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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국 경쟁’ 시대를 살아가는 동남아 국가의 전략

언제부터인지 강대국 경쟁, 미·중 전략경쟁이란 말이 누구나 입에 올리는 일상적인 단어가 된 듯하다. 미국과 중국이 글로벌 패권을 놓고 벌이는 전략경쟁은 단순 국력경쟁을 넘어 구체적인 경제전쟁으로, 배타적 공급망 강화를 통한 거대한 경제블록을 만드는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도 낳고 있다. 강대국의 종합적·복합적인 경쟁 속에 우리나라가 가야 할 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 세계 어느 국가, 어느 지역이나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다. 동남아 지역 10개 국가의 지역협력체인 아세안(ASEAN·동남아국가연합), 그리고 아세안에 속한 개별 국가도 똑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다.

이재현 아산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사진 한경DB

지난 9월 13일부터 15일까지 캄보디아 시엠레아프에서 동남아시아 10개국 경제수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54차 아세안 경제장관회의(AEM 54)가 개최됐다.
이번 회의에서는 아세안 경제공동체 발전과정, 코로나19 이후 경제회복과 향후 경제 우선 과제의 이행, 글로벌 경제블록과의 협력 등이 중점적으로 논의됐다.

식민지배를 겪은 약소국인 동남아 국가, 아세안의 시각에서 가장 바람직한 지역 질서는 강대국의 간섭이 없는 상황이다. 아쉽게도 현실은 이들의 바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강대국의 간섭과 관여는 아세안 국가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동남아 국가는 늘 강대국 경쟁과 함께했다. 서구 열강의 식민지배 시기에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유럽 강대국이 동남아 지역을 놓고 경쟁했다. 독립을 쟁취한 이후 동남아 국가는 미·소 냉전에 의해 두 개의 블록으로 나뉘었다. 냉전이 막을 내린 이후 아시아에서 가장 큰 힘을 가졌던 일본과 막 부상하기 시작한 중국이 동남아를 놓고 경쟁했다.
이제 미국과 중국이 동남아에서 경쟁하고 있다. 동남아에서 벌어지는 미국과 중국의 전략경쟁은 동남아 국가에게 곤란한 문제이지만 새로운 문제는 아니다. 미국과 중국은 경쟁적으로 안보적·경제적 장점을 앞세워 동남아 국가에 접근하고 동남아 국가의 마음을 얻으려 노력하고 있다. 때로는 은근히 압력을 넣기도 하고 때로는 달콤한 유인책을 제시하기도 한다. 중국은 일대일로(BRI; Belt and Road Initiative)를 통한 막대한 경제적 지원을 앞세운다. 미국은 오바마 행정부의 ‘피벗 투 아시아(Pivot to Asia·아시아 회귀)’ 정책과 트럼프, 바이든 행정부를 거치면서 구체화된 인도·태평양 전략(Indo-Pacific Strategy)으로 중국에 대응한다.

1) 보다 자세한 내용은 이재현. 2022. “아세안 국가 대외정책의 특성과 한국의 아세안 정책에 대한 함의” 아산정책연구원 이슈브리프. 3월 25일.
강대국 균형 속에 살길이 있다

