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듣기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하 트럼프)이 4년 만에 백악관 주인 자리를 되찾았다. 이에 따라 내년 1월 출범하는 미국 신행정부의 정책이 한국과 세계경제에 미칠 영향에 대한 우려와 기대가 교차하고 있다. ‘월간 통상’은 전 세계적으로 명망이 높은 경제학자 4인에게 서면으로 트럼프 2기 시대 주요 변화에 관한 의견을 들었다. 히카르두 레이스(Ricardo Reis) 런던정경대(LSE) 교수는 경제학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소장파 학자 중 한 명이다. 포르투갈 출신으로 LSE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2004년 하버드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같은 해 가장 뛰어난 논문을 쓴 경제학자에게 주는 케네스애로상을 받았다. 2021년에는 유럽 경제 연구에 기여한 45세 이하 경제 학자에게 주는 이리외얀손상을 받았다. 불평등 연구로 이름난 토마 피케티가 이리외얀손상의 대표 수상자다. 이언 브레머(Ian Bremer) 유라시아그룹 회장은 글로벌 리스크(risk·위험) 예측 전문가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국가가 사라졌다는 의미에서 ‘G제로’ 이론을 제시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배리 아이켄그린(Barry Eichengreen)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캠퍼스(UC 버클리) 교수는 세계적인 통화·금융 시스템 전문가다. 국제통화기금(IMF) 선임 자문위원을 지낸 그의 연구는 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전 의장의 통화정책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도 출신인 에스와르 프라사드(Eswar Prasad) 미국 코넬대 무역정책 교수 겸 브루킹스연구소 선임 연구위원은 세계적인 국제 통상 전문가이자 중국 전문가로 명성이 높다. 국제통화기금(IMF) 금융 연구 부문 수석과 중국 담당 책임자를 지냈으며 미 상원 금융위원회와 금융서비스위원회 자문위원, 인도 정부 금융개혁위원회 자문위원 등을 지냈다.
국내에서는 2015년 출간된 ‘달러 트랩(The Dollar Trap: How the U.S. Dollar Tigh-tened Its Grip on Global Finance)’의 저자로도 널리 알려졌다. ‘달러 트랩’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와 중국의 급부상에도 미 달러 위상에 변화가 없는 이유를 분석해 주목받았다. 각각의 전문가와 주고받은 질의응답 내용을 좌담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미국 경제의 현재 상황을 어떻게 보나.
아이켄그린 “미국은 상대적으로 낮은 인플레이션과 높은 실질 임금 상승률을 바탕으로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이후 빠르고 완전하며 광범위한 경제 회복을 이뤘다. 역사상 가장 공격적인 연준의 긴축 사이클 덕분에 다수의 경제학자가 우려했던 실업률 증가 없이 인플레이션 목표치를 회복했다. 이 같은 성과는 상당 부분 세계 최대 경제 대국인 미국을 가장 탄력적으로 만든 구조적 특징 덕분이었다. 높은 투자·이민 매력과 혁신 기업가 정신의 허브라는 점 등이다.” 레이스 “향후 5년간 미국 경제의 흐름에 대해 낙관적으로 전망한다. 지난 2년 동안 미국 경제는 코로나19 팬데믹 이전 10년과 비교했을 때 조금 더 높은 성장 경로를 밟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의 여파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인공지능(AI), 에너지산업, 정보통신 기술의 혁신이 결실을 보고 있다. 지난 몇 달 동안 성장 속도가 약간 둔화하고 실업률이 약간 상승했을 수 있지만, 실업률은 여전히 매우 낮고 성장세는 견고하기 때문에 심각한 경기 침체라기보다는 경기 둔화에 가깝다.”
트럼프 2기 정부 정책은 미국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프라사드 “트럼프는 강력한 가계 소비와 탄탄한 노동시장, 적절한 생산성 증대 등을 기반으로 미국 경제가 모든 면에서 앞서나가고 있는 시기에 새로운 임기를 시작하게 된다. 내년에 인플레이션 이 적정 수준에서 통제될 경우 연준이 기준금리 인하를 단행할 것이고, 트럼프는 감세와 관련된 선거 공약을 이행하면서 재정지출을 늘릴 것이다. 그 결과 내년 한 해 동안 확장적 통화정책이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더해 트럼프가 기업 및 금융 관련 규제를 대폭 완화할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단기적으로 기업 실적에 호재로 작용할 수 있다. 따라서 내년에는 미국의 경제와 금융시장이 강세를 보일 가능성이 크다.”
브레머 “관세 인상 위협에 상대방, 특히 중국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결과가 다를 수 있다. 중국이 고율 관세 부과를 막기 위해 기꺼이 트럼프의 의견을 수용하며 모종의 거래를 성사시킨다면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고율 관세의 여파가 미국 소비자와 생산자에게 전해질 것이고 그 결과로 물가 상승은 가팔라지고 생산은 줄면서 글로벌 무역·투자·성장률을 떨어뜨릴 것이다. 또한 이민을 대폭 단속할 가능성이 큰데, 이는 미국 노동력을 축소하고 인건비를 높여 물가 인상 압력을 더욱 가중시키고 성장을 저해할 것이다. 이 경우 기준금리는 상승 압력을 받게 될 것이다.”
레이스 “미국은 재능 있는 이민자를 끌어들이고, 이들을 미국적인 가치하에 통합하며, 그들의 노력과 혁신으로부터 혜택을 누려왔다. 국경에 관한 주권을 지키면서도 이를 지속하는 것은 핵심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
행정부와 연방 의회의 상·하원까지 공화당이 장악한만큼 ‘트럼프표 경제정책’ 추진이 탄력받을 것 같다.
