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장영욱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유럽팀 부연구위원
유럽연합(EU)의 탄소 감축 목표는 세계에서 가장 전향적인 축에 속한다. EU의 행정부 격인 EU 집행위원회는 2019년 말 출범 직후 첫 번째 정책으로 탄소중립 시한을 2050년으로 못 박은 ‘유럽 그린딜’을 발표했다. 향후 10년간 온실가스 감축 목표도 1990년 대비 40% 감축에서 55% 감축으로 15%p 상향했다. 이 목표는 회원국 간 1년 이상의 치열한 토론을 거친 끝에 올 6월 ‘유럽 기후법(European Climate Law)’이란 이름으로 법제화됐다. 토론이 진행되는 사이에도 탄소중립 목표를 향한 각종 정책이 차근차근 시행되고 있었다. 전향적인 중장기 목표 달성을 위해 경제·사회 전반에 걸친 구조적 전환을 시도했다.
유럽연합(EU)은 기후위기 속 인류 생존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지난 7월 14일 ‘핏 포 55(이하 Fit for 55)’를 발표했다. 우리나라에선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Carbon Border Adjustment Mechanism)가 가장 주목받았지만, Fit for 55에는 이 외에도 다양한 분야의 온실가스 감축 목표 및 실행 방안이 제시됐다. Fit for 55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에너지, 수송, 건축물, 토지이용 등과 관련한 법안 12개를 제정 또는 강화하고, 사회기후기금이라는 지원대책을 추가해 친환경 구조 전환의 밑그림을 그렸다. 12개 입법안은 크게 가격 결정 개입, 감축 목표 설정, 환경 규정 강화의 세 가지 범주로 나뉜다.
친환경 구조 전환은 규정과 의무만으로 달성하기 어렵다. 정부가 무리하게 개입할 경우 자원 배분에 왜곡이 생기고 기업의 경쟁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온 방식이 시장의 가격 결정 기제를 활용해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도록 유도하는 ‘배출권거래제(ETS; Emission Trading System)’다. ETS는 정부가 기업에 일정 수준의 온실가스 배출 허용량을 부여한 후 기업이 허용량 이하의 온실가스를 배출할 경우 잔여분을 시장에서 거래하도록 한 정책이다. 할당량을 초과해 온실가스를 배출한 기업은 시장에서 배출권을 구매해 부족분을 채울 수 있다. 할당량의 크기와 각 기업의 탄소 감축 노력에 따라 배출권 가격이 결정된다.
EU의 ETS는 철강, 전력, 알루미늄, 화학, 시멘트, 역내 항공 등 온실가스 배출 업종을 대상으로 2005년부터 시행 중이었다. 이번 Fit for 55에서는 적용 대상을 해운, 육상운송 및 건축물 분야로까지 확대했고 항공 분야 무상 할당도 단계적으로 축소하기로 결정했다. 이와 더불어 CBAM이 함께 제시됐다. ETS가 역내 기업에만 적용될 경우 가격경쟁력이 약화될 뿐 아니라 이른바 ‘탄소누출’1) 현상이 발생한다. 이에 EU는 온실가스 감축 노력이 미흡한 국가에서 수입되는 제품에 ETS와 연계해 비용을 부과하기로 했다. 이번에 제시한 법안이 그대로 통과하면 2023년부터 EU로 수입되는 시멘트·철강·알루미늄·비료·전력 분야 최종 제품의 온실가스 배출량 신고가 의무화되며 2026년부터 상품에 내재된 탄소배출량만큼 ‘CBAM 인증서’를 매입하는 형태로 비용이 부과된다. 인증서 가격은 EU ETS의 평균가격과 연동해 책정된다.
1) ETS를 강화할 경우 역내 기업들의 가격경쟁력이 약화돼 느슨한 환경 기준을 적용받는 역외 기업의 매출이 늘거나 역내 기업이 생산설비를 이전할 가능성 발생, 국내에선 탄소배출량이 감소되지만 국외 탄소배출량은 오히려더 늘어나는 현상을 ‘탄소누출’이라고 일컫는다.
