 최대 150억 엔이다. 일본 국내에 반도체 공장을 갖고 있는 키옥시아와 마이크론테크놀로지가 유력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셋째는 ‘5G 정보시스템 관련 R&D 지원기금’이다. 2021년 5월 TSMC 3D IC 연구개발센터가 지원대상 사업자로 선정됐다. 일본 정부의 보조금은 총 사업비 370억 엔 중 절반이다.
일본의 경제안전보장 정책은 2022년 5월 경제안전보장추진법 제정으로 귀결됐다. 경제안전보장추진법 중 공급망 관리 강화와 관련된 부분은 정부가 경제안전보장과 직결되는 물자 중에서 높은 해외의존도로 말미암아 외부 행위에 의해 공급망이 단절될 우려가 높은 물자를 ‘특정중요물자’로 지정해 기업의 협조 아래 공급망 관리에 만전을 기하겠다는 내용이다. 정부의 공급망 강화 대책에 동참하고자 하는 기업은 ‘공급확보계획’을 정부에 제출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생산기반 정비, 공급원의 다양화, 생산기술의 도입·개발·개량, 사용 합리화, 대체물자의 개발과 같은 구체적인 물자 확보 대책, 대책 이행에 필요한 자금 규모 및 조달방법, 대책 관련 정보관리 체제, 해당 품목의 조달·공급·사용 현황을 명시해야 한다. 다만, 주무장관은 특정 중요물자로 지정된 물자를 생산·수입·판매하는 기업을 대상으로 해당 물자 또는 그 생산에 필요한 원재료 등의 생산, 수입, 판매, 조달 또는 보관 상황과 관련된 자료 제출 혹은 보고를 요구할 수 있다.
우리 정부는 조기경보시스템(EWS) 구축과 같은 공급망 관리 정책과 더불어 국제협력 틀 내에서의 한·일 간 공급망 협력에도 적극 나설 필요가 있다. 2022년 5월 미국 바이든 행정부가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 Indo·Pacific Economic Framework)를 정식 출범시킴으로써 한·일 양국이 IPEF 틀 내에서 공급망 협력을 논의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해준 셈이 됐다. 우리 정부는 ‘공급망·경제복원력 강화(Resilient Economy)’에 참여해 조기경보시스템 구축·운용, 주요 광물자원의 공급망 조사 등 유의미한 한·일 공급망 협력 성과를 거둘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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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시 다카유키(小林鷹之)는 2021년 10월부터 ‘경제안전보장 담당 내각부 특명담당 대신’을 맡고 있다. 일본의 경제안전보장 정책을 총괄하는 컨트롤타워가 부재한 가운데, 2021년 10월 기시다 후미오(岸田文男) 신임 총리가 내각부 내에 경제안전보장을 담당하는 소위 무임소 장관직을 신설하고 고바야시 다카유키를 임명했다. 고바야시 ‘경제안전보장 담당 대신’은 2020년 6월 당시 자민당 정조회장인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정조회 산하에 설치한 신국제질서창조전략본부의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자민당 신국제질서창조전략본부는 일본의 국가안전보장전략이 경제안전보장 개념을 담고 있지 못하다고 비판하면서, 경제안전보장일괄추진법(가칭) 제정을 촉구한 바 있다. 2016년부터 근 1년간 아베 내각에서 방위성 정무관을 역임한 경험이 경제안전보장 정책을 총괄하는 밑거름이 된 것으로 보인다.
고바야시 ‘경제안전보장 담당 대신’은 현재 기시다 내각이 내세우고 있는 경제안전보장 정책을 사실상 주도하고 있다. 지난 5월 경제안전보장추진법 추진 과정에서 설치된 내각관방 산하 민간 자문회의를 이끌었고, 8월 1일 공식 출범한 내각부 내 ‘경제안전보장추진실’ 설치 문제도 고바야시 경제안전보장 담당 대신이 주도했다. 2020년 4월 내각관방 국가안전보장국(NSS) 내 경제반 설치 이후, 다소 난맥상을 보였던 일본의 경제안전보장 정책에 관한 거버넌스 체계가 경제안전보장추진실 신설 이후 어떻게 자리를 잡아가고, 그 과정에서 고바야시 경제안전보장 담당 대신이 어떠한 역할을 할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