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보리스 존슨 총리가 지난 7월 파티게이트와 인사 논란으로 사임한 후 리즈 트러스(Liz Truss)가 총리로 취임했다. 그러나 트러스 총리는 경제불안 속에서 재정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감세계획을 발표했다가 시장에 큰 혼란을 일으켰다. 이에 대한 책임으로 역대 영국 총리 중 최단명 총리라는 오점을 남기고 사임했다. 이후 집권 보수당은 리시 수낵(Rishi Sunak) 전 재무장관을 총리로 확정했지만 향후 1년간 영국 경제는 불황을 감내하는 과정이 불가피해 보인다.
글 강유덕 한국외대 Language and Trade 학부 교수 사진 한경DB
영국은 2020년 1월 31일 유럽연합(EU)을 공식 탈퇴했다(11개월 전환기간 후 12월 31일 탈퇴 완료). 2016년 6월 국민투표를 통해 EU 탈퇴를 결정한 지 3년 반 만의 일이다. 그 과정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제일 어려웠던 것은 협상을 통해 EU와 후속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협상이 기한을 넘기고 양측의 요구사항이 교착상태에 이르면서 노딜 브렉시트 가능성까지 제기됐다. 결국 2021년 1월 1일 잠정 발효된 영국과 EU 간 무역협력협정(TCA; Trade and Cooperation Agreement·브렉시트협정)은 자유무역협정(FTA)을 기반으로 하되, 다양한 협력 분야를 추가한 형식으로 구성됐다.
브렉시트 이후 3년 정도가 경과한 시점이지만 브렉시트가 영국 경제에 미친 영향을 평가하는 것은 어렵다. 코로나19 팬데믹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가 워낙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다만 팬데믹 직전까지 영국 경제의 상황은 양호했다. 내수 중심의 성장 속에서 실업률도 낮았다. 제조업과 금융기관이 유럽 대륙으로 대거 이전하는 사태는 없었다. 반면에 코로나19 팬데믹으로 2020년 국내총생산(GDP)이 10% 가까이 감소했다.
2021년에는 ‘위드 코로나’ 정책을 실시하면서 GDP가 7% 이상 성장, 반등에 성공했다. 경기회복은 2022년에도 계속될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촉발된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은 영국 경제에 큰 충격을 주었다. 영국의 물가상승률은 2022년 7월에 주요 7개국(G7) 중 유일하게 10%를 상회했다. 영국 경제는 내수비중이 높기 때문에 고물가 현상이 더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2022년 2분기 영국의 분기별 경제성장률은 –0.1%를 기록했고, 3분기에도 –0.2%의 역성장을 기록했다. 기술적인 경기침체에 진입한 것이다.
보리스 존슨 총리는 지난 7월 파티게이트와 인사문제 논란으로 사임했다. 이어서 총리가 된 리즈 트러스(Liz Truss)는 영국 역사상 세 번째 여성 총리였다. 존슨 전 총리 내각에서는 국제통상장관과 외무장관 등 핵심 요직을 맡았다. 보수당 대표 경선에서는 감세와 기업 경쟁력 강화, 정부 효율화 등 작은 정부를 주장했다.
트러스 총리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취임했다. 물가상승률은 10%를 상회했다. 특히 에너지 가격은 최대 80%까지 오를 수 있다는 예측이 나왔다. 취임 직전에는 분기별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했다. 영국중앙은행은 영국 경제가 2022년 말에 공식적인 경기침체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했다. 파운드화 가치는 1985년 이래 최저수준까지 떨어졌다.
트러스 총리는 취임 직후 450억 파운드(약 72조 원)의 감세정책을 발표했다. 소득세 인하, 법인세 인상 철회 등 감세를 통해 기업 주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재정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감세계획은 시장에 큰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준(準)기축통화 지위를 가졌던 파운드화의 추락은 계속됐고, 영국 국채에 대한 투매현상도 나타났다. 트러스 총리는 감세정책을 주도한 재무장관을 경질하고, 기존 계획을 철회함으로써 수습을 시도했다. 반면에 감세정책의 후폭풍으로 정치적 권위가 흔들리자 취임 45일 만에 사임을 발표했다. 역대 영국 총리 중 최단명 총리라는 오점을 남긴 것이다.
트러스 총리의 사임 이후 집권 보수당은 리시 수낵(Rishi Sunak) 전 재무장관을 총리로 확정했다. 수낵 총리는 만 42세로 영국 역사상 210년 만에 가장 어린 총리다. 또한 인도계 이민 가정 출신으로 영국의 첫 힌두교도 총리다. 반면에 옥스퍼드대와 스탠퍼드대 MBA를 졸업했고,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에서 근무하는 등 전형적인 영국 엘리트 코스를 거쳤다. 2015년 하원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후, 2019년 보수당 경선에서 보리스 존슨 전 총리를 지지하면서 중용됐다.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재무부 장관으로 굵직한 지원정책, 차분하고 솔직한 태도 등으로 국민의 호감을 샀다.
