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풀기
국제 통상 질서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 중심의 다자 통상 체제가 약화하고, 미국을 비롯해 주요국은 경제 안보를 명목으로 내세워 자국 우선주의를 가속화하고 있다. 이에 한국 정부는 8월 22일 “경제 안보와 공급망 등신(新)통상 이슈는 정책적으로 관리할 사안”이라며 새로운 ‘통상 정책 로드맵’을 공개했다. 자유무역협정(FTA)과 경제동반자협정(EPA) 체결 확대로 한국의 FTA 네트워크를 세계경제의 90% 수준으로 확대하고, 핵심 품목의 공급망을 안정적으로관리하기 위한 방안이 담겼다.
특히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 국가를 중심으로 핵심 품목 공급망 협력에 힘을 싣기로 했다. 하지만 변수도 많다. 올해 11월 미국은 대선을 앞두고 있고, 우크라이나와 중동 지역에서는 전쟁이 장기화하고 있다.이처럼 급변하는 글로벌 통상 환경에 신속한 대응이 요구되는 지금, 앞으로 한국이 풀어낼 과제로는 무엇이 있을까. ‘통상’이 조상현 한국무역협회국제무역통상연구원 원장, 채수홍 무역안보관리원 정책협력실장, 류예리 경상국립대 지식재산융합학과 전담교수 등 3인에게 새로운 통상 질서의미래와 한국의 활로에 관해 물었다.
최근 한국이 마주한 글로벌 통상 환경 및 리스크 중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조상현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원장 (이하 조상현) “이른바 ‘하이브리드형 통상’ 시대가 도래했다. 과거에는 자유시장 경제 질서 안에서 전세계 국가가 FTA를 통해 시장 접근을 확대하고, 관세를 인하하고, 서로 문호 개방하면서 경제적인 편익을 높이는 데 주안점을 뒀다. 그런데 최근 기후변화에 대응한 탄소 중립 이슈와 함께 노동 문제, 청정에너지, 반부패 등 사회·문화적 이슈까지 통상의 영역에 포함되고 있다. 이제는 통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고차방정식을 풀어야 하는 시대로 바뀌었다. 이러한 트렌드는 앞으로 계속될 것이고, 이와 함께 통상 질서가 새롭게 만들어질 것이다.”
채수홍 무역안보관리원 정책협력실장 (이하 채수홍) “미국이 중국과 러시아 등을 대상으로 반도체 및 포괄적 수출 통제를 강화하는 등 통제 대상 품목이 확대되면서 국내 기업의 수출 여건이 어려워지고 있다. 2022년 2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후 무역안보관리원은 수출 통제 현안 데스크를 개설해 수출 기업의 애로 사항을 청취하고 상담을 제공하고 있는데, 2022년에는 2000여 건, 2023년은 4000여 건의 상담이 접수됐고 올해는 9월 기준 6000여 건이 넘어서고 있다.”
류예리 경상국립대 지식재산융합학과 전담교수 (이하 류예리) “현재 한국이 직면한 글로벌 통상 환경은 경제 안보 리스크 확대로 인해 세계경제 질서가 구조적으로 변화하고 있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각국은 경제 안보 강화와 공급망 재편에 대응하기 위한 통상 개입적 산업 정책을 내놓고 있다. 다자 통상 체제의 마비로 인한 자국 이기주의 통상 정책이 고착화되고 있다.”
실제 수출 기업을 비롯해 통상 현장에서도 이런 변화를 체감하는 분위기인가.
조상현 “그렇다. 지금 통상 환경의 진짜 문제는 엔데믹(endemic·감염병 주기적 유행) 상황에서도 글로벌 경제와 공급망이 회복하지 못하고, 미국의 중국 견제가 관세와 쿼터를 넘어 수출, 기술, 투자 통제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 인플레이션 감축법(IRA)1)을 비롯해 유럽연합(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2) 등이 법제화하면서 기업까지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게 됐다. 이에 주요 대기업은 미국 워싱턴 D.C. 현지에서 대관 업무 역량을 대폭 강화했다. 적극적인 정보 수집과 네트워킹 강화에도 나서고 있다. 국내에서도 최근 대·중소기업을 가리지 않고 한국무역협회(이하 무역협회)에 정보 공유와 협의 요청이 증가하고 있다. 다만 중소기업은 인적 및 재정적 대응 역량이 부족하다. 무역협회와 유관 기관이 중소기업의 정보제공 창구가 되기 위해 노력 중이다.”
+ 세계 경제성장 이끄는 글로벌 사우스
올해 8월 정부는 변화하는 통상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새로운 ‘통상 정책 로드맵’을 내놨다. 눈여겨 볼 부분은.