기존 ETS 적용 분야는 전체 탄소배출량의 약 40%를 차지한다. 나머지 60%를 차지하는 건축물·운송·농업·폐기물 분야에서도 탄소 감축 노력이 필요하다. 이 중 일부는 강화된 ETS 체계 안으로 편입됐지만, 가격 결정 기제만으로 줄일 수 없는 부분도 존재하므로 다른 조치가 병행돼야 한다.
이번 Fit for 55에서는 상기한 분야의 탄소 감축 목표를 명확히 하고 회원국별 대응방안을 규정하기 위해 노력분담규정(ESR; Effort Sharing Regulation)이 강화됐다. 이번 개정안은 ESR 적용 분야에서 온실가스 배출량을 기존 2030년 목표였던 2005년 대비 29% 감축을 40% 감축으로 상향했다. 다만 회원국별 역량 차이를 고려해 국가별 온실가스 배출 감축 목표에는 차등을 두었다. 국내총생산(GDP)이 낮거나 화석연료 의존도가 높은 동유럽 국가들이 주로 낮은 목표를 부여받았으나, 전반적으로 기존 목표 대비 더 강화된 목표가 제시됐다.
탄소 감축의 핵심은 재생에너지의 사용 비중을 높이는 것이다. 그간 청정에너지 기술 개발과 투자로 재생에너지원 비중이 지속적으로 커져 최종 에너지 소비 기준 재생에너지원 비중은 2004년 9.6%에서 2019년 19.7%까지 증가했다. EU는 본래 이 비중을 2030년 32%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목표였으나, 이번 ‘재생에너지지침’ 개정으로 목표치를40%로 상향시켰다.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를 증대하고 재생에너지 사용이 용이한 인프라를 구축함으로써 전 산업에 걸친 재생에너지원 사용 확대를 도모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이와 더불어 에너지 사용량 자체를 줄이고 비용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에너지효율지침’을 개정했다. 2030년 에너지 효율화 목표를 기존 예측치 대비 32.5%에서 36~39%로 상향했다.
탄소 감축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탄소흡수다. 탄소중립은 탄소배출량에서 탄소흡수량을 뺀 값, 즉 순배출(Net Emission)이 0이 되는 상태이기 때문에 탄소흡수량을 늘리면 탄소배출량을 감축하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볼 수 있다. 이를 위해 Fit for 55에서도 ‘토지이용·토지이용변화·임업규정(LULUCF: Land Use, Land Use Change and Forestry Regulation)을 개정해 천연 탄소흡수원의 질과 양을 증가시키는 방안을 제시했다.
목표 달성을 위해 각종 환경 관련 규정을 강화하는 조치가 이번 Fit for 55의 한 축으로 포함됐다. 가장 대표적인 규제조치는 내연기관 자동차 생산의 단계적 축소다. 하이브리드카 포함, 내연기관 차량에서 발생하는 탄소배출량을 2030년까지 승용차 부문 55%, 승합차 부문 50% 감축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이는 기존 목표였던 37%, 31%에서 대폭 상향한 수치다. 2035년부터는 내연기관 자동차 출시 자체를 금지하는 강력한 규제를 제시했다. 내연기관 자동차 축소를 위해 전기차, 수소차 등 탄소제로 차량의 확대, 신규 개발 및 상용화가 필수다. 이를 지원하기 위해 ‘대체연료 인프라 규정’을 만들어 EU 전역의 전기 및 수소차 충전 인프라를 구축한다. 이 규정은 기존 대체연료지침을 강화한 것으로, 규정의 경우 지침과 달리 회원국의 국내 입법절차 없이 바로 적용되며, 회원국 재량에 의해 바꿀 수 없어 더 강력하다.
