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은 한국과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 가연합)이 대화 관계를 수립한 지 35주년이 되는 해다. 양측은 2010년 ‘전략적 동반자 관계 (SP·Strategic Partnership)’를 수립하고 14년 만인 2024년 10월 관계를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CSP·Comprehensive Strategic Partner- ship)’1)로 격상했다. CSP를 통해 한국과 아세안은 단순 교역을 넘어 디지털 전환, 지속 가능성, 제도적 통합을 포괄하는 미래지향적 협력에 나서고 있다. 특히 디지털 무역은 한국과 아세안 간 새로운 성장축으로 주목받는다. 이 과정에서 한국은 기술력과 신뢰를 겸비한 아세안의 핵심 파트너로 부상 중이다. 국제경제법 권위자인 줄리앙 세즈(Julien Chaisse) 홍콩시립대 로스쿨 교수는 “디지털 무역은 한·아세안 관계의 부차적 의제가 아니라 핵심축”이라며 “한국은 이 변화의 기술 공급자를 넘어 제도와 신뢰를 함께 구축할 동반자로 아세안에 인식되고 있다”고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한국과 아세안은 최근 디지털 경제협력을 새로운 성장축으로 설정했다. 아세안 관점에서 한국은 디지털 파트너로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 국가인가.
“아세안 국가는 일반적으로 한국을 기술력과 정치적 신뢰성을 겸비한, 신뢰할 수 있는 디지털 협력 파트너로 인식하고 있다. 한국은 강압적 틀이나 조건부 협상 방식 없이 디지털 영향력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일부 강대국보다 더 매력적인 존재로 평가받는다. 스마트시티 구축, 5세대 이동통신(5G) 인프라 확대, 기술 기반 중소기업 지원 등에서 한국이 보여준 실적은 동남아 전역에서 긍정적인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또 한국은 단일 지배구조 모델을 강요하지 않아 비위협적이다. 규제 주권이 민감한 아세안에서는 이러한 유연성이 매우 중요하다.”
유럽연합(EU)과 중국은 디지털 주권과 데이터 국경 개념을 강화하고 있다. 아세안은 신중한 입장으로 보인다.
“아세안은 디지털 주권에 강한 이념적 입장을 보이기보다는 자율성을 지키면서 국경 간 통합을 배제하지 않는 실용적 접근을 선호한다. ‘아세안 데이터 관리 프레임워크(ADMF)’ ‘데이터 이전을 위한 표준 계약 조항(MCCs)’ 등이 이런 실용주의를 보여주는 사례다. 한국은 이 상황에서 한쪽 편을 드는 방식을 피해야 한다. 한국의 강점은 규제 역량을 강화해 주는 파트너십에 있다.”
디지털 서비스의 확대는 한국과 아세안간 경제 관계를 어떻게 재편할 것으로 보나.
“디지털 서비스는 양측 경제 관계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항구를 통해 물품을 단순히 주고받는 게 아니라, 클라우드 플랫폼, 핀테크, 온라인 교육, 원격 의료와 같은 서비스가 국경을 넘어 수요를 창출하고 있다. 중요한 건 기술 자체가 아니라 서비스를 뒷받침하는 법적 환경이다. 데이터 사용 규칙, 책임 소재, 디지털 서명 인정 여부, 서비스 인허가 체계 등이 실제 거래의 성패를 좌우한다. 한국은 기술 강국인 동시에 복잡한 규제 환경에서의 디지털 서비스를 작동해 본 경험이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은 단순 서비스 공급자가 아닌, 한・아세안 경제 관계에 새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아세안 정부와 디지털 서비스와 관련한 공동 기준을 개발하거나,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새 서비스를 시험할 수도 있다.”

데이터 흐름과 개인정보 보호는 한·아세안 디지털 무역의 핵심 이슈다. 이런 이슈는 양자, 지역, 다자 중 어떤 수준에서 다뤄져야 하는가.
“해당 이슈는 다층적 접근이 필요하다. 각 수준은 고유한 장점이 있다. 먼저 양자 수준의 경우 한국은 싱가포르나 태국처럼 개인정보 보호 제도가 성숙한 국가와 데이터 이전 협정이나 상호 인정 제도를 추진할 수 있다. 지역 수준에서는 아세안 내부의 법제 단절을 방지하기 위해 대화 플랫폼과 역량 강화 프로그램을 통해 아세안의 디지털 통합 의제를 계속 지원해야 한다. 다자 수준은 세계무역기구(WTO) 전자상거래 협상이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프라이버시 이니셔티브에서 아세안의 참여를 조율하며, 한국이 촉진자 역할을 할 수 있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와 기후 고려 요소가 디지털 무역 규범에 통합되고 있다.
“긍정적으로 보면 한국은 친환경 디지털 인프라, 탄소 인식 서비스를 통해 차별화된 ESG 가치를 제시할 수 있다. 부정적인 측면은 ESG 조건이 비관세 장벽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많은 동남아 중소기업이 복잡한 정보 공개나 추적 시스템을 따를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효과적인 ESG 통합을 위해서는 기술 지원, 유예기간, 지역 맞춤 메커니즘이 병행돼야 한다.”
아세안 내 디지털 인프라와 규제 성숙도 격차는 한국 기업에 어떤 기회와 과제를 제공하는가.
“이 격차는 전략적 진입 기회이자 법적 리스크를 동시에 내포한다. 디지털 수준이 낮은 국가에서는 한국 기업이 선도적 입지를 확보하고 파일럿 프로그램이나 민간합작 투자 사업(PPP)을 통해 미래 규제 기준 형성에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만큼 규제 불확실성도 크다. 대기업은 이를 감당할 수 있으나 중소기업은 어렵다. 따라서 정부 차원의 법률 지원, 지역 규제 표준화 촉진, 안정화 조항 협상 등이 병행돼야 한다.”
한·아세안의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 격상은 글로벌 디지털 무역 질서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한·아세안은 경직된 일률주의를 넘어선 유연성을 중시하는 디지털 협력 모델을 제시할 독특한 기회가 있다. 현재 글로벌 디지털 질서는 주권 중심의 진영과 무규제 개방 중심의 진영으로 양분되고 있다. 이 가운데 법적 수렴만이 유의미한 협력은 아니라는 점을 증명할 수 있는 모델로 한·아세안 파트너십이 작동할 수 있다. 절차적 정렬, 상호 인정, 적응적 규제에 집중함으로써 양측은 포용적 디지털 무역에 대한 실증 사례를 만들 수 있고 이 사례는 아프리카, 중남미, 남태평양 같은 다른 지역의 협력 모델로 확산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