수낵 총리는 경제적으로는 중도주의 성향이며 정치적으로는 신보수주의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영국의 현 상황을 경제위기로 규정한 그는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통해 대응해야 하지만 장기적으로 균형재정을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업의 혁신 등 경제적 자유주의 성향도 확고하다. 전임자인 트러스 전 총리와 달리 초기부터 영국의 EU 탈퇴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유럽회의주의자이기도 하다.
수낵 총리의 내각에서는 지난 정부의 장관들이 유임되거나 복직했다. 전반적으로 안정과 화합을 중시한 내각을 구성한 것이다. 특히 제러미 헌트 재무장관을 유임한 것은 긴축정책의 기조를 이어가고, 정부에 대한 투자자들의 신뢰 회복에 우선순위를 두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수낵 총리는 취임 직후 증세와 지출 삭감을 통해 5년간 550억 파운드(약 88조 원)의 재정을 충당할 계획을 밝혔다. 이 중 200억 파운드는 증세를 통해 이루어진다. 소득세에 대한 과세 기반을 확대하고, 각종 세금의 공제 규모를 동결한다. 에너지 기업에 대한 이익부담금을 인상할 계획이다. 지출 삭감을 통해서는 300억 파운드를 확보할 계획을 밝혔다.
수낵 총리의 취임과 정책기조의 전환에 대해 시장의 평가는 일단 긍정적이다. 그러나 총리 스스로가 영국의 현 상황을 ‘경제위기’라고 지칭했듯이 경기침체의 우려가 크다. 영국 예산책임청(OBR)은 2023년의 경제성장률을 -1.4%로 전망했다. 고물가에 대응하기 위해 긴축적 통화정책에 더해 재정정책마저 긴축기조를 확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향후 1년간 영국 경제는 불황을 감내하는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
브렉시트 이후 혼란을 수습해나가는 영국의 모습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첫째, 브렉시트 이후 영국은 대외개방 기조를 최대한 유지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지난 3년간 67개국과 36건의 무역협정을 체결, 발효했다. 미국과 FTA 협상을 시작했고,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을 위한 협상도 진행 중이다. 둘째, 영국의 상황은 전 세계 금융시장이 불안정한 경우 정책 당국의 실수가 걷잡을 수 없는 위기로 확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경제적 이념에 집착한 정책보다는 현 상황을 인지하고, 대외불안 요인에 대응할 수 있는 유연한 정책이 요구된다. 셋째, 영국의 재정긴축 계획이 경기침체에 진입하는 시점에서 발표됐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경기침체에 대한 전통적인 대응방식과는 매우 다르다. 그만큼 현재 상황이 특별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세계 6위의 영국 경제가 휘청거렸듯이 어느 국가라도 경제위기에 직면할 수 있는 살얼음판과 같은 상황인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경제의 펀더멘털이 중요한 시점이다. 한국도 경상수지와 단기 외채, 외국인 자금 유출입, 외환보유고 증감 등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2016년 6월 국민투표를 통해 EU 탈퇴가 결정되자 영국 정부는 즉시 통상정책을 담당할 국제통상부(Department for International Trade)를 설립했다. 초대 통상장관으로는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리엄 폭스(Liam Fox)가 임명됐다. 신설 부처 장관직에 거물급 정치인을 임명한 이유는 브렉시트 상황에서 통상업무가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리엄 폭스에 이어 2019~2021년에는 이후 총리가 된 리즈 트러스(Liz Truss)가 장관직을 맡았고, 이후에는 앤마리 트리벨리언(Anne-Marie Trevelyan)이 1년간 통상장관직을 수행했다. 국제통상부는 설립 이후 2~3년 만에 2,000여 명의 관료가 근무하는 대형 부처로 성장했다. 2017~2018년 국제통상부는 동시다발적인 무역협상에 착수했다. 2022년 11월 기준 영국은 67개국과 36개의 무역협정을 체결, 발효했다. 대부분의 무역협정은 EU가 체결한 협정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나 다름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불과 2~3년 동안 30여 건이 넘는 무역협정을 성공적으로 체결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만큼 영국의 국제통상부는 많은 업무를 수행해낸 부처다.
현재 통상장관은 케미 바데녹(Kemi Badenoch)이 맡고 있다. 미국과 나이지리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16세에 영국으로 돌아왔다. 브렉시트 지지자였던 바데녹 장관은 보리스 존슨 총리에게 중용돼 2019~2020년 아동가족부 정무차관, 2020~2021년 평등부 정무차관, 2021~2022년 평등부 부장관을 지냈다. 리즈 트러스는 총리에 취임하자 바데녹을 국제통상부 장관에 임명했다. 수낵 총리는 그를 유임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 및 평등부 장관직도 겸하게 했다.
의원내각제 특성상 집권당 의원이 장관직을 수행한다. 바데녹 장관은 사실상 통상관료로서의 경험이 거의 없다. 겸직하고 있는 여성 및 평등부 장관직에 더 적합한 경력을 갖고 있다. 반면에 40대 초반의 나이로 보수당 당대표 경선에 참여해 4위를 차지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영국의 차세대 리더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프리카계 이민 가정 출신, 세 자녀의 어머니로 영국 정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점에 관심이 집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