류예리 “전문가와 산업계의 의견을 수렴하고 부처 간 이견을 조율해 완성한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기본에 충실한 통상 정책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이번 로드맵에서는 글로벌 사우스와 광역 단위의 다층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위한 전략을 상세히 담았다. 즉, 전략적 균형추로 급부상 중인 글로벌 사우스 국가와 협력을 강화해 핵심 광물 공급망의 안정성을 높이고, 수출·생산 기지 등 글로벌 협력 거점으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최근 글로벌 사우스는 국제 무대에서 외교·경제적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다. 중국을 제외한 글로벌 사우스는 전 세계 인구의 62.8%, 국내총생산(GDP)의 20.4%를 차지하고 있어 세계 질서 재편의 전략적 균형추로 부상중이다. 특히 한국 정부의 원조와 국익이 조화되는 가칭 ‘K산업 연계형 공적개발원조(ODA)’ 정책 추진은 그 효과를 단기적으로 실현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 두 배로 늘어난 ODA 예산을 산업 통상 정책과 연계시키는 것은 그 의미가 크다.”
조상현 “글로벌 사우스와 같이 성장 잠재력이 큰 신흥시장, 핵심 광물자원 보유국과 협력해 미래 성장성과 공급망 안정을 도모하겠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특히 탄소 통상과 디지털 통상 등 새로운 무역 규범에도 적극 대응하겠다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다. 현 정부 출범 후 공급망 교란, IRA, CBAM 등 상당히 중대한 이슈가 연달아 발생해 이에 대응하는 게 급선무였다. 이런 큰 흐름의 변화를 반영해 이번에 로드맵을 내놓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 상황이 상당 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이는 만큼 뚝심 있게 추진할 필요가 있다.”
채수홍 “자유무역 질서 이후 경제 안보가 무역의 주요 화두가 되는 시점에 정부가 경제 안보 측면을 강조한 것은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무역안보 관리원도 이번 로드맵에 발맞춰 전략 물자 관련 핵심 기술에 대한 정부의 수출 통제를 지원하고 우리 기업이 우려되는 수출에 연루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정부는 FTA 네트워크를 90%까지 확충하면서 양적 확대가 아닌 질적 확대를 하겠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질적 확대란 무엇을 뜻하는가.
조상현 “정부는 전 세계 GDP 85%인 FTA 네트워크를 90%까지 넓히겠다고 했다. 5%포인트밖에 안늘린다고 할 수 있지만, 사실 매우 큰 차이다. 이미 한국이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국가들과 FTA를 맺었기 때문이다. 정부가 말하는 질적 확대는 앞서 논의된 새로운 통상 의제와 달라진 통상 환경에 맞춰 공급망, 디지털, 환경 등의 이슈를 깊이 있게 다뤄 보다 포괄적인 FTA를 체결하겠다는 의미다. 또 시장 개방 수준을 높이는 동시에 국내에서 FTA 활용을 제고하겠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실제로 정부는 무역협회와 함께 FTA 종합지원센터를 통해 기업의 FTA 활용을 적극 지원하고, 행정 역량이 부족한 해외에서도 설명회를 열고 있다.”
채수홍 “그간 FTA는 무역 원활화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관세, 원산지 등 여러 주제를 다뤄왔으나, 이제 경제 안보 질서가 대두되면서 이에 관련된 이슈를 다뤄야 할 필요성이 높아졌다. 단순히 FTA의 숫자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FTA가 다뤄야 하는 이슈를 기존의 전통적인 관세, 원산지 등 무역 규범의 요소로부터 벗어나 수출 통제, 투자 심사 등 새로운 경제 안보 이슈를 다뤄야 하겠다는 의도다.”
류예리 “통상 정책이라는 것은 양적 측면을 다루다 보면 질적 측면을 간과하기 쉽다. 대표적인 질적 고려 사항은 통상을 확대하면서도 우리 기업의 글로벌 공급망 안정성 강화에 역점을 두었다는 점이다. 그중 하나가 바로 글로벌 사우스다. 시장으로서도 눈여겨봐야 하지만 핵심 광물과 에너지 자원 확보에도 협력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전략에 담고 있다.”