프라사드 “법인세와 가계 세율을 낮추고 정부 지출을 재조정하는 등 세제 개편이 속도를 낼 것이다. 트럼프가 예고한 대로 강경한 반이민정책을 밀어붙일 경우 미국의 노동시장, 특히 이주 노동력 의존도가 높은 농업과 건설업, 일부 저숙련 서비스업 직종에 상당히 파괴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한국 경제의 현 상황은 어떻게 보는지.
아이켄그린 “한국 경제는 수출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글로벌 경제 건전성에 따라 경제 전망이 크게 달라진다. 한국의 주요 수출 시장 중 하나인 중국은 경제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다. 미국 경제는 건실하지만, 성장세가 둔화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 경제를 둘러싼 불확실성은 앞으로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브레머 “전 세계적으로 통화정책의 완화 기조가 시작될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반도체에 대한 글로벌 수요 호황에 힘입어 지금까지 비교적 견조한 성장을 이어온 한국 경제에 순풍이 되어줄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이 인공지능(AI)과 전기차, 배터리 등 첨단산업에서 점차 중국산을 외면하고 있는 것도 한국에 호재로 작용하고 있다.”
한국 경제를 위한 조언 부탁한다.
레이스 “트럼프는 보호무역주의자이기 때문에 한국 같은 개방 경제에 큰 도전을 안겨줄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민간 부문의 적응력과 공공 부문의 유연성을 키워야 한다. 어려움이 따르겠지만 새로운 비교우위의 원천을 찾고 글로벌 경제에서 번영을 이루는 기회도 올 것이다.”
브레머 “한국은 지난 4년 동안 확대된 대미 무역 흑자를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트럼프는 무역 적자를 관세 인상 위협의 명분으로 삼고 있다. 한국은 한국 기업이 미국에 얼마나 많은 투자를 하고 있는지를 조기에 그리고 자주 상기시킴으로써 위협에 대응해야 한다.”
프라사드 “한국과 아시아의 다른 나라는 변동성이 큰 미국발 정책에 대응할 방안을 시급히 찾아야 한다. 내수를 강화하고 통화 및 재정 정책을 통해 글로벌 금융시장과 세계경제의 변동성 확산에 대처할 충분한 정책 여력을 확보해야 한다. 미국과 양자 무역 관계를 한층 더 발전시키고, 무역협 정을 통해 교역 상대국을 다변화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중국 경제의 현 상황은 어떤가.
브레머 “중국 경제는 시진핑(習近平) 지도부가 해결할 의지가 없거나 해결할 수 없는 여러 구조적 제약에 직면해 있다. 인건비 경쟁력 약화, 불투명하고 자의적인 정책 결정, 안보 우선주의, 높은 부채, 서방의 ‘디리스킹(de-risking·위험 제거)’ 노력 등 지정학적 도전, 과도한 국가 투자 의존 등이다. 그럼에도 중국은 기술력에서 미국과 거의 동등한 수준에 올라와 있고, 탈탄소·친환경에너지 분야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 중국이 향후 몇 년간 경제 적으로 계속 저조한 실적을 보이더라도 생활 수준에서는 성장의 여지가 많은 중요한 글로벌 강국으로 남을 것이다.”
레이스 “중국 경제는 2015~2020년의 부동산 호황 시절의 과잉 공급으로 인한 손실을 흡수해야 하며, 이로 인한 부담은 성장에 걸림돌이 될 것이다. 한편으로 성장률 둔화는 중국이 부유해지고 기술 선진국에 가까워짐에 따른 자연스러운 과정의 일부다. 중국은 향후 몇 년 동안 성장률을 미국이나 유럽보다 높게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연준의 통화정책은 어떤 영향을 받을까.
아이켄그린 “트럼프는 첫 임기 때와 마찬가지로 연준에 금리 인하를 요구할 것이다. 그가 언젠가 ‘나는 저(低)금리론자’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할지 모르겠다. 연준은 독립성을 주장하며 저항할 것이다. 따라서 통화정책을 둘러싼 갈등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본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의 임기는 2026년에 끝나는데, 갈등은 그때 최고조에 달할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가 첫 임기 때 지명한 두 명의 의장 후보는 무능하거나 극단적이라는 이유로 의회가 승인을 거부했었다.”
한국은행은 어떻게 준비하고 대응해야 할까.
아이켄그린 “한국의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은 미국의 상황 변화만으로 정책을 결정해서는 안 된다. 자체 인플레이션 목표에 집중해야 한다.”
달러의 위상에 변화가 생길까.
프라사드 “미국의 경제 호황 속에 트럼프가 중국과 다른 많은 나라에서 미국으로 오는 수입품에 관세를 부과해 무역 적자를 줄이고, 확장적 재정 정책을 시행할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모두 달러 가치 상승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반면 원화를 포함해 다른 선진국과 신흥국 통화에는 상당한 하방 압력이 가해질 것이다. 트럼프의 정책은 미국의 공공 부채를 크게 늘리고 연준의 독립성을 약화할 수 있다. 그렇게 될 경우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역할, 특히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안전 자산’ 인 미국 국채의 위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지켜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 해도 유로화와 위안화가 약세에 직면한 상황에서 대안이 없기 때문에 달러의 지배력은 오랫동안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
달러 가치 상승이 한국 경제에는 어떤 영향을 줄까.
프라사드 “달러 가치가 급격히 상승하고 원화에 상당한 하방 압력이 가해질 경우 한국의 물가 상승이 가팔라질 수 있고, 달러로 차입하는 한국 기업의 자금 조달 조건이 더 까다로워질 수 있다. 전반적으로 트럼프의 두 번째 임기 동안 무역과 기타 경제 및 지정학적 문제에 관한 미국의 대외 정책 불확실성은 훨씬 더 커질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