또한 항공 및 해상운송 분야에서 친환경 연료 사용을 규정하는 지침을 신설했다. ‘항공운송 연료 기준(ReFuelEU)’는 항공 분야 지침으로, EU발 모든 항공기가 기존 항공유에 바이오연료와 같은 지속 가능한 항공연료를 혼합해 사용하도록 의무화했다. ‘해상연료 이니셔티브(FuelEU Maritime Initiative)’는 해운 분야의 연료 사용 원칙을 규정한다. 유럽의 모든 항구에서 선박이 사용하는 에너지의 온실가스 총량을 규제함으로써 지속 가능한 해운연료 개발 및 제로배출 기술개발을 장려한다.
상기한 12개 입법안이 원안 그대로 진행된다면 산업 및 경제 구조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변화가 일어난다. 석탄 및 원유 채굴, 화석연료 발전, 내연기관 자동차 제조 등과 그 연관 산업이 축소되며 해당 업종 종사자의 일자리가 사라진다. 또한 특정 산업에 의존하는 지역 역시 타격을 입는다. 기후변화 대응의 ‘이해관계자’라고 할 수 있는 이들에 대한 지원 대책은, 정책의 부정적 효과를 줄일 뿐 아니라 정책에 대한 반발을 줄이고 수용성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모든 이해관계자의 민주적 참여를 보장하기 위한 지원 대책인 이른바 공정 전환은 기후변화 대응의 핵심 요소로 꼽힌다. 기존 유럽 그린딜 발표 시에도 공정전환체계(Just Transition Mechanism)에 1,000억 유로의 예산을 배정해 실업급여, 직업훈련, 일자리 소개, 금융 접근성 등의 혜택을 제공한 바 있다.
이번 Fit for 55에도 ‘사회적으로 공정한 전환’이라는 이름으로 소외 산업, 지역, 노동자에 대한 지원대책이 포함됐다. 친환경 구조 전환을 지원하기 위해 사회기후기금을 신설하고 2025~2032년 사이 약 722억 유로를 편성했다. 이 기금은 건축물 및 육상운송 관련 ETS 도입으로 인해 영향을 받은 가구, 차량 이용자, 소상공인 등에 대한 현물 및 금융 지원에 사용된다. 또한 에너지 효율 달성을 위한 건물 리모델링, 청정 냉난방, 재생에너지 사용 등에 투자해 에너지 접근성이 떨어지는 취약계층을 최소화하고자 했다.
Fit for 55에 대한 대응으로는 두 가지 측면을 생각해볼 수 있다. CBAM, 내연기관 퇴출 등 직접적으로 한국 기업의 수출 및 생산활동에 미치는 영향을 주는 조치의 영향을 최소화하는 대응을 개발하는 한편, EU의 선도적인 정책에서 우리가 배울 점을 찾아 이제는 생존의 필수조건이 돼버린 탄소 감축을 더 빠르게 달성해야 한다. 우리 정부도 지난해 이미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선언했고, 최근 탄소중립위원회의 활동을 통해 탄소 감축 계획을 구체화했다. 친환경 구조 전환을 통해 우리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의 대응이다.
단기적으로는 EU의 조치가 직접적으로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고 이를 최소화하기 위한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특히 CBAM이 원안 그대로 통과하면 2026년부터는 우리 기업이 EU로 수출하는 시멘트·철강·알루미늄·비료·전력 분야 최종 제품에 대해 CBAM 인증서를 매입해야 한다.