온갖 종류의 화려한 수사와 원칙을 동원한 강대국의 전략이 아세안과 동남아 국가에 펼쳐진다. 때로는 이런 전략이 압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동남아 국가에 전혀 새로운 상황은 아니다. 늘 겪어온 문제다. 동남아 국가는 역사적 경험을 통해 강대국 경쟁 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확보하고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했다. 아세안의 전략은 정교한 균형이다. 균형은 두 가지 차원에서 일어난다. 하나는 경쟁하는 강대국 간 힘의 균형이다. 이 강대국 균형 아래 아세안의 자율적 공간과 협상력이 확보된다. 또 다른 하나는 아세안의 균형, 다시 말해 경쟁하는 강대국 사이에서 아세안이 취하는 균형이다. 특정 강대국에 대한 의존은 아세안의 자율성과 협상력 상실을 가져온다. 균형이야말로 아세안의 전략적 가치를 극대화하는 방안이다.
먼저 경쟁하는 강대국 간 팽팽한 균형을 이룰 때 아세안의 전략이다. 균형을 깨고 전략적 우위를 가져가려는 강대국은 경쟁적으로 아세안 국가에 접근한다. 아세안 10개국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경쟁하는 상대에 우위를 점하려 한다. 강대국이 아세안 국가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할 때 아세안 국가는 개별적으로 혹은 아세안 차원에서 집합적으로 강대국에 대해서 협상력을 가진다. 협상 테이블은 아세안에게 유리하다. 이런 협상력을 바탕으로 아세안 국가는 미국에 대해, 중국에 대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요구하고 얻어낸다. 물론 강대국 경쟁이 일정한 수위를 넘게 되면 아세안이 이런 협상력을 확보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아세안이 강요당하는 위치에 설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수위의 경쟁은 아세안에게 전략적 자산이 된다.
2022년 5월 아세안 10개국 중 7개국은 미국이 제안한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 Indo-Pacific Economic Framework) 참여를 결정했다. 중국으로부터 상당한 경제적 지원을 받고 있는 동남아 국가가 이런 결정을 한 것이 의외라는 평가가 있다. 동남아 국가가 미국 쪽으로 기울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평가도 있다. 동남아 국가의 IPEF 참여는 균형을 맞추려는 전략이다. 중국의 경제적 힘이 동남아 지역에서 강한 상황에서 동남아 국가는 IPEF에 참가 의사를 밝힘으로써 미국의 동남아 지역에 대한 지속적 관여(engagement)를 확보하고 중국에 대한 균형을 맞추려 한 것이다. IPEF 참여에 따른 부담은 향후 남은 구체적 협상과정에서 미국과 개별적으로 협상하면 될 일이다.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다

두 번째, 강대국 사이 아세안의 균형은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구현된다. 미·중 경쟁 속에서 지금 아세안 국가는 늘 미국과 중국 양쪽에 모두 긍정적으로 관여하려 한다. 안보적으로는 미국과 협력하면서 경제적으로는 중국 일대일로의 지원을 받는다. 중국과 군사훈련을 하면서도 오바마 행정부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Trans-Pacific Partnership), 바이든 행정부의 인·태 경제프레임워크(IPEF)에 적극 참여한다. 모순적일 수 있는 이런 모든 강대국에 대한 긍정적 관여는 강대국들이 아세안을 두고 경쟁하는 상황을 만든다.
지역 질서에 관해서는 늘 포괄성(inclusiveness)의 원칙을 주장한다. 경제든, 안보든 지역 질서 혹은 지역 아키텍처를 통해 경쟁 상대를 배제하거나 봉쇄하려는 강대국의 전략을 환영하지 않는다. 이런 아세안의 태도가 가장 잘 드러난 것이 ‘아세안의 인도·태평양에 대한 관점(AOIP; ASEAN Outlook on the Indo-Pacific)’이다. 미국의 인태전략에 대한 아세안의 집단적 대응이 ‘아세안의 인도·태평양에 대한 관점’이다. 여기서 아세안은 미국이 사용한 ‘인도·태평양’이라는 단어를 제목에 넣으면서 그 구체적인 내용에서는 계속 포괄성을 강조한다. 미국의 인태전략이 중국 배제라는 성격을 가진다는 평가가 많은데 아세안은 인도·태평양 지역의 어느 특정 국가도 배제하지 않는다는 차별적인 전략을 앞세우고 중국과의 관계를 관리한다.
이 명제를 역으로 생각하면 어느 쪽에도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지 않는다는 의미가 된다. 싱가포르 소재 동남아연구소(Institute of Southeast Asian Studies)는 매년 동남아 10개국 여론주도층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다. 2022년 초 발표된 설문조사 결과는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다’는 동남아 대외전략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중국에 대한 신뢰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58.1%는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미국을 신뢰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응답자의 52%가 신뢰한다고 했으나 겨우 50%를 넘겼다. 미국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대답도 30%에 달한다. 미·중 경쟁 속에 미국이나 중국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응답은 11%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 응답자들은 미·중 사이 중립(26.6%), 아세안의 단결력 강화를 통한 강대국 대응(46.1%), 미·중이 아닌 제3세력과의 연대 강화(16.2%)를 선호한다. 미·중을 선택할 필요가 없다는 응답이 89%에 달한다.
상대적 약소국인 동남아 국가에게 강대국 경쟁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이 있다. 물론 동남아 국가가 강대국 경쟁을 피할 수 없으니 즐기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동남아 국가가 강대국 경쟁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강대국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운명론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좁은 전략적 선택지 안에 자신을 가두기보다는 보다 적극적으로 균형과 견제, 제3 세력과의 연대 등으로 자신의 전략적 선택지를 폭넓게 펼쳐놓고 고민하는 동남아 국가의 유연성이 다른 국가나 지역에 교훈이 될 수도 있다.

