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반도체와 과학법(The CHIPS and Science Act of 2022)’에 전격 서명했다. 이는 그간 국가 간 공정한 경쟁과 자유무역을 기치로 글로벌 산업 질서를 주도해온 미국의 전통적인 기조를 뿌리째 뒤흔드는 조치로, 향후 국가 간 산업정책의 무한경쟁시대 서막을 연 전환기적 사건이다. 특히 미국에 이은 두 번째 반도체산업 강국이자 미·중 간 반도체 패권 경쟁의 가운데 놓인 우리 입장에서, 이번 입법은 향후 전개될 반도체산업 재편 과정에서 대응전략 모색 시 가장 고려해야 하는 상수(常數)임이 분명하다.
글 이준 산업연구원 산업정책연구본부 본부장 사진한경DB
반도체와 과학법(이하 반도체법)은 총 3개 법안(division)으로 구성돼 있다. 이 중 가장 주목해야 하는 법안은 반도체산업에 2026년까지 총 527억 달러를 직접 지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첫 번째 법안인 ‘반도체 지원법(CHIPS Act of 2022)’1)이다. 반도체 지원법의 핵심은 미국 내 반도체산업 육성 및 기반 확충을 위한 직접 보조금 지원, 생산시설 투자에 대한 파격적인 세제지원, 그리고 중국 견제다. 이 법에 따르면, 미국 연방정부는 향후 5년간(2022∼2026) 미국 내 반도체 생산시설 건립에 총 390억 달러를 직접 보조할 수 있는데, 이로써 미국 내 첨단 반도체 공장 설립에 연방정부가 대규모 직접 보조금을 지급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가 확보됐다. 또한 이 법을 통해 첨단 반도체 연구개발(R&D)에 총 110억 달러를 지원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국가반도체기술센터(NSTC) 설립, 첨단 패키징 제조 프로그램 지원 등이 포함돼 있다. 이와 더불어, 고도의 안전성 담보가 요구되는 국방·정보 관련 반도체의 생산 지원을 위해 20억 달러의 예산도 배정했다. 그리고 첨단 통신 공급망 및 반도체 공급망의 국제 공조를 위해 5억 달러, 반도체 인력 양성 및 교육을 위해서도 2억 달러를 지원할 수 있다.
직접적인 지원뿐만 아니라 간접적인 지원 내용도 담고 있다. 앞으로 미국 내에 반도체 생산시설을 짓는 기업은 25%의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는데, 이 법을 통한 총 세제지원 규모는 10년간 약 24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미국 측은 예상하고 있다.
구분 | 지원 규모(2022-2026, 단위: 억 달러) | 재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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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시설 건립 보조금 | 390 | CHIPS for America Fund(상무부) | |
★ 성숙공정(mature technology nodes) 보조금 → 조립, 테스트, 패키징 |
20 | ||
◆연구개발(R&D) 국가반도체기술센터(NSTC) 건립 첨단 패키징 제조 프로그램 지원 |
110 | ||
◆국방(군수)·정보용 반도체 생산시설 지원 | 20 | CHIPS for America Defense Fund(국방부) | |
◆첨단 통신 공급망 및 반도체 공급망의 국제 공조 | 5 | CHIPS for America International Security and Innovation Fund(상무부 및 국방부) | |
◆인력 양성 및 교육 | 2 | CHIPS for America Workforce and Education Fund |
반도체 제조시설 투자에 대한 파격적인 지원은 결국 미국 내에서 반도체를 생산하는 데 소요되는 비용을 아시아 국가 수준으로 낮춰서 경쟁력 있는 산업 생태계를 자국 내에 갖추겠다는 미국 정부의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한편, 이 법안에는 가장 논쟁적인 내용도 포함돼 있다. 바로 중국 반도체 굴기를 저지하는, 소위 말하는 가드레일 조항이다. 이 법은 기업이 미국 내에 단행한 반도체 투자(생산시설 및 장비)에 대해 미 연방정부로부터 인센티브(보조금 및 세제 지원)를 받을 경우, 중국 및 해외우려국가(foreign country of concern)에 반도체 투자(신규, 증설, 장비 도입 등)를 10년간 금지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단, 28나노미터(nm) 이상 공정을 통해 만들어진 성숙(legacy) 반도체에 대해서는 예외를 허용하고 있는데, 글로벌 반도체 기업 간 첨단 반도체 경쟁이 14nm 이하의 미세공정에서 펼쳐지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이번 법안은 사실상 앞으로 중국 내에 의미 있는 반도체 분야 투자를 원천 봉쇄하겠다는 워싱턴 조야(朝野)의 의지를 담고 있다.