이에 대해 정부는 CBAM이 국내 기업 수출에 급격한 변화를 미치지 못하도록 세계무역기구(WTO) 협정과의 합치성 검토 등을 통해 대응할 필요가 있다. EU의 환경 조치는 이전에도 통상분쟁으로 비화한 경우가 있으므로, CBAM의 영향권에 놓여 있는 다른 이해당사국들과의 직접적인 법률적 의견 교환을 통해 입법안이 원안대로 통과되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을 수 있다. 또한 5년간의 과도기간을 통해 국내 기업이 CBAM에 적응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관리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CBAM의 영향을 받는 품목들을 수출하는 국내 기업, 특히 중소기업들이 자체적으로 탄소배출 데이터를 수집하고 제출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탄소배출 비용에 대한 EU 인증절차에 대비하기 위한 CBAM 인증 전문기관을 신설하는 방식으로 국내 기업을 지원할 수 있다. 또한 국내에서 이미 시행 중인 ETS가 CBAM 적용 시에도 인정될 수 있도록 세부품목별 탄소배출량 데이터베이스(DB), 탄소배출 산정시스템, 탄소중립 성과관리 등 탄소 관련 DB 통합관리시스템 구축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는 단기적인 조치에 불과하다. 궁극적으로는 국제사회와 발맞춰 우리 기업도 친환경 기술 전환을 서두르고 변화된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지원이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작년 10월 2050년 탄소중립 목표를 제시했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올 7월 ‘한국판 뉴딜 2.0 추진계획’을 발표했다. 한국판 뉴딜의 한 축인 그린 뉴딜 분야에 ‘탄소중립 추진기반 구축’ 항목을 추가해 배출권거래제, 순환경제, 탄소흡수원 관리 등 EU의 정책과 유사한 내용을 담았다. 현재 우리나라의 2030년까지 중간목표는 2017년 수준 대비 24.4% 감축으로 다소 소극적인 편이지만, 외교부에 따르면 우리 정부 역시 2025년 이전에 추가적인 감축목표를 명시하기로 계획하고 있다.
다만 EU와 달리 우리나라의 탄소배출량은 최근까지 지속적으로 상승해왔다. 2050년까지 탄소중립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향후 10년간 감축노력에 박차를 가할 필요가 있다.
또한 기업 차원에서 친환경 기술 혁신을 가속할 수 있도록 지원이 필요하다. CBAM 시행이나 내연기관 규제 등은 친환경 기술을 갖춘 기업에는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 국내 기업이 그린수소, 태양광, 풍력 등 청정에너지 기술 개발 및 효율화, 탄소 포집 기술 고도화 등에 적극적으로 투자할 수 있도록 세부적인 정책을 가다듬어야 한다. EU에서 시행하듯 청정에너지원에 낮은 세율을 적용하고 ETS 등으로 발생한 추가세입을 친환경 기술 투자에 재투입하는 방안을 생각해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민간의 참여를 극대화하기 위한 방책으로 공정 전환을 더 적극적으로 시행해야 한다. 그린 뉴딜에도 공정한 전환 지원이 정책 및 입법 과제로 포함됐다. 석탄발전 등 사업축소가 예상되는 위기지역에 신재생에너지 업종 전환을 지원하고, 농업분야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지열, 폐열 등 재생에너지 설비 설치를 지원하며, ‘에너지전환지원법’ 제정을 통해 소외계층 참여를 유도하는 내용이 제시됐다. 그러나 여전히 공정 전환에 대한 홍보가 충분하지 않고 예산 규모 면에서 핵심 사업으로 포함됐다고 보기 어렵다. 이해당사자의 민주적 참여가 기후위기 대응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소외 산업 또는 소외 지역에 대한 더 적극적인 지원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한국판 뉴딜 2.0의 한 축으로 제시된 휴먼 뉴딜을 공정한 전환과 명시적으로 연결하는 방안을 고려해볼 수 있다.
기후위기에 대한 대응은 인류의 생존을 위해 피할 수 없는 과제다. 우리 정부와 기업 역시 비켜갈 수 없으며, 한편으로는 도전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번에 EU가 제시한 각종 입법안이 어떻게 구체화되는지 살피며 그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면서 더 적극적인 친환경 기술 투자를 통해 우리 기업 역시 경쟁력을 갖추도록 지원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소외되는 산업, 노동자, 지역이 없도록 ‘사회적으로 공정한 전환’ 달성에도 세심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