11월에 예정된 미국 대선 결과가 글로벌 통상 환경에 새로운 변수가 될 예정이다. 한국은 앞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조상현 “내부적으로 대선 결과에 따라 달라질 무역 투자 상황별 시나리오를 점검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부분, 여기서도 정부의 역할, 민간의 역할을 구분해 준비하고 대응하는 게 필요하다. 현재 미국이 추진하고자 하는 다양한 산업 정책, 통상 정책, 경제 안보 정책에서 한국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양국은 그 어느 때보다 상호 전략적 가치가 높은 상황이다. 따라서 선거 과정에서 나올 다양한 주장에 일희일비하기보다 미국에 대한 한국의 기여와 필요성을 인식시키고, 선린 우호 관계를 돈독히 할 수 있는 대응 전략을 마련하며 차분히 대선 과정을 예의 주시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채수홍 “미국의 대선 결과와 상관없이 자국의 핵심 기술을 보호하는 수출 통제는 큰 변화 없이 유지될 전망이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1기와 현재 조 바이든 행정부를 비교해 보면, 수출통제 등 무역안보 정책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이번 대선에서 어떤 후보가 당선되든 통상 정책의 큰 방향은 바뀌지 않고, 일관될 것이다. 한국도 이런 상황을 고려해 미국의 통상 정책이 미칠 영향을 점검하고 대비해야 한다.”
+ 핵심 광물 풍부한 글로벌 사우스
중국도 중요한 변수다. 한중 통상 관계에서 가장 눈여겨보는 현안은.
조상현 “중국의 과잉생산에 따른 저가 수출 확대가 우려된다. 한국 시장에 계속 부담을 줄 수 있어서다. 미국, EU 등이 중국산 수입제한을 강화한다고 해서 한국이 반사이익을 볼 것이라는 기대도 있지만, 되레 해당 시장 외 다른 국가로의 수출과 경쟁에서는 부담이 될 수 있다. 최근 한국에서 존재감을 키우는 중국 전자상거래 플랫폼(C커머스)도 상황은 비슷하다. 단순히 전자상거래 플랫폼에 국적을 붙여 판단하고 제재를 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미 한국 전자상거래 플랫폼에서도 많은 중국 저가 제품이 판매되고 있다. 근본적으로 우리 기업 즉, 전자상거래 기업과 여기에 입점한 국내 제조 기업 그리고 소비자를 중심축으로 삼아 건전성을 심사하고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을 만들 때다. 동시에 규제의 이면에는 혁신을 저해 한다는 부작용도 따를 수 있기 때문에 현명한 판단이 필요하다.”
류예리 “미·중 갈등 구도에서 미국과 중국이 한국에 기대하는 바가 정반대다. 중국 첨단산업에 대한 수출 통제는 중국에 뼈아픈 조치지만, 한미 동맹으로 얽힌 우리 입장에서는 미국 정책에 동참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수출 통제는 장기간 유지될 것이고, 이 부분에 대한 중국의 요구 사항도 증가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경제적 강압이나 경제 보복이 핵심 광물에 대한 수출 통제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우리로서는 과도한 중국 의존도를 줄여나가는 게 필요하다. 이번 통상 정책 로드맵에서 이 점에 대한 전략을 다수 수립하고 있다. 중국 철강 과잉 공급 문제도 핫이슈다. 미국뿐 아니라 EU와 일본 등에서도 문제를 제기할 것이고, 중국 상품의 수출 시장은 점점 줄 것이다. 결국 중국이 새로운 수출처를 탐색하면서 한국을 포함한 제삼국으로 수출이 증가할 수 있다. 문제는 중국산 철강을 사용한 한국 제품에 대한 미국 등의 수입 규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지난 7월 미국은 멕시코를 거쳐 수입되는 중국산 철강과 알루미늄 제품에 관세를 부과하기로 했다.”
채수홍 “수출 통제 측면에서 보면 세계가 중국에 의존하는 원자재, 광물 등에 대해 중국이 수출 통제를 강화할 가능성이 있다. 이에 대비해 한국도 특정 국가 의존도가 높은 품목에 대해 의존도를 낮추는 노력을 하는 동시에, 중국이 자의적인 수출 통제가 아니라 법과 규제에 입각한 투명한 수출 통제를 하도록 설득하고 협의해 나가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용어설명
- * 인플레이션 감축법(IRA)(1)
미국이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완화를 위해 제정한 법. 기후변화 대응, 보건 분야 복지 개선, 기업 과세 개편 등을 통해 미국의 재정 적자 해소 및 친환경 경제로의 전환이 목표다. 특히 기후변화 대응과 관련해 미국 내 전기차 등의 공급망을 확대한다는 내용이 담겼는데, 정부의 전기차 보조금을 받으려면 배터리용 핵심 광물을 미국 또는 미국과 FTA를 체결한 국가에서 조달해야 하고, 배터리 부품을 북미에서 일정 수준 이상 제작·조립하는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 탄소국경조정제도(CBAM)(2)EU 역내로 수출하는 기업이 협력사 등 공급망까지 탄소 배출량을 신고해 자국에서 덜 낸 탄소세를 내도록 하는 제도. 2026년 1월 본격 시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