이번 법안은 미국이 반도체의 지정학적 리스크에 대해 얼마만큼 우려하고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동북아시아에 집중된 반도체 생산시설, 특히 대만에 집중된 첨단 반도체 생산시설을 실재(實在)하는 위협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이번 입법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민주·공화 양당 간 정쟁이 극심하게 펼쳐지고 있는 워싱턴DC에서 이번 반도체법이 초당적인 컨센서스를 토대로 전례 없이 신속하게 입법이 완료됐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현재 자국 기업의 7nm 이하 첨단 반도체 양산 실적이 없는 상황에서 동맹국이기는 하나 경쟁기업이라 할 수 있는 TSMC, 삼성을 막대한 재정지원을 해서라도 자국 내로 끌어들이는 고육책을 쓴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이번 반도체법이 우리 반도체산업에 미치는 파장은 상당하다. 이번 입법으로 그동안 선언적인 수준에서 오고 갔던 미·중 간 반도체 줄타기는 더 이상 지속하기 힘든 전략이 됐다. 가장 논쟁적인 부분인 중국 내 시설투자 금지 조항, 소위 말하는 가드레일 조항이 미국 반도체협회와 미국 업계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포함된 것은 워싱턴 조야의 반도체와 중국에 대한 단호한 시각을 엿보게 한다. 390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투자 보조금은 기업 입장에서 외면하기 힘든 인센티브다. 더군다나 미국은 실리콘 기반 반도체 제조에 꼭 필요한 반도체 설계자산(IP), 반도체 설계자동화(EDA) 툴, 그리고 핵심 제조장비를 가지고 있는 나라다. 이 말은 미국이 맘만 먹으면 반도체 제조를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는 소리다. 아무리 제조 경쟁력과 기술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이들을 틀어막으면 제조가 어렵다. 중국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1,500억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국가 보조금과 제조기술 획득을 위한 저돌적인 계획도 이 병목이 막히면 공염불이다. 미국과 보조를 맞출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반도체는 지속적인 투자가 필요한 산업이다. 아무리 제조기술이 좋아도 신규 장비 및 소프트웨어(SW)가 지속적으로 업데이트되지 않으면 속도 경쟁에서 뒤처지게 되고 바로 시장에서 경쟁력을 상실한다. 그리고 한번 빼앗긴 경쟁력을 되찾아오는 것은 현대 반도체 전쟁에서 거의 불가능하다. 이미 우리는 일본의 사례에서 이런 것을 보아왔다. 현재 우리 반도체 기업이 운영하고 있는 중국 내 사업장은 이러한 과정으로 진행될 공산이 크다. 신규 장비 및 소프트웨어 반입이 이제는 어렵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까지는 대중국 반도체 장비 제재가 극자외선(EUV) 장비, 14nm 이하 장비 등 첨단 반도체 장비에만 국한돼 있었다. 그래서 그 영향도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이제 제재 기준점을 28nm 수준으로 높여 놓으면서 사실상 중국 사업장 내 신규 장비 반입은 불가능해졌다. 이 말은 중국 사업장에서는 앞으로 첨단 반도체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경쟁력 있는 제품을 만들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중국 내 수요가 있는 성숙공정 제품 수요가 있으나 팹(fab)의 가동 기간을 조금 연장하는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반도체의 무한경쟁시대가 열렸다. 이제는 반도체 생산설비의 글로벌 배치와 글로벌 반도체산업 내에서 우리의 전략적 포지션을 고민해야 한다. 미국 내 투자는 지속적으로 확대될 수밖에 없는데, 여기에는 전제조건이 있다. 바로 반도체 협력체지만 경쟁국이기도 한 미국, 대만, 일본과의 경쟁에서 전략적 우위를 지켜내는 것이다. 이 경쟁에서 우위를 상실하게 되면 사실 우리가 가진 가장 중요한 전략자산을 놓치는 것이다. 이미 미국과 일본은 차세대 반도체에서 손을 잡았다. 이들은 IP, 소재, 장비, EDA, 그리고 제품을 발주하는 수요기업을 가진 나라다. 우리 정부와 업계가 바짝 긴장해야 하는 이유다.