T R A D E  N E G O T I A T O R
통상을 이끄는 사람들

아세안을 이끄는 리더
조코 위도도(Joko Widodo) 인도네시아 대통령

2019년 4월 치러진 인도네시아 대통령 선거에서 조코 위도도(Joko Widodo·조코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경쟁자인 프라보워 수비안 토(Prabowo Subianto)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조코위 대통령 은 여러모로 전형적인 인도네시아의 정치인과는 다른 면모를 가졌 다. 작은 가구공장을 운영하던 조코위는 2004년 인도네시아 민주 투쟁당 후보로 수라카르타(Surakarta)시장에 당선되며 대중 앞에 나선다. 그로부터 10년 만에 대통령 자리에까지 올랐다.
특별한 배경이나 경력이 없던 조코위가 대통령에까지 오른 데는 그 의 개인적인 매력이 크게 작용했다. ‘계획에 없던 방문’ 정도를 뜻하 는 자바어인 블루수깐(Blusukan)은 조코위의 트레이드마크다. 일 반 사람들하고 스스럼없이 만나고 어울리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조코위의 정치 스타일이 인도네시아 국민에게 큰 인기를 끌었고 이를 바탕으로 대통령 당선, 재선을 이뤄냈다.
대외정책에서 인도네시아는 ‘적극적이고 독립적(Aktif dan Bebas, Active and Independent)’ 외교정책으로 유명하다. 비동맹운동의 주도적인 국가로, 아세안을 주도하는 국가로 인도네시아의 대외정책은 이 적극적이고 독립적인 대외정책 노선 에 기반한다. 첫 번째 임기와 재선 이후 시간을 국내 정 치와 정책에 할애했던 조코위 대통령은 2022년 적극 적인 대외정책을 구사하는 방향으로 옮아갔다. 2022년 G20 의장국을 맡은 인도네시아는 러시아·우크라이 나 사태 발발 후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 나 젤렌스키 대통령과 러시아 푸틴 대통령을 G20 정상 회의에 초대했다. 6월 말 나토(NATO) 정상회의에 초청된 조코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러시아를 잇달아 방문해 양 정상과 정상회담을 갖고 평화의 중재자 이미지를 세우려 했다.
다가오는 2023년 인도네시아는 아세안 의장국을 맡을 차례다. 회 원국이 1년간 맡는 의장국 순번이 인도네시아에 돌아온다. 이미 인도네시아 외교장관인 마르수디(Retno Marsudi)는 유엔에 서 한 연설을 통해 아세안 의장국으로 인도네시아는 강 대국 경쟁에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아세안 중 심성(ASEAN Centrality)’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하 겠다고 공언했다. 특정 국가를 배제하는 데 지역 아키 텍처를 사용하는 강대국의 행태를 비판하기도 했다. 미·중 강대국 경쟁이 하루가 다르게 수위를 높여가고 있는 상황에서 2023년 인도네시아 조코위의 아세안 리더십이 어떤 방향으로 나갈지 관심이 더해진다.

지난 6월 30일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를 방문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다.
이날 정상회담 직후, 조코위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메시지를 푸틴 대통령에게 전달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