반도체는 ‘21세기 편자(horseshoe)의 못’이다.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산업이다. 우리가 글로벌 산업 지형에서 현재의 위상을 확보하고 있는 데에는 상당 부분 반도체의 역할이 크다. 가장 우선적으로는 대중국 제재를 담은 가드레일 규정의 세부 규제안이 우리에게 우호적으로 나올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미국 정부와 협상을 진행할 필요가 있다. 중국에 투자한 우리 기업이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사업을 조정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시간은 확보해야 한다. 그리고 기업은 이제 생산 거점의 글로벌 배치를 반도체의 글로벌 산업 지형 변화를 고려해 새롭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새로운 틀 내에서 우리가 전략적으로 반드시 가져가야 할 핵심 경쟁원천 부분을 국내에서 작동하도록 하는 방안을 정부와 함께 모색해야 한다. 기업이 글로벌 경쟁 속에서 확보한 핵심 경쟁 원천과 정부의 적극적인 반도체 지원 정책의 뒷받침으로 만든 탄탄한 반도체산업 생태계의 시너지가 결국 글로벌 반도체 전쟁에서 우리가 경쟁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이다.
이번 미국 ‘반도체와 과학법’ 제정의 일등 공신은 현재 미국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인 척 슈머(Chuck Schumer)다. 미국 뉴욕주 상원의원인 척 슈머는 뉴욕주에서 하원의원, 상원의원을 다선으로 두루 거친 정치 거물로서 2017년부터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를 맡고 있다. 척 슈머는 2021년 ‘국방수권법(National Defense Authorization Act)’의 반도체 진흥 프로그램이었던 ‘CHIPS for America Act’부터 시작해서 2021년 6월 미국의 첨단산업 육성과 초강력 법안인 ‘미국 혁신경쟁법(US Innovation and Competition Act of 2021)’의 상원 통과를 주도했다. 척 슈머의 첨단산업 육성 의지와 중국에 대한 우려는 ‘미국 혁신경쟁법’의 상원 표결 전 그의 연설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중국이 우리를 뛰어넘기 위해 가장 먼저 한 것은 과학과 연구에 막대한 투자를 한 것”이라고 규정한 뒤, “우리가 뭔가 하지 않는다면 중국은 세계 1위의 경제대국이 될 것이다”라고 우려를 전했다. ‘미국 혁신경쟁법’은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가 공화당 토드 영 상원의원(인디애나주)과 함께 대표 발의한 ‘Endless Frontiers Act’를 기본법안으로 삼고 ‘Strategic Competition Act’ 및 ‘Meeting the China Challenge Act’ 등 다수 법안이 통합된 법안이다. 이후 미 하원에서 낸시 펠로시 의장 주도로 상원의 ‘미국 혁신경쟁법’과 유사한 취지의 ‘미국 경쟁법(The America COMPETES Act of 2022)’이 2022년 2월에 통과되면서 두 법안을 병합하는 작업이 2022년 상반기에 진행됐다. 그러나 병합 법안의 일부 내용을 놓고 민주·공화 간 이견으로 인해 지지부진하자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는 이견이 없는 부분부터 우선 입법화하겠다는 방침을 세우고 공화당과 논의를 신속하게 진척시키면서 527억 달러 규모의 반도체 지원 패키지가 담긴 ‘반도체와 과학법’이 탄생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